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진실한 조조(曹操)를 찾아서...

중은우시 2023. 6. 20. 16:32

글: 이자제(李子霽)

 

<삼국연의>는 명나라때 세상에 나타난 이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 안에는 지혜, 용맹, 충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와 풍류인물에 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설전군유(舌戰群儒)"에서 "칠금맹획(七擒孟獲)", "화소적벽(火燒赤壁)"에서 "화소연영(火燒連營)"까지,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에서 "주마천제갈(走馬薦諸葛)"까지, "맹덕헌보도(孟德獻寶刀)"에서 "자주논영웅(煮酒論英雄)"까지. 하나하나의 장면들은 1994년 TV드라마 <삼국연의>가 방영된 이래, 다시 한번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고, 중국인들에게 다시 "삼국"에 대한 미련(迷戀)을 환기시켰다. 이는 전체 중국문화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가 오늘날 함께 "삼국"을 이야기할 수 있고, 왕왕 떠올리게 되는 것은 <삼국연의>의 삼국이지, <삼국지>의 삼국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삼국인물에 대하여 평가할 때,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왕왕 <삼국연의>에 뿌리를 둔다. 그중 조조의 "간웅(奸雄)"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경국(京劇)에서 희극(戱劇)
까지 이 점을 계속하여 그리고 강화해왔다. 다만, 우리가 선입견을 버리고 역사를 다시 읽업면, 완전히 다른 조조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치세의 능신(治世之能臣)"이고 "난세의 영웅(亂世之英雄)"이다. 비록 그는 권신으로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지만, 그는 끝까지 황위를 찬탈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일찌감치 권위를 잃은 한황실의 황제를 힘껏 보살펴주었고, 한왕조의 존속기간을 연장시켜 주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조조 자신의 말에 따르면, "만일 천하에 조조가 없었더라면, 몇명이나 황제를 칭하고, 왕을 칭했을지 모를 일이다."

 

일찌감치 조조는 어려서 무명지배일때, 교현(橋玄)이 그의 비범한 재능과 덕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천하가 곧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운명에 정해진 인재가 아니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대이다."(<삼국지>)

 

1. <삼국연의>와 <삼국지>의 거리

 

<삼국연의>의 조조의 이미지먹칠에 관하여, 여기에서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만 가지고 얘기해보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소설 제4회에 나오는 '모동적맹덕헌도(謀董賊孟德獻刀)'(동탁을 노리기 위해 조맹덕이 칼을 바치다) 및 도망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조조는 오해로 인하여 그리고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여백사(呂伯奢)의 일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고 유명한 놀라운 말을 하게 된다: "내가 천하의 사람들을 배신할 수는 있어도, 천하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도록 놔두지는 않겠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 이는 그의 '간웅'이미지를 극히 생생하게 드러냈고, 이 말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낙인처럼 각인되어 버렸다. 통행본 <삼국연의>의 묘사는 이러하다:

 

"조조는 진궁과 앉아 있은지 오래되었는데, 돌연 저택의 뒤에서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가 말하기를 '여백사는 나의 가까운 친척이 아닌데, 이번에 간 것은 의심스럽다. 몰래 들어봐야겠다.'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초당으로 들어갔더니 사람이 하는 말이 들렸다: '붙잡아서 죽이는게 어떻겠는가?' 조조가 말했다: '그랬군. 이제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붙잡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진궁과 함께 칼을 뽑아 들어가서 남녀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한꺼번에 식구 8명을 죽였다. 주방을 수색해보니, 돼지 한 마리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진궁이 말하기를, '맹덕은 의심이 너무 많아서, 좋은 사람을 오해로 죽여버렸구나.' 그리고 급히 저택을 나와 말을 타고 떠났다. 그런데 2리를 가지 않아서 여백사가 나귀의 안장 앞에 술을 두병 달고, 손에는 과일과 야채를 들고 오다가 그들 둘을 보고는 '현질(賢侄)과 사군(使君)은 어찌 벌써 떠나는가?' 조조가 말하기를 '죄인으로 쫓기는 사람이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여백사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가족들에게 돼지 한 마리를 잡으라고 했으니, 현질,사군은 하루 밤 머물다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빨리 말을 돌리시게.'

