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요(穆堯)
2022년 3월말, 중공은 자리가 비어있는 지방의 전직부서기(專職副書記)를 대거 임명하고 있다. 통상적인 논리대로라면 이 직위는 앞으로 지방의 성장직을 물려받거나 다른 지방으로 가서 성장직을 승계할 최우선후보가 된다. 중공이 지금 이런 인사배치를 하는 것은 20대를 앞둔 사전조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이시위 비서장 주거위제(諸葛宇杰, 1971년 5월생)는 이번에 새로 상하이시위 전직부서기가 되어, 중국정계의 70후중에서 지방전직부서기가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예전, 주거위제와 마찬가지로 상하이정계에서 굴기한 "70후" 지방상위 스광후이(時光輝, 1970년 1월생), 호남, 강서, 귀주등지를 전전하는 류제(劉捷 1970년 1월생)과 함께 나란히 "70후"의 3대 뉴페이스로 불렸다.
이후의 "70후"들이 부부장급(차관급)에 오른 연령이 보편적으로 50세가량인 것과 비교하여, 그들은 더욱 일찌감치 그 자리에 올랐다. 45세가량에 부부장급에 오른다. 스광후이는 43세에 상하이시 부시장이 되었고, 류제와 주거위제는 모두 46세때 부부장급에 오른다.
그외에 이들 3명외에 전 중기위서기 왕치산의 비서실장 저우량(周亮, 지금 이미 은보감회 부주석이 되었다)이 부부장급에 오른 나이도 44세였다. 다만 그의 관료로서의 노선이 다르므로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스광후이는 이들 세 명중 가장 경력이 많다. 그러나 2018년 상하이에서 나가 구이저우성의 상위, 정법위서기가 된 후,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20대전에 새로 직위를 얻지 않을까 생각된다.
류제는 다른 두 명과 비교하면 경력이 가장 풍부하다. 일찌기 베이징과기대학 야금과를 졸업한 후 샹탄강철회사에 입사한다. 2008년 샹탄강철회사 총경리직에 있다가 정계로 입문한다. 그후 후난, 장시를 전전한다. 2018년 류제는 스광후이와 함께 나란히 구이저우성으로 간다. 당시 구이저우상위에서 유이한 "70후"가 되고, 류제의 서열은 스광후이의 뒤였다.
그러나 3년후, 류제는 먼저 구이저우를 떠나, 2021년 12월 이미 낙마한 저우장용(周江勇)의 뒤를 이어 저장성의 성회도시 항저우시위서기가 된다. 관료로서의 앞길이 환하게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후, 3명의 항저우시위서기는 모두 고위직에 오른다. 황쿤밍(黃坤明)은 항저우를 떠난 후 지금 중앙선전부로 가서 지금 중앙정치국위원 겸 중앙선전부장이다. 그의 후임자인 공정(龔正)은 산동성장에서 남하하여 상하이시장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의 앞길도 넓게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항저우시위서기가 된 자오이더(趙一德)는 2년이 지난 후 샨시성위서기가 되어 당시 가장 젊은 지방정부 '일인자'에 오른다. 저우장용도 낙마하기 전까지는 모두 그의 앞날을 좋게 보고 있었다.
주거위제는 3명중 나이가 가장 어리고, "성위상위"에 오른 것도 가장 늦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상하이를 떠나본 적이 없다. 상당히 전통있는 "해파(海派, 상하이파)" 관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도 그의 승진속도를 막지는 못했다.
상하이시위상위중 지위가 가장 낮은 비서장에서 일약 상하이시의 3인자인 전직부서기가 된다. 전국에서 가장 나이어린 지방전직부서기가 되었고, 현재는 3명중에서 정부장급(장관급)까지 한걸음만 남게 되었다. 실로 보기 드문 발탁이라 할 수 있다.
주거위제는 늦게 출발했지만 먼저 도착했다. 스광후이, 류제를 빠른 속도로 추월해 버렸다. 동시에 상하이는 다른 성시와 다르다. 전직부서기의 중요성도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랴오궈쉰(廖國勛), 인홍(尹弘), 위샤오량(于紹良) 3명의 상하이시 전직부서기들은 모두 다른 지역의 정부장급(장관급)으로 옮겨가거나 혹은 지방의 1인자가 되거나 혹은 인민일보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주거위제의 앞날이 어떨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에 주거위제가 그 자리로 승진한 것이 20대 직전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향후 자리를 위한 사전포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거위제는 2016년 7월 상하이시위 부비서장, 판공청주임이 되었다. 주저위제의 관료로서의 경력은 천량위(陳良宇), 한정(韓正), 양슝(楊雄), 인홍(尹弘)등의 경력과 유사하다. 전후로 한정, 리창(李强)의 두 상하이시위서기를 모셨다.
'중국의 정치 > 중국의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위 "주룽지 9개조 건의"의 배후는 간단하지 않다. (0) | 2022.04.01 |
---|---|
중국의 "70후" 정치인들의 승진속도가 "50후", "60후"에 비해 늦어지고 있다. (0) | 2022.03.31 |
리진진(李進進) 변호사에 대한 Aliance for Our Values의 추도성명 (0) | 2022.03.28 |
리커창의 후임자는 누가 될 것인가? (0) | 2022.03.15 |
"참초미제근(斬草未除根)": 보시라이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시진핑에 대한 복수극 (0) | 2022.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