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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인종(明仁宗)의 제왕술(帝王術)

by 중은우시 2022. 7. 20.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홍희(洪熙, 명인종 주고치의 연호)떄, 명인종(明仁宗) 주고치(朱高熾)는 몸이 좋지 않았고, 당시 조정을 질타하던 5명의 거두 건의(蹇義),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김유자(金幼孜), 하원길(夏元吉)이 핵심의사결정층이 되어 송인종을 보좌한다. 영락(永樂, 명성조 주체의 연호)때, 명나라는 실제로 의사결정권이 3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인종에 이르러, 과거 자신을 따랐던 노신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건의, 양사기에게 은장(銀章)을 새겨서 준다. 이 은장은 두 노대신의 공로가 혁혁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은장을 찍어 올리는 상소는 직접 황제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나중에 양사기가 극력 주장하여, 명인종은 양영, 김유자, 하원길의 3명에게도 은장을 수여한다. 이것은 바로 명나라의 "은장밀주(銀章密奏)"의 시작이다. 그러나 은장을 대신들에게 부여하고, 이후 실제운용하는 과정을 보면 우리는 송인종의 이 다섯 노신에 대한 친소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1424년 8월 영락제 주체가 사망하고, 명인종 주고치가 즉위한다. 9월에 명인종은 보정대학사, 이부상서 건의, 각신 양사기를 불러, 직접 2사람에게 은으로 제작한 도장 1매씩을 수여한다. 은장에는 "승건규무(繩愆糾繆)"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다. 명인종은 이렇게 말했다: "경들 두 사람은 내가 감국으로 있을 때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박하게 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에게 잘못된 일이 있는데, 바로 보지 못하면 그것을 자세히 적어서 이 은장을 찍어 올리도록 해라!(<명경세문편>)

 

양사기는 관료사회의 법칙을 잘 알았다. 자신과 건의만 은장을 받는다는 것은 이는 대단한 영광이다. 그리고 당시 내각에는 자신 이외에 양영, 김유자의 두 명이 더 있고, 이들 두 명은 모두 영락제때의 노신인데도 은장을 받지 못한 것이다. 양사기는 이렇게 하면 내각의 조정에서의 지위에도 영향을 주고, 나중에 내각에서 일처리를 할 때 어려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양사기는 명인종에게 극력 요구한다: 양영, 김유자는 저와 동등한 직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장을 하사받지 못했습니다. 원컨데 황제의 은혜가 골고루 미치게 해주시옵소서. 최종적으로 명인종은 권력균형의 고려로 두 사람에게도 같은 은장을 수여한다.

 

명인종때 중추기구의 핵심구성원은 5명이었다. 즉 건의, 양사기, 양영, 김유자와 하원길이다. 지금 4명에게는 은장을 주었는데, 나머지 한 사람에게만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같은 해 11월 같은 은장을 호부상서 하원길에게도 하사한다.

 

이들에게는 모두 똑같이 "승건규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은장을 내렸다. 그러니 임무도 마찬가지이다. 양사기가 하원길에게 써준 묘지명을 보면, 묘지명에 명인종이 그들 5명에게 내린 조서를 언급하고 있다. 그 조서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러하다: "내(명인종 주고치)가 황제로서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대들이 이 은장을 찍어 상소를 올려달라. 그러면 나는 반드시 받아들이겠다." 

 

같은 해 11월, 송인종은 다시 이들 5명에게 집단 조서를 내린다. 내용은 다섯명이 적극적으로 간언해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다섯 은장을 가진 사람의 신분으로 보면 이 5명중에서 2명은 상서(尙書)이고, 3명은 내각 각신(閣臣)이다. 모두 명인종이 황제에 오르는데 공헌한 영락제때의 노신이다. 지위가 높고, 경력도 충분하며, 실권도 가지고 있었다. 즉 명인종의 핵심의사결정집단이다. 간언은 원래 그들이 해야할 일이다. 황제도 그들이 간언한다고 하여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황제는 간언을 적극적으로 해달라는 조서를 계속하여 내란다. 그렇다면 은장을 하사한 목적은 정말 그들이 직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명인종의 이전 영락제 주체때, 명나라의 핵심중추기구는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명나라초기에는 남경이 수도였다. 영락제가 정난지역을 일으켰으니, 남경은 당연히 '보수반동'의 땅이다. 그렇다고 영락제가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당시는 아직 남경이 공식적인 국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락제가 좋아한 곳은 북경이다. 그래서 남경을 태자(太子) 주고치가 감국(監國)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의사결정기구를 설치한다. 북경은 영락제의 용흥지지이니 당연히 아주 중시했다. 다만 영락제는 몽골을 치기 위하여 새외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북경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손자인 주첨기(朱瞻基, 나중의 명선종)에게 맡겨서 북경에도 또 하나의 의사결정기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영락제가 친정을 할 때는 문무대신들이 그를 따랐다. 그래서 영락제때는 3개의 의사결정기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 세 개의 의사결정기구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1. 영락제 북순계(北巡係)의 관리. 이들 관리들은 영락제를 따라 북정에 나선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고, 심지어 감국인 태자 주고치의 권력도 배제했다. 예를 들어, 영락9년에 이렇게 규정한다. 공신의 범죄, 고위관리의 임면, 군사문제는 반드시 황제가 처리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태자가 처리한다. 그러나, 영락15년에 이르러 규정이 바뀐다. 고위관리의 임면뿐아니라, 중급관리의 임면까지도 북순계가 장악한다. 그외에 태자의 사법재판권, 재사권도 크게 축소된다. 이 북순계의 대표인물로 명인종때까지 살아있던 사람은 양영, 김유자이다.