 

조조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몰아 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돌연 검을 뽑아서 되돌아간다. 그리고 여백사에게 말한다: '저기 오는 사람이 누구지요?' 여백사가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자, 조조는 검을 휘둘러 여백사를 베어 나귀에서 떨어뜨린다. 진궁은 대경실색하여 말하기를, '지난번은 오해로 죽였지만, 지금은 왜 그런 것인가?' 조조가 말하기를 '백사가 집에 도착해서 여러 명이 죽은 것을 보면 어찌 그냥 있겠는가. 만일 무리를 모아 추격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될 것이네.' 진궁이 말하기를, '알면서도 고의로 죽이는 것은 불의한 것이 아닌가!'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내가 천하의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있더라도, 천하인들이 나를 배신하도록 놔두지는 않겠다' 진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관중은 여기에서 조조의 의심많고, 악독하고, 살인을 서슴지않는 성격을 잘 표현했다. 다만 정사를 보면, 조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위지.무제기>의 관련 단락은 이러하다:

 

"동탁은 보고를 올려 태조(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에 앉히고, 그와 함께 대사를 논의하고자 한다. 그러자, 태조는 성명을 바꾸고 샛길로 달려 동쪽으로 돌아온다. 관(關)을 나서고 중모(中牟)를 지났다. 정장(亭長)이 의심이 많아, 붙잡아 현에 가두어둔다. 읍안에 조조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잘 말해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동탁은 마침내 태후와 홍농왕을 죽인다. 태조는 진류에 이르러, 집안재산을 모두 나눠주고, 의병을 모아서, 동탁을 주살하고자 한다." 

 

189년, 한영제가 붕어한다. 당시 태자이던 유변(劉辯)이 즉위하고, 그의 모친 하황후(何皇后)는 태후(太后)로 승격되고, 임조칭제한다. 유변의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何進)이 실권을 장악한다. 당시 경성에 있던 원소와 함께 모든 환관을 주살하여, 일거에 동한에서 오래된 환관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진은 멀리 서량에 있고,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넌 동탁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이를 가지고 태후를 협박한다. 누가 알았으랴. 동탁이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의 계획은 들통이 나서, 환관들에게 살해당한다. 그후 원소, 원술등이 병력을 이끌고 환관 십상시를 주살한다. 같은 해 구월, 동탁이 입경한 후, 황제가 유약한 것을 보자 머리를 굴려, 정원(丁原)을 주살하고, 원소를 멀리 쫓아보내며, 소제를 폐위시키고 홍농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의 동생 유협(劉協)을 황제에 앉히니 바로 한헌제(漢獻帝)이다. 이때부터 동탁이 조정을 장악했으며, 경성은 대혼란에 빠진다.

 

동탁은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람을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그는 조조를 높이 평가하여, 주청을 올려 조조를 효기도위에 앉게 해준다. 그와 대사를 함께 도모하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의 사람됨을 미워해,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르다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동탁의 요청을 거절하고, 이름을 바꾼 후, 동쪽의 고향쪽으로 도망쳤다.

 

거절당한 동탁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반드시 조조를 붙잡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조조가 중모현 경내에 들어갔을 때, 한 정장이 그의 신분을 의심해서 붙잡아서 현의 관아에 잠시 가두어둔다. 다행히 조조를 아는 사람이 있어, 그가 조조를 위해 잘 말해주는 바람에 조조는 석방될 수 있었다. 조조가 진류로 돌아온 후, 가산을 나누어주고, 향용을 모집하고, 각로의 의군을 모은다. 소제를 폐하고 태후를 죽인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한 것이다.

 

우리가 <삼국지>의 정문을 보면, 조조가 도망갈 때, 여백사는 아예 나타난 적이 없고, 더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이삳. 그리고 짧은 서술 속에서 우리는 이미 조조의 마음은 계속 한황실을 향해 있고, 난신을 멸시하며, 도덕감과 집행력이 강한 인격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조조라면 자연히 '웅(雄)'이라 칭할 수는 있지만, '간(奸)'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현덕(賢德)한 조조가 어찌 나중에 <삼국연의>에서는 악독한 인물로 바뀌게 된 것일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 <삼국지>에서 <삼국지주(三國誌注)>까지

 

