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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타임슬립(Time Slip)일까: 1,500년의 시간차를 둔 '상승군'

by 중은우시 2022. 4. 20.

작자: 미상

 

비수지전

 

기원전383년, 동진(東晋)의 8만병사는 전진(前秦)의 100만대군과 맞서 싸운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승을 거둔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비수지전(淝水之戰)"이다. 중국역사상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맞서싸운 대표적인 전투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이항(李亢)의 <독이지(獨異誌)>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비수지전이 발생하기 전날 동진의 유뢰지(劉牢之)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전진의 양성(梁成)이 지휘하는 5만의 군대와 낙간하(洛澗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다. 유뢰지는 중과부적으로 적의 상대가 되기 힘들다고 여겨 신속히 동진조정에 지원병을 요청한다. 조정에서는 왕봉(王蓬)에게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가 낙간하에서 유뢰지를 지원하게 한다.

 

그런데, 왕봉이 군대를 이끌고 낙간하에서 50리가량 떨어진 산 속에 이르렀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왕봉은 전진군대의 야습을 우려하여 먼저 그곳에 숙영하기로 결정한다.

 

병사들이 숙영준비를 하고 있을 때, 돌연 척후병이 왕봉에게 급히 달려와 보고한다. 전방에 한 무리의 부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왕봉은 유뢰지가 보낸 구원서신은 거의 절망적인 내용이어서, 왕봉은 마음 속으로 혹시 유뢰지가 이미 패배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급히 병사들을 산중에 매복하도록 지시한다. 달빛에 의지하여 모호하게 보이는 상대방은 다행히 동진의 병사들이 아니었다(패배해서 도망친). 그러자 왕봉은 다시 긴장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분명 전진의 군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왕봉은 마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심을 굳힌다. 상대방은 겨우 200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직접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동진장군 왕봉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 200명의 신분이 불분명한 병사들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동진사병이 그때 사용하는 원거리무기는 궁전(弓箭)이다. 화살을 한꺼번에 쏘자, 이 200명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독유기>의 기재에 따르면, "구다중전(寇多中箭), 복어마하(㒒於馬下)" (적군은 많이 화살에 맞아 말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왕봉은 좋아할 수 없었다. 이 200명이 즉시 반격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격수단은 왕봉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원문기재는 다음과 같다:

 

"유기명향(有器鳴響), 화염출(火焰出), 성진어야(聲震於野). 봉군유중화염자(蓬軍有中火焰者), 수복지(遂㒒地), 혈류부지(血流不止)"

어떤 기계가 소리를 내면서 화염이 나왔고, 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왕봉의 군사중에 화염에 맞은 자가 있는데, 땅에 쓰러지고 피가 흘러내리며 그치질 않았다.

 

즉, 이 군대의 무기는 화염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고대인들이 보기에 화염을 발사한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바로 화총(火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겨우 200명일 뿐이다. 그리하여 금방, 왕봉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포로로 잡는다. 그런데 더욱 기괴한 일이 발생한다.

 

이들 병사들은 머리카락이 노랗고(黃髮), 메부리코이고(鷹鼻), 눈은 깊었다(陷目), 생긴모습이 갈인(羯人)같았다(갈인은 오호십육국시대의 백인종이다.) 찢겨진 깃발에는 "상승군(常勝軍)"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봉은 기이하게 여겼다. 그는 당시 주위의 모든 국가를 떠올렸지만, 이런 기괴한 군대를 가진 나라는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뢰지가 구해주기를 급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왕봉은 더 이상 생각지 않고, 이들 포로들을 죽여버리고 신속히 증원을 간다.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은 낙간하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들은 3일이나 지나 있었다. 

 

유뢰지는 이미 전투를 마쳤고, 다행히 유뢰지가 승리를 거두었다. 왕봉은 다시 급히 군대를 이끌고 유뢰지를 따랐고, 결국 비수지전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비수지전의 승리로 아무도 왕봉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봉이 이 기괴한 부대를 만난 일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서양군대

 

동진군대가 만난 기괴한 군대는 과연 누구였을까?

 

1,500년이 지난 후, 괴이한 조우전이 벌어진다. 1864년, 청나라정부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조정은 유약했고, 태평천국이 굴기한다. 후안무치한 청정부는 다시 영국군과 결탁하여 함께 태평천국을 진압하려 한다.

고든

 

이 과정에서, 한 서양군대가 참전하는데, 영국 육군소장 고든(戈登, 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이 지휘했고, 전적이 휘황하여 "상승군"이라는 명칭을 하사한다. 

 

그러나, "상승군"도 패배할 때가 있다. 1864년 3월, 상승군은 태평천국의 왕해양(汪海洋)에게 격패당한다. 1,000여명으로 구성된 상승군은 겨우 200여명만 남아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이 200여명의 영국군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야간행군으로 안휘성 정원현(定遠縣)을 지날 때 돌연 습격을 받아, 200여명중 겨우 고든만이 살아남는다.

 

그런데, 기괴한 일은 그 어느 군대도 자신들이 상승군을 이겼다고 나서지 않은 것이다. 고든 본인도 도대체 누가 공격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일은 <천평전기(天平戰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864년 3월, 상승군이 강음(江陰) 화서(華墅)에서 태평천국의 강왕(康王) 왕해양에게 격패당한다. 800여명이 전사한다. 고든은 남은 200여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강을 따라 퇴각하다가 합비(合肥)까지 간다. 야간에 행군하여 안휘성 정원현 노교진(爐橋鎭)에 이르렀을 때, 다시 습격을 당한다. 상승군은 여기에서 섬멸되고, 겨우 고든 1명만 도망쳐나올 수 있었다." 고든은 나중에 소주(蘇州)로 가서 다시 신병을 모집하여 '상승군'을 조직한다. 그리고 그해 5월 청나라정부군과 힘을 합쳐 상주(常州)를 함락시킨다. 같은 해 11월 고든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수단총독으로 간다. 1885년 1월, 고든은 수단의 반군에게 카르툼에서 피살된다. 

 

당시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겼지만, 그러나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청나라말기에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각지에는 각양각색의 군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든의 부대는 겨우 200명이었으니, 누군가에게 공격당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고든의 200여명이 섬멸된 안휘성 정원현은 동진시기의 낙간과 50리 떨어진 곳이다. 여기에 <습유기>에 기록된 왕봉의 전투내용과 결합해보면 불가사의하게도 맞아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두 군대가 1,500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싸웠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