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주순수가 일본에서 학문을 가르친 곳
노신은 그의 <등야선생(藤野先生)>에서 일본의 중국인 주순수(朱舜水)를 언급하면서, 그를 "명나라의 유민(明的遗民)"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일본 이바라기현(茨城县, 역사상의 미토번(水户藩))에는 주순수의 동상이 있다. 일본에 망명한 중국인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큰 영향력을 지니고,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기념하고 있을까? 그것은 주순수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维新)의 씨를 뿌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순수의 원래 이름은 주지유(朱之瑜)로, 절강여요(浙江余姚)사람이고 명나라말기 5대학자중 한명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 스스로의 호를 '순수(舜水)'라 하였는데, 이는 고향의 강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숭정11년(1638년), 주순수는 문무가 모두 뛰어나서 예부에 추천된다. 그러나, 주순수는 세상의 도리가 무너지고, 정치가 어두워, 관료로 나아가더라도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보고 관직을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학문에 전념한다.
1644년, 청군이 입관하여 북경을 차지한다. 같은 해 5월 남경에서 홍광조(弘光朝)가 성립된다. 강남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홍광조는 많은 강남의 인재를 끌어들인다. 그 대상에는 주순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주순수는 여전히 관직을 받지 않는다. 1645년, 남경, 여요가 모두 함락되고, 강남은 생령이 도탄에 빠진다. 학문연구에 심취하고 있던 주순수도 점차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는 절강 동북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던 노왕감국(鲁王监国)에 참여한다. 그러나 노왕은 복건의 당왕(唐王)과 서로 정통이라고 싸우면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통일전선의 역량을 약화시켰다. 이때의 주순수는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의 병력을 빌렸던 옛이야기를 재연하고자 3차례에 걸쳐 안남(安南)을 가고, 4차례에 걸쳐 일본(日本)으로 가서 군대를 보내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이때 월남은 내란에 빠져 있어 북상할 여력이 없었고; 일본은 도쿠가와가(德川家)가 막 백년간의 전란을 끝낸 때였다. 그리하여 이제 떠오르는 해와같은 청나라와 맞서싸울 힘이 없었다. 주순수의 '병력을 빌리는' 모든 활동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1659년, 노왕감국은 북상하여 청나라군대에 반격하고, 3차례에 걸쳐 남경을 위협한다. 그러나 결국 서남의 손가망(孙可望), 복건의 정성공(郑成功)의 협력을 얻지 못해 실패로 끝난다. 주순수는 노왕감국의 반격전략에 시종 참여한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명나라의 관료들은 여전히 내부투쟁에 바빴고, 이는 주순수로 하여금 반청복명에 극도로 실망하게 만든다. 1659년의 전투에서 실패한 후, 주순수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머무르게 된다.
주순수는 유학(儒学), 실학(实学)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4차례에 걸쳐 일본에 간 적이 있어, 서부일본의 지방관리들과 모두 접촉한 바 있었다.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서일본의 통치계층, 유학계는 주순수의 명성과 학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깊이 존경했다.
이때의 일본은 쇄국령(锁国令)이 내려져 있어서, 중국, 조선,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长崎)로 와서 무역만 할 수 있었고, 본토에 남아서 머물 수 없었다. 이때 주순수가 일본으로 와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해 왔는데, 이는 일본으로서는 종전에 없던 일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대부분은 살기힘들어서 건너온 평민들이고, 중국의 사대부나 유학자가 일본으로 정치적망명을 신청한 것은 주순수가 최초였다. 일본의 나가사키에 있는 관리와 유학자들은 이 대유학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야나가와번(柳川藩)의 유학자 안도 세이안(安东守约)이 자신의 녹봉의 절반을 주순수에게 주면서 그가 일본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동시에 인맥을 이용하여 주순수의 학문에 관한 소문을 퍼트려 막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만든다. 결국 막부에서도 주순수가 일본에 거주하는 것을 특별히 허가하게 되고, 주순수는 영주권을 얻게 된다.
주순수는 왜 실학에 정통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역사의 장난이다. 주순수는 어렸을 때 고학에 정통하고, <시경>, <서경>에 뛰어났으며 청년시기에 여요사현(余姚四贤)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팔고문(八股)에 능하지 못했고, 40세가 될 때까지 과거시험에 연이어 낙방한다. 과거를 통과하지 못하면 제대로된 관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황제가 특별히 내린 관직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화가 난 나머지 체제문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그는 마침내 팔고문이 헛되고 폐해가 많다는 점과 정주이학(程朱理学)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찾아낸다. 대명이 숭상하던 송명의 이학에 대하여 주순수는 결국 완벽한 반박이론을 건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세치용(经世致用)을 구호로 내걸고, 탐구실학(探求实学)을 무기로 삼는데, 그 목적은 송명이학을 뒤집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의 사상계는 송명문화를 보배로 여기고 있었다. 중앙막부는 이학가 하야시씨(林氏)를 우두머리로 하는 유학체계를 건립했다. 다만 일본은 천년동안 중국을 배워왔고, 지방사회에는 이미 일본민족주의, 일본본토문화의 맹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벗어날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상적으로 중국이학을 전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여러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들 자체가 이학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찌 자신의 창으로 자신의 방패를 찌를 수 있겠는가? 일본은 그리하여 논리적인 악순환에 들어선다. 이학을 반박하면 할수록, 이햑을 이용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주순수가 근본적으로 이학을 뒤집어버리는 새로운 방법을 가져온다. 바로 '실학'이다.