소위 <삼국지>는 삼국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에 의해 촉한에서 불려가 낙양에서 저작랑(著作郞)을 지낸 진수(陳壽)가 위,오,양국의 원래부터 있던 사서를 기초로(촉한은 사관을 두지 않아서, 사서가 없었다), 당시에 볼 수 있는 다른 사료들을 참고하여 각각 <위지>30권, <촉지>15권, <오지>20권, <서록>1권을 편찬한다. 이를 북송시기에 하나로 합쳐서 <삼국지>라고 불렀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조가 죽은지 13년후에 태어났다. 연대가 비교적 가까워, 역대이래로 사가들이 그 진실성을 비교적 높이 평가한다. 배송지(裴松之, 삼국지에 주석을 붙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진수의 <삼국지>는 전서가관(銓敘可觀), 사다심정(事多審正)"(인물평가를 제대로 했고, 사건은 심의하여 바로잡은 경우가 많았다)이라고 했고, 왕명성(王鳴盛)의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 권39에는 "진수의 역사기록은 모두 실록이다"라고 했다. 정사에서 평가가 가장 높은 "전사사(前四史)"중의 하나가 된다. 비록 진나라황실에 대하여 분식, 곡필한 점이 있고, 개인적인 은원으로 제갈량 및 그 아들에 대한 폄훼, 전공미기재등의 방면에서는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당나라 방현령의 <진서.진수전>과 당나라 유지기의 <사통.직서>, 청나라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사사고이>권15등), 다른 방면에서 <삼국지>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다.

 

동한이래 경학과 사학이 간약(簡約)을 숭상하던 기풍의 영향으로,  진수의 <삼국지>의 비교적 큰 특징은 바로 서술이 간략하다는 것이다. 사실기록에서 엄격했던 진수는 수집한 모든 자료를 보고 만일 의심이 있으면 병존시키지 않고, 차라리 쓰지 않았다. 위, 촉, 오 삼서간의 내용에서 중복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남조의 송문제는 <삼국지>가 너무 간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때 빠트린 부분이 많았다고 여겨서, 배송지에게 명하여 주석을 달게 한다. 배송지는 그리하여 광범위하게 각종 자료를 수집한다.

 

배송지에 따르면, 삼국시기 각국의 정권과 사가는 서로 다른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연대가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찾아볼 수 있는 자료들은 서로간의 기술에서 차이가 많았고, 서로 모순되었다. 어떤 경우는 같은 사건을 두고 각자의 견해가 달랐다. 어떤 경우는 각 사료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 어느 것이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점들에 직면하여 '무재주실(務在周悉)'의 입장에 서서 배송지는 찾아볼 수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서 집어넣는다. 그러므로, 배송지의 <삼국지주>는 여러 가지 전해지지 않는 진귀한 사료들을 담고 있다.

 

그중 조조가 동탁에게 추적당하던 이야기에도 여러가지 다른 판본이 있다.

 

3. 사가와 소설가에 의한 이미지먹칠

 

배송지의 <삼국지주>에서 조조가 동탁의 부름에 대하여, '성명을 고치고, 샛길로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부분의 정문 아래에 3개의 사적의 관련기술을 주석으로 적고 있다. 이 3개의 사서는 3가지 이야기버전을 보여준다.

 

첫째는 조위(曹魏) 왕심(王沈)의 <위서(魏書)>이다:

 

"태조는 동탁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모시지 않고 도망쳐서 고향으로 온다. 몇 기를 데리고 아는 사람인 성고(成皐)의 여백사의 집을 지나게 된다. 여백사는 집에 없었다. 그의 아들과 손님이 태조의 물건을 강탈하여, 말과 물건을 가져간다. 태조는 맨손으로 몇 명을 격살했다." 

 

둘째는 서진의 곽반(郭頒)의 <위진세어(魏晋世語)>이다.

 

"태조가 여백사의 집을 지나는데, 백사는 출타중이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손님의 대접을 잘 했다. 태조는 자신이 동탁의 명을 어기고 수배중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이 자신을 노릴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한밤중에 칼로 8명응ㄹ 모두 죽이고 떠났다."

 

셋째는 동진의 손성(孫盛)의 <잡기(雜記)>이다.

 

"태조는 식기(食器)소리가 들리자,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여기고, 밤을 틈타 그들을 죽인다. 그리고 처량해하며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배신할지언정, 다른 사람이 나를 배신하게 놔두지는 않겠다(寧我負人, 毋人負我)" 그리고 떠났다."

