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현야(玄野)
당대중국의 기이한 철학구조를 얘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중국 2천년제국의 전통이 어떻게 축적되어 왔는지를 명확히 검토해야 한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유가사회(儒家社会)라고 불려왔다. 이는 송나라이래 1천여년간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당대 학술계는 중국사회의 법가성분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 즉 진시황이래 정치분야에서 법가전통이 가장 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유행하는 견해가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국사회는 외유내법, 문유정법(文儒政法), 민유관법(民儒官法)이라고. 한나라이래 소위 왕도와 패도를 혼합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명확히 해야할 점이라면, 중국의 법과 서양의 법은 거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함무라비로부터 유스티니아누스까지 서방의 종교신앙과 일상경제생활은 모두 법률에 반영되어 있다. 르네상스이후, 정치철학은 다시 법률은 인성에 기반할 것을 요구하고, 인성을 반영하고 인성에 봉사하도록 하였다. 중국법률의 생성과정은 서방과 다르다. 왜냐하면 유가는 경천법조(敬天法祖)를 요구했고, 법가는 충군애국(忠君爱国)을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중국법률에서 주로 체현된 것은 법가사상이다. 법가의 목표는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국가의 법률은 그 목적이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같다. 그러나 사람과 인성은 어디로 갔는가? 법률은 인성을 체현해야 하는가? 당연히 중국사회는 일찌기 장기간의 휘황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성의 보호에 자연히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 점은 유교, 도교, 불교등 종교에서도 체현된다. 그래서, 중국고대의 법률에서 민법은 거의 공백이다. 민사분쟁은 전부 향신과 민정전통의 조정으로 해결되었다. 자사(子思)는 이런 말을 했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谓性,率性之谓道,修道之谓教)(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 본성이고, 본성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도라고 하고, 도를 닦고 널리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것을 교화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종교의 성격을 밝혔지만, 이런 것은 중국법률에 완전하게 구현되어 있지 않다. 종교의 법률에 대한 영향은 아주 크다. 다만 법률의 근원과 그 출발점은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법가가 보호하는 것은 제국의 이익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당연히 발생한다. 그리고 어느 세대에는 천의무봉이라는 느낌까지 받는다. 일정한 정도로 황제의 행위도 반드시 유교의 규범을 따라야 했다. 당연히, 일반적으로 비교적 성공한 제왕장상은 비교적 겸허했고, 종교는 사람을 위해 닦아놓은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비교적 광망한 제왕의 결말은 황당했다. 닦아놓은 길을 가지 않았고, 모든 종교예법이 그들의 눈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라고는 폭력밖에 없었다.
한비자(韩非子)는 후세인들에게 법가를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전국말기 한비자는 법가에 열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스승은 당시 유가의 으끔인 순황(荀况)이었고, 그가 가장 숭배하는 선현은 노자였다. 그래서 한비자의 사상중에는 많은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왜 마지막에 한비자는 법가가 되었을까? 기실 이 문제는 후세학자들이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 물음이다. 유가사상에서 한비자의 사상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속과정이다. 한비자의 논리와 이성은 뛰어났고, 중국역사상으로도 그에 비견할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 그 시대에 유가에서 법가로의 과정은 논리적인 필연성을 지닌 과정이다. 국가는 법률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응집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간단한 것은 병역문제이다. 그때 다른 나라들은 정형화된 방법이 없었다. 진나라는 국가이익에 기반하여 유효한 법률체계를 건립하였고, 이러한 국가이익에서 출발한 법률은 중국에서 법가를 실천하는 배경이 된다. 이는 법가가 정치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지위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정치와 사회의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법가적인 정치체제를 갖추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종교신앙과 인성보호는 법률의 층면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 중국의 상업과 민사관계는 완전히 유불도에 의존하여 조정되었다. 이는 바로 중국이 진나라이래 사용해온 외유내법, 문유정법, 혹은 민유관법을 의미한다. 중국의 상층인사는 왕왕 왕도와 패도를 섞어서 쓴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지중해문명은 지리환경이 복잡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요소로 인하여 각 지역이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리스문명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맺는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등 대제국은 그리스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는 충분한 지리적안전보장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는 그리스에서 충분히 가깝다. 그리하여 선진문명과 기술이 순조롭게 전래되어 들어올 수 있었다. 서방법률의 발생과정은 중국과 전혀 다르다. 히브리율법의 형성, 그리스법률의 형성,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서로마제국멸망후 도시국가법률이 형성되는 것은 중국에서 법가가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진행한 것과 전혀 다르다. 나는 이 점이 서방학자들이 극히 흥미를 가질 주제라고 본다. 어쨌든 과거 40년 구미자본가들이 중국에서 돈을 버는 과정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기분좋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중국을 거부할 수 있지만, 자본가들도 거절할 수 있을까? 클린턴이 대통령선거때 내건 그 명언을 보면 알 수 있다: "It's economy, stupid!"