 

2. 북경태손유수계(北京太孫留守係)  관리. 대표인물은 황태손의 스승인 하원길이다. 하원길은 국내정치를 둘로 나눌 것을 극력 추진했다. 황태손이 베이징에서 감국하며 북방의 정무를 책임지면서, 황태자와 황제간의 교량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명사>는 하원길이 북경에서 풍운을 질타하며 대권을 독점했다고 적고 있다. "조회가 끝나면, 여러 대신들이 그를 둘러싸고 일처리에 관하여 묻는데, 그는 구두로 대답하거나 글로 써주었다. 당연한 일을 처리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를 보면 그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3. 남경태자유수계(南京太子留守係). 대표인물이 바로 건의와 양사기이다. 그들은 태자 주고치의 곁을 따르면서 일했다.

 

황제가 5명에게 은장을 하사한 과정을 보면, 명인종의 이 5명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명인종은 먼저 자신의 직속부하에게 주고, 다시 북순계관리에게 주고, 그 다음에 북경계관리에게 준다. 하원길은 과거에 '남북분치(南北分治)'를 추진한 바 있었기 때문에 명인종에게 밉보였다. 그리고 이런 친소관계는 은장의 하사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은장을 지급한 후의 실제운용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은장을 받은 후 반년동안 오직 양사기만이 밀주를 올리고, 명인종이 받아준다. 양사기가 시작하자, 양영도 황제에 밀주를 올린다. 명인종은 기꺼이 그 건의를 받아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적극적으로 상소를 올릴 것을 질책, 독촉하자, 하원길등도 소량의 밀주를 올리기 시작했다.

 

명인종이 5명의 대신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던 원인은 주로 명인종의 등극후, 조정의 국면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삼대집단은 기반을 잃게 되었고, 중앙핵심은 권력재분배가 필요했다.

 

건의, 양사기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남경 감국계의 핵심인물이고, 명인종의 핵심신하이다. 하원길은 북경유수계이지만, 지금 주첨기의 권력은 완전히 부황인 자신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그 핵심인물인 하원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다지 큰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영락홍희 권력교체기에 조정의 재정문제가 불거진다. 반드시 호부상서가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호부상서를 맡겨 이 난제를 해결하게 한다(만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다만 그에게 더 큰 영예는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양영, 김유자는 북순계이고 선황제의 핵심신하이다. 자신의 효순(孝順)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시국의 안정을 위해, 선황의 노신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영예도 주고, 실제권력도 주어, 그들을 핵심의사결정층에 포함시킨다.

 

명인종의 등극후, 기실 3대집단은 이미 합류되었다. 다만 명인종은 몸이 약했다. 몸이 약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명인종은 영락제때 당했던 기억이 아주 생생했다. 그것은 바로 3대집단이 서로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인종은 친소를 기준으로 권력을 재분배하게 된다.

 

명인종이 재분배과정에서, 양사기는 원래 관직이 한림(翰林)이었고, 한림계통의 최고관직은 정오품(正五品)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이다. 다만 양사기는 송인종의 고굉지신이니 이 정도의 관직으로는 하원길등 상서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명인종은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영락제때 양사기는 정육품(正六品)의 한림시강(翰林侍講)이었는데, 명인종에 이르러 양사기는 종일품(從一品), 소부(少傅), 예부시랑 겸 화개전대학사(華蓋殿大學士)에 앉혀 삼공(三公)의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 건의는 종일품, 소사(少師), 이부상서로 삼공의 자리에 앉으며 양사기보다 지위가 약간 높았다.

 

삼공중 한 자리가 비었다. 명인종은 최종적으로 하원길에게 그 자리를 준다. 원인은 하원길이 비록 잘못한 적이 있지만, 이는 훈계로 지나갈 수 있고, 과거의 태손계는 바로 지금의 태자이고, 현재의 태자는 완전히 황제에 의탁하고 있다. 그래서 하원길에게 주는 것이 낫지, 북순계의 권력이 너무 커지게 할 수는 없었다.(북순계는 명인종이 태자로 있을 때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원길이 삼공중 가장 낮은 직위인 소보(少保)가 된다.

 

북순계는 고의로 억누른다. 그래서 양영에게는 정이품(正二品), 태자소부(太子少傅), 공부상서 겸 근신전대학사(謹愼殿大學士)에 앉히고, 김유자는 정이품, 태자소보(太子少保), 호부우시랑(戶部右侍郞) 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앉힌다. 영락제때는 양사기보다 상사였던 양영, 김유자가 이제는 하원길보다 아래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