 

이상의 세 가지 사료를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다. 조조가 도망간 이야기는 사료에서 기술된 연대가 뒤로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오히려 풍부해진다. 그리고 '살인사건'의 색채가 갈수록 짙어지고, 스토리도 더더욱 막장이 되어버린다. <위서>는 조조가 여백사의 아들과 손님의 강탈에 반항하는 과정에서 몇 사람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이건 정당방위이다. 그러나 <세어>에 이르러서는 조조가 단순히 여백사집안의 다섯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8명이나 죽였다는 것이다. 다만 여백사는 죽이지 않았다. 다시 그 이후인 <잡기>에 이르러서는 조조의 심리를 더욱 깊숙히 파고들어 그가 살인을 저지른 후에 내심은 고통스러웠지만,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다른 사람을 배신할지언정, 다른 사람이 나를 배신하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말을 남긴다. 

 

기실, 상식으로 추단해보면, 일반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기에 사건의 원모습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3개의 사서의 완성시간이 각각 다른데, 표현된 내용은 시기가 뒤로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조조가 무슨 짓을 했는지와 그의 심리상태가 어떠했는지까지 묘사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상식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리적으로 이렇게 추단할 수 있다: <위진세어>와 <잡기>의 묘사는 어느 정도 사가들이 서로 다른 목적에 의하여 양념을 넣은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조조가 한 유명한 명언인 "내가 천하의 사람들을 배신할 수는 있어도, 천하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도록 놔두지는 않겠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는 바로 <잡기>의 "내가 다른 사람을 배신할지언정, 다른 사람이 나를 배신하게 놔두지는 않겠다(寧我負人, 毋人負我)"에 바탕을 두고 허구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을. <잡기>에서는 개별적으로 '여백사일가'를 지칭했는데, <삼국연의>에서는 '천하의 모든 사람'으로 확장되어 버렸다. 이는 조조가 한밤중에 살인하고 도망가면서 어쩔 수 없이 한 말인데, 이를 조조의 처세에서의 일관된 '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를 표현한 말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나관중은 '이미 사서에서 양념이 쳐진 조조'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욱 철저하게 개조하여,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인 잔인무도하고, 음험악독한 난세의 간웅으로 그려버렸다.

 

결론: 진실한 조조를 찾아서

 

삼국의 입장에서,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존류억조(尊劉抑曹)'의 태도를 취했다. 책에서 많은 허구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조조의 이미지를 고의로 먹칠하고, 훼손하고, 오명을 뒤집어 씌웠다. 유비진영에 대하여는 최대한 칭송하고 미화했다. 청나라 강희연간에 모종강(毛宗崗) 부자는 <삼국연의>에 대한 평에서 조조의 간사, 허위, 음험한 인상을 더욱 뼛속까지 심어버렸다. 이와 동시에 조조는 경극에서도 '백검(白臉)" 간신이다. 관중은 왕왕 별생각없이 조조를 보면 '나쁜 놈'이라고 여기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역사인물을 평가하는데, 어찌 그렇게 단순하게 할 수 있겠는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조조의 일생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내렸으며, 평가는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태조는 책략과 지모를 내어 천하를 편달했다.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취하고, 한신과 백기의 기책을 갖추었고, 관직을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기용했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하게 처리하여 옛날의 허물은 고려하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를 총람하고 홍업을 이루어내니 그의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히 비상지인(非常之人)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할 수 있다."

 

천고영주인 당태종 이세민도 조조를 높이 평가했고,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이 <제위태조문>에서는 당태종이 조조를 난세를 안정시킨 '철인(哲人)' '현보(賢輔)'라고 칭하면서 그를 찬미했다: “위무제(조조)의 웅재무략의 자질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동량의 임무를 맡았음에도 나라를 바로잡는 공로가 이전시대의 사람들보다 넘어섰다"(帝以雄武之姿, 當艱難之運, 棟梁之任, 同乎曩時, 匡正之功, 異於往代)

 

역사상의 조조는 태평성대에는 황제을 잘 받들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능신이면서, 난세에는 풍운을 휘어잡는 영웅이다. <삼국연의>는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갔지만, 거기에서 우리가 빠트린 것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어떤 것은 덧칠을 한 것이 있지 않을까? 역사의 안개를 거두어 진실한 조조를 찾아보면 아마도 우리는 그 속에서 진짜모습이 계속하여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