법가의 성공은 그들이 유력한 정치체제구조를 체계적으로 건립할 수 있는 방법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는 단지 인성에 관심을 두었고, 인성이 충분하면, 강대한 국가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현실은 유가의 그런 생각은 그저 아름다운 꿈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화하문명이 그때까지 발전해 오면서, 천리와 인성에서 출발하여 법률을 만들겠다는 경향은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법가를 선택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진나라에서 법가를 숭상하여, 결국은 육국을 집어삼키고, 팔주를 다스리고, 서팔주이조동열(序八州而朝同列)할 수 있었는데, 그 역사배경이 주요원인인 것이다. 당시 국가의 체계는 아직 완비되지 않았다. 산동6국은 여전히 유가의 종교적인 사고와 묵가의 협객, 겸애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법가의 사상은 논리적으로 천도에 근거를 둘 수도 없고, 사대부계층이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한비자가 반박한 "유가는 글로서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력으로 법을 어긴다(儒以文乱法,侠以武犯禁)"는 것이다. 산동6국은 문화방면에서 발달했지만 정치방면의 개혁추진에는 걸림돌이 되었다. 진나라는 문화층면에서 낙후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야만적이었고, 그런 속박은 없었다. 그래서 변법과정이 비교적 순조로웠다. 이 변법은 국가의 법률이 더 이상 천도와 하늘을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도덕과 인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완전히 국가라는 정치체제의 이익만 고려하여 법률체계를 구축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인 진나라와 이것저것 따지면서 좌고우면하는 산동육국을 비교하면 당연히 진나라가 체제의 우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진나라법률의 근본목적은 국가기구를 위한 것이고, 민중의 생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도의는 법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화하를 통일한 이후, 한편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엘리트들은 폭진(暴秦)을 무너뜨리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명감을 갖게 했다. 이러한 두 층면으로 인하여 대량의 사사(死士)가 배출되고, 진나라의 멸망은 단순히 그렇게 진행된 것 정도가 아니라 천리에 정해진 일이 되었다. 그러한 붕괴가 발생한 포인트를 보면 바로 도덕과 법률의 괴리는 정권을 무너뜨리는 역량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택향(大泽乡)에서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도 큰 비로 기한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가만히 있어도 죽고, 들고 일어나도 죽는다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생각으로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들어 깃발을 만드니, 순식간에 천하가 대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날씨로 인한 문제를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게 만들었다. 이런 법률은 도의라는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이렇게 예측할 수 있다. 당시 이런 현상이 극히 보편적이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진나라의 멸망은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인의를 베풀지 않아서, 공수의 형세가 바뀌게 된 것이다(仁义不施而攻守之势异也)"; 그리고 세계문명의 비교층면에서 보자면 더욱 분명해진다. 원인은 바로 법률이 인성과 도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았고, 단지 국가이익만 고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법률의 최종적인 근거문제가 있다. 즉 법률이 최종적으로 소급하여 올라가는 근본적인 기초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마땅히 천리와 인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법률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동시에 사람의 천성상 자손의 행복을 기대한다. 그래서 동시에 반드시 미래 자손의 이익을 위해서도 봉사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논리대로, 국가가 강대해지면 백성이 이익을 받는다. 근대이래 정치학적으로 보면, 정치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국가가 강대해지면 그것은 백성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사례를 보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관중의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이익을 얻었을까? 