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예전에 <삼국연의>를 읽으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무장들간의 전투장면이다. "누가 감히 나와 삼백회합을 겨뤄보겠느나?"라는 말은 그때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동시에 소설에서 장수들끼리의 일대일 싸움으로 승패를 결정짓던 방식은 필자의 고대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되어버렸다.
자라면서, 자연히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수의 용맹이 비록 쓸모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작용을 하지는 못한다. 명장들 예를 들어 한신(韓信),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같은 사람들은 개세적인 무공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소설에 나오는 진을 친 다음 진앞에서 무장들이 싸우던 것이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기를 고무시키는 각도에서 보자면 그 역사적 원형은 선진(先秦)시기의 "치사(致師)"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치사"의 기원은 지금으로서 고증되지 않는다. 다만 상(商), 주(周)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례.하관>에는 "환인(環人)"이라는 직위가 있는데, 업무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장치사(掌致師, 치사를 관장함)"이다.
그렇다면, "치사"란 무엇일까? 동한때 정현(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이러하다: "치사라는 것은 반드시 싸워서 이기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고대에 장수는 전쟁을 할 때 먼저 용맹하고 힘있는 자로 하여금 적진을 범하게 했다." 이런 이해에 근거하면, 치사는 사기를 고무시키는 것이고, 반드시 싸워서 이기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수단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가? <좌전.선공12년>의 "필지전(邲之戰)"에는 이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묘사가 실려 있다.
기원전597년, 중원을 쟁패하기 위하여, 초(楚)나라는 북상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한다. 그러자, 진(晋)나라가 정나라를 도와주기 위하여 지원을 온다. 진과 초간의 전투가 일촉즉발이 된다. 그러나, 쌍방 모두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서로 의화(議和)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약속한 맹약을 맺기 전에, 초나라가 먼저 약간의 움직임을 보인다. 단승전차(單乘戰車)를 내보내 진나라군대에 치사(致師, 도전)한 것이다.
상(商)나라때부터 춘추(春秋)시대에 이르기까지, 차전(車戰)은 주요한 전투방식이었다. 타는 것은 이때 군대조직의 기본단위이다. 전차위에 올라타는 3명의 갑사, 그리고 차의 뒤를 따르는 일정한 수량의 보졸. 그리고 상응한 물자조달인원. 차에 타는 3명의 갑사는 왼쪽에 타는 거좌(車左)가 우두머리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맡았다. 거우(車右)는 과(戈), 모(矛)같은 장병기를 써서, 근접전을 벌이고, 전차를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한다. 가운데 타는 사람은 전차를 모든 어자(御者)이다.
전쟁이 발생하면, 전차는 적군의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고, 보졸들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적을 해치운다. 다만, "치사"를 할 때는 전차에 타는 3명만 나서고 보졸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정식교전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 목적은 적을 죽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용맹함을 과시하고, 사기를 북돋우는데 있기 때문이다.
"필지전"에서 치사에 참가한 세 사람은 각각 거좌 악백(樂伯), 거우 섭숙(攝叔), 그리고 어자 허백(許伯)이었다. 치사를 시작하기 전에 세 사람은 어떻게 치사할 것인지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허백: 듣기로 단거도전을 하는 경우 전차를 모는 사람이 빠르게 몰아 깃발을 기울여 적의 진영에 가까이 접근했다가 돌아온다고 한다.
악백: 듣기로 단거도전을 하는 경우, 거좌는 날카로운 화살로 적을 쏘고, 어자를 대신하여 말고삐를 잡아, 어자가 전차에서 내려 마필을 정리하고, 말의 목에 있는 가죽띠를 정리한다음 되돌아온다고 한다.
섭숙: 듣기로 단거도전을 하는 경우, 거우는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적의 왼쪽귀를 베고, 포로를 잡은 다음 되돌아온다고 한다.
세 사람은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각자의 치사목표를 설정했다. 이를 보면 치사에 대하여 비교적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자는 반드시 마차를 빠르게 몰기 위해서, 전차에 꽂은 깃발을 기울이고, 거좌는 적을 향해 활을 쏘고, 적진영에 도착한 후에는 어자를 대신하여 말고삐를 쥐며, 어자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마필을 정리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우의 용사는 신속히 적진영으로 뛰어들어, 적군을 죽이고 왼쪽귀를 베거나 혹은 포로를 붙잡는다. 이렇게 임무를 완성한 후에 세 명은 신속히 전차를 몰아 되돌아온다.
