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영태공주릉(永泰公主陵): 무측천 손녀의 묘에 얽힌 이야기...

중은우시 2023. 4. 10. 14:31

글: 야독문사(夜讀文史)

 

1958년, 섬서(陝西) 함양(咸陽)부근의 양산(梁山)에서 채석노동자들이 산을 깎아 돌을 캐고 있었다.

'쿠궁'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열린 깨트린 돌의 아래에 크기가 균일하고, 배열이 나란한 돌로 쌓은 석벽이 발견된다. 

이는 분명 능묘(陵墓)이다.

공사팀은 즉각 공사를 중단하고, 현지의 문화재당국에 연락한다.

문물국은 소식을 들은 후, 즉시 고고인원을 파견하여 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사료기재를 종합하여, 연구자들은 이곳은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와 여황 무측천(武則天)의 합장능인 '건릉(乾陵)'이라고 판단한다.

그후 몇년간 고고학자들은 건릉주변을 탐사했고, 차례로 여러개의 배장묘(陪葬墓)를 발견한다. 그중 1킬로미터 바깥의 배장묘는 전문가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 묘는 총면적이 6,000여평방미터이고, 묘실구조가 복잡했으며, 장식은 화려했다. 이를 보면 묘주인의 신분이 존귀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8월, 문화재부문은 정식으로 이 배장묘에 대한 발굴을 전개한다.

묘실주인은 이를 통해 신비의 면사를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대당고영태공주(大唐故永泰公州)"로, 이치와 무측천의 친손녀이다.

발굴이 진행된 6일째 되는 날, 고고인원들은 마침내 묘실문에 도달하고, 묘실로 진입할 준비를 한다.

묘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눈앞에 펼처진 일막은 적지 않은 고고인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한 여성은 그 자리에서 놀라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원래, 묘실의 대문 뒤에는 해골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공주의 묘장에 왜 당당하게 남자사신이 출현한 것일까?

영태공주는 사상 유일하게 "호묘위릉(號墓爲陵, 원래 능은 황제의 무덤에만 쓸 수 있고 공주의 무덤은 묘라고 불러야 하는데, 영태공주의 무덤은 능이라고 불렀다)"한 경우로서, 황제의 등급으로 매장된 공주이다. 그녀에게는 어떤 전설적인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일까?

1. 회피할 수 없었던 정략결혼

 

영태공주는 이름이 이선혜(李仙蕙)이고 자는 농휘(穠輝)이다. 684년을 전후하여 태어났으며, 이현(李顯)의 일곱째 딸이다.

부친 이현이 낙양으로 불려가기 전에, 영태공주는 가족들과 함께 균주(均州), 방주(房州) 일대에서 살았고, 거기서 그녀는 인생의 절반을 보낸다.

상애란(尙愛蘭)이 쓴 <중국공주>라는 책에 따르면, 이현이 여릉왕(廬陵王)으로 쫓겨나 있는 동안 영태공주는 그녀의 첫사랑을 만난다. 바로 송지민(宋之閔)이다.

한명은 외지로 공부하러 온 영준한 재자(才子)이고, 다른 한명은 직위도 없고, 총애받지도 못하는 황실의 군주(郡主)였다. 이들 사이에 애정이 싹튼 것이다.

궁밖의 생활은 비록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눌 여건이 되었던 것이다.

송지민은 재능이 뛰어났고, 견식도 넓었으며 자주 민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어 이선혜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송지민이 있었기 때문에, 이선혜의 단조롭고 초조했던 생활은 한줄기 밝은 빛이 남게 된다.

아쉽게도 아름다운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력원년(698년), 적인걸(狄仁傑)의 권고로, 무측천은 자신의 사후 이당황실에 조정을 잇게 하기로 결정한다.

그해 3월, 무측천은 이현이 낙양으로 불러 병치료해야한다는 이유를 대어 비밀리에 그를 낙양으로 오게 한다.

이현 일가는 이때 꿈에도 그리던 권력의 중심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14살의 이선혜는 부득이 그녀의 첫사랑 송지민과 헤어져야 했다.

이때 송지민은 그의 당형(堂兄) 송지문(宋之問)을 떠올린다.