철저히 아니었. 유방이 명을 받고 동관을 공격하여 점령할 때, 이런 명언을 남겼다. "관중의 어르신들 진나라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关中父老苦秦久矣)" 이론과 역사경험으로 보자면, 국가가 자원하여 백성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잡아먹힌다. 국가이익과 민중이익이 단절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중국법가와 당대법학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당대의 어떤 강호술사는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사례를 가지고 머리가 빈 정치인을 설득한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을 기망하는 힘이 강하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당대의 서방 몇개 국가는 각국의 정치체제가 이미 완비되어 있고, 또한 국가간의 상호협력방면에서도 이미 성숙되고 효율이 아주 높아져 있다는 것을. 오히려 강력한 진나라를 자처하는 국가에서는 엉망진창인 정치체제구조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비교적 간단한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국가주의라는 정치사상의 역사적 앞날을 예측해볼 수 있다. 즉 법률이 국가라는 정치현상을 매기로 하여, 그 안의 모든 개인에게 이익을 도모해줄 것인가? 즉 먼저 국가를 강대하게 만들고나서 국가의 매 개인이 이익을 얻도록 해야 하는가? 혹은 법률의 근본적인 봉사대상은 독립된 사람인가? 많은 중국동포들의 경우에 이는 아주 골치아픈 문제이다. 다만 당대의 선진세계에서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기실 하나의 국가가 강대하냐 아니냐는 법제체제가 강하여 본국의 백성들을 착취하고 외국의 이익을 빼앗아올 수 있느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체제가 국민의 정당한 권익을 잘 보호해주느냐, 최대한으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주느냐, 최대한으로 공정한 비지니스무역모델을 보장해주느냐에 있다. 그리고 가장 관건은 교육과 문화층면에서 국민이 가장 느슨한 환경 속에서 개개인의 잠재적 재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사회매커니즘이 실현된다면 나라가 강대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가 되면 너는 이 문제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국가를 매개로 하여, 혹은 도시 혹은 더 작은 단체를 매개로 하여, 그 구성원의 복리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전에는 합리성이 있었다. 그러나 2차례의 세계대전의 본질은 바로 국가라는 매개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 시대의 국가는 모두 자신의 이익최대회를 보호하는 것이 근본원칙이었다. 이런 역사배경하의 국가는 하나의 독립개체로서, 지적수준이 기실 사람을 밀림의 호랑이로 퇴화시키는 것이다. 두 호랑이가 서로 만나서 싸우면 양패구상(两败俱伤)이다. 구미각국의 인민들은 세계대전의 교훈을 얻어, 국가이익충돌을 고려할 때 더 이상 이전처럼 촌토필쟁(寸土必争), 촌초필득(寸草必得)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다지 고심막측한 지혜가 없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복리는 국가가 얼마나 방대하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관건은 오히려 국가의 건강상황이라는 것을. 국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체계가 방대할수록 회복되기 어렵게 된다. 최종적으로 붕괴로 내닫을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최근 백년의 사례는 이미 충분히 많다. 제국의 붕괴, 해체는 어떤 경우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갈라선 후에도 서로 연결되어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연맹으로 함께 뭉쳐지기도 한다. 전형적인 사례는 해가지지않는제국이다. 영국과 미국은 2백여년전에 미국의 독립전쟁때 서로 죽고 죽이면서 싸웠고, 원한이 깊었다. 수십년이후에는 이전의 원한을 잊고 지금 당금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되었다. 영연방의 여러 국가는 각자 독립하였고, 대영제국의 위풍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영국은 각국 인민들이 원하는 바대로 독립시켜주었고, 그래서 현재 영국과 이들 국가간에는 아주 강한 유대관계가 남아 있다. 반대로 소련을 보면 정반대의 사례이다. 제국이 붕괴된 후 유럽지역의 국가들은 거의 모두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다. 사회주의연맹국가인 동유럽과 중유럽국가도 일종의 적대상태이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이 여전히 그 방대한 국가기기가 그들에게 거대한 개인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기기는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히려 거대한 사회적 불공정만 가져다준다.
