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대야(李大爺)
나는 "아편전쟁"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그것은 중국인이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오도하는 경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문을 열어제치고 서풍동점(西風東漸)을 가져온 획기적인 이 사건은 기실 본질적으로 무역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문명간의 충돌이고, 아편과의 관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편"을 가지고 이 전쟁을 정의하는 것은 극히 부정확하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책을 이어받아 폐관쇄국정책을 유지한다. 1684년에 이르러, 해금(海禁)을 개방하고, 정점통상(定點通商, 정해진 장소에서 통상을 진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여기에서 봉행된 것은 불평등무역이었다. 중국의 차, 자기, 비단은 너희들이 얼마든지 사가도 좋다. 다만 너는 중국시장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팔 수가 없다. 이것은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일방적무역" 혹은 "무역장벽"이다.
청나라는 해외무역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관의 관세율도 아주 낮았다. 개략 4%였다. 다만 세수체제가 불투명하고, 관료들의 부패와 탐욕으로 마음대로 징수하다보니, 서양인들이 장사를 할 때 실제로 납부하는 세율은 20%가 넘었다. 중국의 최대무역국이었던 영국만 보더라도 건륭연간의 10년간(1781-1790), 중국에 유입된 백은이 1,640만냥에 달한다. 가경연간의 10년간(1800-1810)에는 2,600만냥이었다. 1830년대초에는 최고조에 달하여 무역적자가 300만백은이 넘어갔다.
당시 영국인을 포함한 대다수의 서방국가는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은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황금을 백은으로 바꾸어 다시 중국과 장사를 해야 했다.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이 없는, 이런 장사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건륭제때부터 즉 1757년, 청나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대거 역행하는 조치를 취한다. 원래의 "사구통상(四口通商)"에서 단지 광주(廣州) 한개의 구안(口岸)만 개방한다. 그리고 그것도 제한무역이었다. 오직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과만 서양물건에 대한 매매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중간상이 차액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무역원가가 크게 올라가게된다. 동시에 서양인들을 막기 위한 <계사관속이인조례(稽査管束夷人條例)>, <방범외이규조(防範外夷規條)>를 제정하여, 서양인들은 마음대로 다른 중국인들과 접촉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중국에서 거주하거나, 여행하거나 할 수 없으며, 오직 획정된 범위내에서의 활동만 가능했다.
이렇게 가혹한 조건하에서, 영국인들은 절름발이신세로 장사를 해야 했다.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공업제품은 중국의 내지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다. 당시의 무역틀 안에서, 근본적으로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청나라는 스스로를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고 여겼다. 해외의 오랑캐를 하대하고, 평등외교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래서 건륭제때 여러번 영국에 제출한 쌍방무역을 개방하자는 요청을 거절했던 것이다. 심지어 동인도회사의 협상대표를 3년간 감옥에 가두어두기도 했었다. 다만 그렇지만, 중국과 영국 양국은 기실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그후 아편무역에서 상황을 반전시킬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해야할 것은, 그 시대에는 마약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아편무역은 처음에는 오늘날의 담배매매와 마찬가지로, 전세계에서 모두 합법적이었다. 영국인들은 해외에서 구매하여 자기 국가에서도 판매했다. 186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국은 <먀약약국법안>이 나와 본토의 아편거래를 일반적으로 제한한다. 그리고 1914년에 이르러 완전히 아편을 금지한다.
중국은 명나라때부터 아편을 수입하여, 약재로 사용했다. 만력연간부터 아편과 담배를 섞어서 흡입한 기록이 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한계층사이에 유행하게 된다. 아편에 대한 수요는 수입을 증가시켰고, 또한 사천, 운남, 복건, 절강, 광동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앵속을 재배하게 된다. 1729년, 옹정제는 금연령을 내린다. 다만 금지된 것은 담배와 아편의 혼합제품이었다. 즉 우리가 속칭으로 부르는 "아편연(鴉片煙)"이다. 아편 자체는 아니었다. 아편수입은 여전히 약재항목으로 허용되었다.
수요가 있으면 거래가 있는 법이다. 아편흡입은 가경연간에 전국민에게 유행한다. 영국인은 우수한 품질의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자 영국수입아편은 금방 중국 국내의 아편시장을 휩쓸게 된다. 국산의 열악한 토연(土煙)은 순도가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양연(洋煙)과 비교하여 전혀 경쟁력이 없었다. 무역흑자는 금방 무역적자로 바뀐다. 그러다보니 중국의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된다. 그리하여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청나라는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1838년에 <흠정엄금아편연조례>를 제정하고, 아편무역을 위법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임칙서를 파견하여 서양상인의 아편을 압수하도록 하고, 상행을 포위하여 영국상인을 체포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이 알고 있는 "호문소연(虎門銷煙)"이다. 임칙서는 금연뿐아니라, 일체의 대외무역을 금지했고, 영국상인은 일률적으로 모조리 축출했다.
이 금연의 민족영웅은 나중에 태도를 180도 바꾼다. 특별히 다른 사람들에게 아편을 심어 부자가 되라는 얘기를 한다. 이건 이전의 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아편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서양인의 아편이 대청의 백은을 모조리 쓸어가는 것을 미워한 것이다.
그 뒤의 역사는 우리가 대체로 모두 알고 있다. 협상을 거절하고, 여러차례 신의를 배반하자, 결국은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고. 중국인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제1차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은 시작부터 평등을 강조한다. "청왕조와 영국은 전쟁을 중단하고 영구한 평화 및 대등한 관계를 체결한다." "양국의 관리의 왕래는 반드시 평행조회해야 한다." 이런 말을 왜 제1조에 넣게 되었을까? 실제로는 네가 천조상국이라고 자처하는 태도로 깡패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중국에서 편찬된 역사교과서에서 고대사는 50%가 가짜이다; 1840년이후의 중국근대사는 90%가 가짜이다. 1949년이후의 역사는 100% 가짜이다. 대부분 중국인의 역사교육은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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