중국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도쿠가와의 친족인 미토번이었다. 이때의 미토번은 아직 어삼가(御三家, 도쿠가와친 후손중 유력한 세 가족)가 아니었다.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한 어삼가는 키(纪州, 56만석), 오와(尾张, 62만석), 스루가(骏河, 55만석)의 세개 번이었다. 이 세 번의 번주는 장군후보이고, 정부관직상으로 모두 정3품 대납언(大纳言)이었다. 그러나 미토번은 키슈의 갈래로 규모는 28만석이었고, 관직은 그저 종삼품의 중납언(中纳言)이었다. 1634년 스루가번의 후사가 끊기면서, 미토번이 어삼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재정이 극도로 곤란하여, 미토번은 키슈, 오와리에 비견할 수 없었다.
미토번의 존재감을 제고시키기 위해, 당시의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圀)는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중국을 미친듯이 폄하하고, 일본이야말로 최고라고 떠벌리게 된다. 일본우민들이 가진 하늘의 자손이라는 심리에 영합한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중국학설을 깨부수는 것은 그가 가장 열중하는 일이었다. 근본목적은 근원에서 중국의 영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주순수에게 손을 내밀어, 주순수가 미토에 정착하도록 극력 요청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665년,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간곡한 요청으로 주순수는 에도의 미토번택으로 들어간다. 미쓰쿠니는 제자의 예로 그를 맞는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면서 지극한 예를 다한다. 미토번택에서의 만남으로 두 사람은 급속히 묵계를 달성한다. 미쓰쿠니는 주순수에게 급여를 주고 그가 일본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운다. 그리고 주순수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미쓰쿠니의 지위를 끌어롤린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인터넷의 인플루언서가 어느 기업을 끌어주고, 그 기업은 인플루언서에게 돈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화하거나 세속화할 수만은 없다. 미토번은 <순수선생문집(舜水先生文集)>을 편찬한 바 있는데, 거기에는 주순수가 미쓰쿠니에게 쓴 어떻게 하면 명군이 되는지에 대한 건의가 많이 담겨 있다. 그래서 미토번이 보기에 주순수와 미쓰쿠니 두 사람은 완전히 신충주현(臣忠主贤, 신하는 충성스럽고 주군은 현명하다)의 전형이다. 이때부터 주순수는 미토번의 고문이 되고 일본빈사(日本宾师)로 존칭된다.
주순수가 일본에 학문을 전파한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명청의 교체로 오히려 중화습속에 대한 반동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중국이 이미 중화에서 오랑캐로 바뀌었다(由夏变夷)고 주장하게 된다. 이를 화이변태(华夷变态)라 불린다. 일본은 주순수등이 한학을 전파하여 일본은 오랑캐에서 하로 바뀌었다(由夷变夏)고 주장하며 스스로 소중화(小中华)로 중화문명의 정통전인이라 자부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을 더 이상 우러러보거나 존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을 '번(藩 )'아러 창헌더, 미토번이 편찬한 <대일본사(大日本史)>에서는 중국을 '번부(藩部)'에 넣는다.
근대사회에 일본도 열강의 침략을 받아. 역시 쌍반사회(双半社会, 반식민지반봉건)로 전락한다. 다만 일본은 특수한 점이 있었다: 첫째, 일본은 영토가 좁고,인구도 적다. 그래서 사회가 빠르게 변혁할 수 있었다. 하나의 마을을 다스리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간단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일본은 급속히 서구화했지만, 중국은 어려웠는지를 말해준다. 둘째, 주순수가 일본에 실학을 전파했다. 일본은 미토실학의 전파로 막부에서 존왕척패(尊王斥霸)의 사조가 일어나고 최종적으로 막부타도운동으로 번진다. 일본의 미야자키 이치사다(宫崎市定)는 <중국사>에 이렇게 적는다: "만청은 이민족이다. 그래서 한족의 정통을 고의로 보호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계승성을 증명하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 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특히 송명이학을 공고히 하는데 주력했고, 결과적으로 송명이학, 팔고취사등 공리공담의 기풍이 중국에서 완강하게 남아 있게 된다." 이를 보면 주순수가 일본에 온 것은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일 주순수가 없었더라면, 막부를 무너뜨리는 메이지유신은 그렇게 순조롭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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