중국의 2천년간 제국시기에, 법률내에 유교사상이 치우치거나, 유교에 귀의하는 듯한 내용이 아주 많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부자상은(父子相隐)의 원칙이다. 이 원칙의 기원은 춘추시기의 직궁양양(直躬攘羊)논쟁이다. 논어의 기술은 이러하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무리에는 몸가짐이 올바른(直躬) 사람이 있는데, 그의 부친이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증했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무리에서 올바른 자는 다르다.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감춰주고, 아들이 잘못하면 아버지가 감춰주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이 오래된 논쟁의 가장 직접적인 촛점은 무실(务实)의 국가이익지상이냐, 아니면 무허(务虚)한 인성지상이냐에 있다. 인성은 하느님 혹은 천도가 부여한 것이고, 국가이익은 가장 분명한 물질가치에 소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쟁의 가장 심층적인 촛점은 네가 물질이익에 기초한 물질주의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인성의 최종창조자인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선택할 것이냐이다. 중국은 한나라이래로 법률에서 정부가 직계가족의 범죄를 증명,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잇에 직계가족이 범죄를 숨겨주는 행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정부가 만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계가족에 불리한 증언을 하게 강요하면 정부가 얻는 것은 잠시의 작은 이익이지만, 해치는 것은 인륜과 사회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서원경(徐元庆)이 조사온(赵师韫)을 죽인 사건이다. 당시 무측천이 집권하고 있을 때인데, 진자앙(陈子昂)은 그를 주살하고 정문(旌门)을 세워주자고 건의한다. 나중에 유종원(柳宗元)이 글을 써서 반박한다. 서원경은 인중호걸이고, 충효의 모범이다. 그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그의 명예와 절개있는 선비를 죽이는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보자면, 고대중국관청은 비록 법가를 중시하고, 농후한 국가주의색채를 띄고 있었지만, 인성에 대한 존중도 역시 농후했고, 어느 정도로 충분히 경외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전형적인 사례는 장커우커우(张扣扣) 사건이다. 정부가 어떻게 처리했는가? 기본적으로 혐의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위법을 저질렀다. 그래서 법에 의해 그에게 사형을 내렸다. 그러나 인륜문제와 사회구조문제는 더 이상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진자앙의 정문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법률과 인성간의 대립을 이룬다. 또한 정부와 민중의 대립을 이룬다.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유물주의에서는 경외가 없다. 정부는 스스로 자신이 모든 것을 주재할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거대한 무형의 역량을 경외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이런 정부에서 따르는 선악평가기준은 그저 정부와 국가에 이익이 되느냐로 따진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행위가 된다. 그래서 장커우커우가 형법에 위반하였으면 국가의 권위를 위태롭게 한 것이다. 그건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이다. 그리고 사회의 다른 한편에서 일부 사람들은 정부의 어떤 황당하기 그지없는 정책에 기하여 정부의 권위와 정부를 위해 일하는 관리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륜 심지어 천리를 무시하고 백성을 도륙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승진하고 돈을 번다. 명성과 이익을 모두 거두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런 사람은 국가의 권위를 보호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은 사회의 기반을 망쳐버린 것이다.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 군주를 위해 돈을 긁어모은 신하보다는 도둑질하는 신하가 낫다(有聚敛之臣,宁有盗臣). 공자의 뜻은 민중으로부터 재물을 착취하여 관청의 이익을 취하려는 관리는 정치체제의 가장 큰 해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중국에서 물질주의철학은 이미 강제적으로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의 머리에 주입되어 있고, 이런 문제는 단기간내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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