송지문은 줄서는 것을 아주 잘했다. 무측천이 대권을 장악했을 때,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면서 그녀에게 아부했고, 무측천의 주변에서 총애를 받던 남총 장창종(張昌宗), 장역지(張易之) 형제에게도 잘 보여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송지민은 이 당형에게 부탁하여 궁에서 장씨형제를 위해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궁에 들어간 후, 송지민은 다시 이선혜를 만난다. 두 사람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신분의 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구시원년(700년), 16세의 이선혜는 정식으로 영태군주(永泰郡主)라는 봉호를 받는다. 식읍은 1,500호이다. 같은 해 성지에 따라 위왕(魏王) 무승사(武承嗣)의 아들 무연기(武延基)에게 시집간다.

이때의 이선혜는 아마도 반항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지와 무씨,이씨 양가의 이익앞에 그런 반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부친 이현은 확실히 이 혼사를 무씨일족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탐색하고, 자신의 모친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그리고 이미 나이가 든 무측천도 이렇게 생각한다: 무씨, 이씨 양가는 여러 해동안 서로 대치했고 갈등이 깊다. 만일 장래 이현이 즉위한다면, 무씨를 제거하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측천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정략결혼이 필요했다. 그래야 무씨일족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여러 고려하에, 무씨와 이씨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무측천과 이현이 모두 바라는 바였고, 이들간의 정략결혼은 반드시 필요했다.

정략결혼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이선혜여야 했을까? 양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공주 하나로는 확실히 부족하다.

당중종 이현에게는 7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그중 3명이 모두 이 시기에 무씨자제들과 정략결혼한다. 나머지 2명은 위씨(韋氏, 당중종이현의 황후일가)와 결혼한다. 

이를 보면, 무씨집안과 정략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이선혜는 정략결혼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사인은 수수께끼였다. 고고학적 발굴로 천년의 비밀이 풀리다.

 

무연기에게 시집간 후, 영태공주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 부마는 확실히 그다지 총명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이 겨우 17살의 이선혜까지 연루시켜, 결혼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는다.

대족원년(701년) 9월, 무측천의 남총 장씨형제에 대한 불만으로, 영태공주의 큰오빠인 이중윤(李重潤)과 남편 무연기는 집안에서 불만을 토로한다.

나이가 젊은 두 사람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들이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 살신지화를 불러올 줄은.

금방 이중윤과 무연기의 언행은 장씨형제의 귀에 들어가고, 기세등등했던 장역지는 즉시 입궁하여 무측천에게 이를 고한다. 

그렇게 하여 장씨형제에 대하여 그들이 한 말은 왜곡되어 무측천을 모욕하고, 조정을 비방한 행위가 되어 버린다.

장씨형제에게 빠져있던 무측천은 자신이 뒤를 받쳐주는 무씨, 이씨양가의 배신에 극도로 분노하여, 즉시 이중윤, 무연기를 처결하도록 명한다.

영태공주 이선혜도 당시 이 대화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사료를 보면, 이 사건이후 이선혜는 오빠나 남편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

비록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이선혜의 사망시기는 남편, 오빠의 사망과 같은 해인 701년이다.

사사되지 않았는데, 이선혜는 도대체 어떻게 죽은 것일까?

정사에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선혜의 사인에 대하여 죄살설(罪殺說), 장살설(杖殺說), 독살설(毒殺說)등이 분분했다. 영태공주의 죽음은 천년의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당고영태공주묘지명>이 출토되고나서, 그리고 영태공주의 유골이 발견되고나서 이 수수께끼는 결국 풀리게 된다.

 

전문가들의 해독에 따르면, 영태공주의 진정한 사인은 "주태훼월(珠胎毁月)" 및  "분쌍동지비약(忿雙童之秘藥)"이다. 

무엇이 '주태훼월'인가? 학계에는 '유산설(流産說)'과 '난산설(難産說)'이 있다.