이를 보면, "치사"는 매우 위험한 거동이다. 왜냐하면 적진영에 깊숙히 들어가야할 뿐아니라, 안전하게 물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징적인 승리결과 - 적의 왼쪽귀 혹은 살아있는 포로를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공할 확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다. 다만 일단 치사에 성공하게 되면, 적군의 사기에 비교적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리하여 이후 전개되는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필지전"에서 초국의 허백등 3명은 단거치사에 성공을 거둔다. 이는 당연히 진나라병사들을 격분시켰고, 그들도 치사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진나라의 치사행동은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한쪽은 성공하고, 한쪽은 실패하다보니, 진나라군대의 사기가 떨어졌을 뿐아니라, 장수들간의 갈등도 격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진나라군대가 분열하고 있을 때, 초나라가 틈을 노려 쳐들어가니, 적은 댓가를 치르고서 전쟁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초나라는 이 전투를 통하여 진나라를 대체하여 '패주'의 지위에 오르는 초석을 놓게 된다.
그러나, 치사의 행위는 전국시대이후 역사무대에서 점점 사라진다. 동한시기에 이르러 대학자 정현은 이미 치사라는 두 글자에 대하여 주석을 달아야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건 무엇때문일까?
원인을 따져보면 전쟁형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 전쟁의 규모는 보통 크지 않았다. 진, 초같은 대국간의 쟁패인 성복지전(城濮之戰)을 예로 들면, 진나라에서 출동한 병력은 5만여명이고, 이것은 춘추시기에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전쟁의 형식도 비교적 단일했다. 진지전을 위주로 하고, 병력을 포진하는 것도 아주 간단했다. 그외에 전쟁의 지속기간도 비교적 짧았다. 일단 교전이 이루어지면 보통 그날 중으로 끝난다.
이런 특징때문에,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심리상태는 전투에서의 승부에 큰 작용을 하게 된다. 조궤논전(曹劌論戰)에서 얘기한 것이 바로 이 이치이다.
기원전684년, 제(齊)나라와 노(魯)나라간에 장작지전(長勺之戰)이 발생한다. 처음에 제나라군대는 두번 북을 두드리며 공격했다. 노나라군대는 조궤의 요구에 따라 방어만 하고 출전하지 않았다. 제군은 노군이 겁을 먹고 감히 싸우러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세번째로 북을 두드리며 공격했다. 이번에 조궤는 적과 싸울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노장공에게 북을 치며 맞이하러 나가도록 했다. 과연 일거에 제나라군대를 물리친다.
전투가 끝난 후, 조궤는 승리의 경험을 이렇게 정리했다. 승패의 관건은 쌍방의 사기가 강한지 약한지의 변화에 따른다. "무릇 전투라는 것은 용기이다. 한번 북을 치면 사기가 오르고, 두번 치면 처음만 못하고, 세번이 되면 사기가 고갈된다. 적은 피로하고 아군은 사기가 가득하니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이전에 말한 것처럼 치자의 목적은 바로 사기를 끌어올리고, 상대방에 타격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사는 이 시기의 전쟁형태와 부합한다.
그러나, 전국시대이후에는 전쟁의 규모가 걸핏하면 수십만이다. 통상적으로 의산방수(依山傍水, 뒤에 산을 등지고 옆에 강이 있는)의 복잡한 지형에서 전투가 전개된다. 그래서 갈수록 병력포진과 전술기교가 중시된다. 전쟁의 시간도 지구전으로 바뀌어 간다.
이런 상황하에서, 전쟁의 승부는 교전쌍방의 국력의 강약과 총사령관의 지휘능력의 우열에 달리게 된다. 나아가 군사의 직업화 및 명장의 탄생이 나타난다. 이외 비교하여, 전쟁에 임하는 사기가 승부에 미치는 영향도 지속적으로 떨어진다. 애병필승(哀兵必勝)이라든지 정의지사(正義之師)라든지 하는 춘추이전에 강조하던 전쟁영향요소는 점차 2선으로 밀려나거나 대국과 관련이 없게 된다.
확실히 치사가 사기를 고무시키는 작용은 이미 그 존재필요성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사정거리가 훨씬 길어진 노(弩)가 전쟁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면서, 치사는 불가능하게 된다. 치사자는 통상적으로 그저 아무런 의미없이 희생만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치사가 사라지는 것은 대세의 추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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