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최강의 "조가인(赵家人)": 조동(赵东), 조래(赵来), 조덕(赵德), 조회(赵怀)

중은우시 2024. 6. 19. 14:06

글: 조대부(赵大夫)

"조가인"이라는 말은 이미 유행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권력귀족과 그 직계친족을 공격할 때 사용하고 있다. 우리들 백가성의 첫번째에 위치한 조씨집안의 후인들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미안해지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

"조가인"이라는 말의 기원

"조가인"이라는 단어는 대륙인터넷의 유행어이다. 널리 체제내의 고위관료, 기관내의 고위층 및 그 가족들, 체제와 관계가 밀접한 기업가, 부호, 예술가 및 그 가족들을 가리킨다. 다만 평상시에는 홍색권력귀족계층을 주로 가리킨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2015년 12월, <완커(万科)바오능(宝能)분쟁: 문앞의 야만인, 문뒤의 조가인>이라는 글이 바로 이 유행어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사용한 "조가인"은 중공권력귀족계층을 가리킨다.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가인"은 중국대륙의 인터넷유행어가 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앙선전부는 일찌기 명을 내려 매체에서 "조가인" "홍조(红朝)" 및 이와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이미 이런 단어를 사용한 매체는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중앙선전부의 이러한 조치는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 간결한 단어는 지금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고, 단기간내에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조가인"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근원은 노신(鲁迅) 선생의 문학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두 부의 소설작품 <광인일기(狂人日记)>와 <아Q정전(阿Q正传)>이라고. <광인일기>에서 영향력이 비교적 큰 한 마디는 이러하다: "조가의 개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赵家的狗又叫起来了)", <아Q정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한 마디는 이러하다: "너는 어찌 성이 조씨냐. 네가 어떻게 조씨에 어울리느냐!"

이 주장에서는 문학이론계에서 공인된 견해라고 생각한다. <백가성>에서 조씨는 제일성이다. 송나라때 황족의 성씨이다. 그러므로, 노신이 말한 "조가"는 소설에서 권세와 재산을 가진 대갓집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터넷공간내에서 "조가인"이 가리키는 것은 기득권자, 권력을 실제로 장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정조(精赵)"는 정신적 조가인을 가리킨다. 스스로 다른 사람의 덕을 볼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조가인"이 노신 소설에 나오는 인물인 "조노태야(赵老太爷)"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상최강의 "조가인" 진용

2013년, 서안사변(西安事变)의 비밀에 관련된 문건이 뜻밖에 공개되었다. 원인은 그 문건의 소유자가 미국 뉴욕의 경매에 내놓았고, 거래가격이 270만달러라는 거액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모택동(毛泽东)등이 서안사변전에 장학량(张学良)에게 보낸 친필서신이 들어 있었다. 이 비밀문건의 최초보유자는 미국인인 하이랜드 리용(Hyland Lyon)이었다.

하일랜드 리용은 1908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1973년 미국에서 사망한다. 1925년부터 1934년의 기간동안 리용은 헐리우드에서 배우 겸 스턴트배우를 지냈다.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그는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페어뱅크에서 비행기수리기사로 있었고 그후 1934년 그가 좋아하던 여배우 Deest Claire를 따라 중국 상하이로 간다.

중국에 도착한 후, 리용은 상하이, 쿤밍등 여러 도시를 오가면서 여러가지 사업기회를 찾는다. 1935년부터 1941년까지 하일랜드 리용은 장학량이 막 구매한 새 비행기를 조립해주었다. 나중에는 장학량의 개인비행기조종사, 비행기엔지니어 겸 보디가드가 된다. 서안사변(1936년 12월 12일)이 발발한 후, 장학량은 리용에게 조일획(赵一荻) 모자의 개인보디가드가 되어발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리용은 AP통신사의 사진기자이기도 했다. 이런 특수한 위치와 경력은 그가 여러 진귀한 사진을 남기도록 해준다. 그중에는 "서안사변", "813송호회전"등의 중요인물, 사건을 기록한 영상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리용은 중국을 떠난다. 그는 개인문건과 사진을 담은 6개의 대형짐상자 그리고 장씨집안에서 부탁받은 사적인 물건을 담은 금고를 가지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다. 거기에는 전술한 서안사변에 관련된 비밀문건도 들어 있었다.

한 문건이 특히 중요했는데, 1936년 8월 9일 중공지도자들이 단체로 서명하여 장학량에게 보낸 서신이다. 모두 6페이지이다. 마지막 한 페이지는 "팔월 십오일부터의 가명"인데, 거기에는 당시 국공양당, 장학량방면, 소련방면요원드링 약정한 비밀가명이 적혀 있는데, 장왕이조(张王李赵)의 네개 성씨로 구분했다. 이가는 동북군이고, 장가는 각로군벌이고, 왕가는 국민당인원이며, 조가는 중공요원이었다.

예를 들어, 장학량의 가명은 이의(李毅)이고, 왕이철(王以哲)의 가명은 이인(李仁)이다; 장문천(张闻天)의 가명은 조천(赵天)이며, 박고(博古)의 가명은 조고(赵古)이고, 모택동의 가명은 조동(赵东), 주은래(周恩来)의 가명은 조래(赵来), 주덕(朱德)의 가명은 조덕(赵德), 팽덕회(彭德怀)의 가명은 조회(赵怀), 하룡(贺龙)의 가명은 조룡(赵龙), 섭검영(叶剑英)의 가명은 조영(赵英), 반한년(潘汉年)의 가명은 조년(赵年)등이다; 장개석(蒋介石)의 가명은 왕절(王浙), 이종인(李宗仁)의 가명은 왕계(王桂)이다; 소련인원의 가명은 조련(赵联)이었다.

서신의 주요내용은 "조천, 조래, 조고, 조동, 조덕, 조회등"이 "이의 동지"에게 18가지 구상을 제안한 것이고, 주로 서북을 열고, '조련'을 등에 업고 항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것이야말로 '조가인'의 진정한 내력이다. 그 진용은 엄청나게 강대하다, 거의 모든 제1대 중공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