비록 장씨형제에 대하여 말할 때, 영태공주도 참여했지만, 당시 영태공주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무측천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자신과 혈맥이 이어져있는 임산부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측천이 보기에, 이중윤, 무연기를 죽이고, 영태공주를 용서하는 것은 황권의 불가침을 드러내면서,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자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뱃속의 태야때문에 영태공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 오빠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태어난이래 무측천에 대한 공포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결국 영태공주는 유산해버리게 된다.

영태공주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측천은 시녀에게 '비약(秘藥)'을 주어 영태공주에게 보낸다. 이 비약이 사람을 살리는 것인지, 아니면 독살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유산설'이다.

난산설은 영태공주의 유골을 근거로 한다. 의학종사자가 묘에서 출토된 영태공주의 유골을 검사했다.

그중 골반부분이 비교적 좁았다. 그리고 영태공주는 당시 겨우 17살이었다. 신체발육이 아직 미성숙하여, 출산의 위험이 컸다.

이들 증거를 보면, 영태공주는 확실히 난산의 가능성이 있다.

유산이건, 난산이건, 한 나라의 공주가 이렇게 간사한 자의 모함을 받아 외롭게 죽어간 것이다.

 

3. 묘도(墓道)의 수위(守衛). 진실한 신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이 나오게 만든다.

 

만일 영태공주의 진실한 사인, 그리고 그 배후의 권력투쟁이 학계에서 논쟁거리의 촛점이라면, 그렇다면, 영태공주의 묘실안에서 발견된 신비한 남자시신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천년전의 남자시신은 도대체 누구일까? 왜 영태공주의 묘 안에 스물몇살의 청년남자시신이 출현하게 되었을까?

영태공주묘의 소재지인 섬서성 함양에는 영태공주묘의 그 남자시신에 관한 낭만적인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당시 묘문을 열었을 때, 현지 촌민이 직접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남자시신을 처음 고고인원들이 발견하였을 때, 손에는 귀갑(龜甲)을 쥐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여덟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민영태(之閔永泰), 생생세세(生生世世)"

이 귀갑으로 인하여, 현지인들은 이 남자시신의 신분이 바로 송지민이라고 여긴다.

살아서 동침하지는 못했지만, 죽어서는 동혈(同穴)에 묻히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 사랑에 미친 남자는 영태공주가 죽은 후, 미친 듯이 사방으로 공주의 묘지를 찾아다녔다.

찾아낸 후 그는 몰래 공주의 능묘에 잠입하여, 공주의 관 앞에 앉아서 통곡했다. 그후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죽는다. 공주를 위하여 순정(殉情)한 것이다.

송지민의 친구는 이 일을 알고, 그가 죽은 후, 송지민이 몰래 잠입한 구멍을 막아서, 이들 원앙의 뜻을 이루어주었다.

그리하여, 송지민은 묘안에서 공주와 천년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아주 낭만적이지만, 전설은 전설이다. 거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점들이 많다.

만일 남자시신이 정말 송지민이라면, 그는 문약한 서생으로 어떻게 묘지기들을 피해 묘원으로 들어갔으며, 또 어떻게 혼자서 묘에 구멍을 팔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전설에는 영태공주와 송지민이 사랑을 맹세한 귀갑이 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두 사람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애정의 유일한 증거가 없어진 것이다...

나중에 기술적인 검사를 통해, 묘도에 있던 남자시신의 신분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묘도의 가운데 앉아있던 남자시신의 생활연대는 오대(五代) 내지 송나라초기이다. 당나라때 사람이 아니다. 자연히 영태공주와 동시기의 송지민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시신의 주변에는 글자를 새긴 귀갑도 없었고, 그저 녹이 슨 쇠도끼(鐵斧頭)만이 있었고, 여기저기에 금은주보가 흩어져 있었다.

이를 보면, 이 남자시신은 묘안에서 죽은 도굴꾼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도굴한 후 도굴꾼들끼리 분쟁이 생겨, 나머지 인원들이 그를 죽이고자 묘를 떠나기 전에 외부로 통하는 구멍을 막아버린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훔친 금은보화를 움켜쥐고 묘혈 속에서 굶어죽게 된다.

불의한 재물은 취해서는 안된다(不義之財不可取). 도굴꾼이 묘안의 재물을 탐하다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