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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성제(漢成帝) 유오(劉驁)는 어떻게 죽었을까?

by 중은우시 2022. 3. 19.

글: 진령신(陳令申)

 

한성제 유오는 한원제(漢元帝) 유석(劉奭)의 장남으로 서한의 제9대황제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색채의 황제중 하나이고, 가장 호색한 황제중 하나이며, 남총(男寵) 장방(張放)을 좋아했던 황제이기도 하다. 그와의 사이에는 "단수(斷袖, 한애제가 동공과 함께 자다가 먼저 깼는데, 소매가 동공에게 깔려 있어서, 소매를 빼면 장방이 깰까봐 소매를 잘랐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동성애를 의미한다)"의 성향이 있어 후세의 욕을 먹는다.

 

한성제는 26년간 재위했고, 정무는 돌보지 않았으며, 주색에 빠져 지냈고, 혼용무도(昏庸無道)했고, 외척을 관리로 등용했다. 그리하여, 서한왕조는 위기에 빠지고 갈수록 위험해진다. 동시에 서한왕조의 멸망에 화근을 심은 셈이 ㅣ된다. 그는 역사상 '황음호색'으로 유명하다. 역사상 가장 호색한 황제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결국 가장 총애하던 소의(昭儀) 조합덕(趙合德)의 궁에서 폭사하니 나이 44세때였다. 한성제가 폭사할 때는 한창 나이여서 상리에 맞지 않아,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고, 그의 죽음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한성제는 수화2년(기원전7년)에 소의 조합덕의 궁에서 폭사한다.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그는 폭사하게 된 것일까? 역사기록을 보고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하자.

 

<한서.외척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성제는 줄곧 신체건장했고, 무슨 병도 없었다. 수화2년(기원전7년) 삼월의 어느날 아침, 한성제는 조회에 나가기 위해 침상에서 일어났는데, 돌연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며, 손발에 힘이 없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옷과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진다. 얼마 후 조합덕의 궁중에서 사망한다. 황제의 사망에 대하여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그 이유를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황태후 왕정군(王政君)은 명을 내려 왕망(王莽)으로 하여금 어사, 승상, 정위와 함께 황제의 평소 기거와 발병상황을 조사하도록 시킨다. 조합덕은 자신에게 죄를 물을까 겁이 나서 자결해버린다. 백성들은 모두 조합덕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서.외척전>에서는 한성제의 죽음에 대하여 조합덕에게 죄가 있다고 몰아갔다. 그러나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궁중의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서.원후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성제는 즉위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후사가 없었고, 몸이 항상 좋지 않았다. 이는 <한서.외척전>에서 "한성제는 줄곧 신체건장했고, 무슨 병도 없었다."는 기록과 배치된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어느 하나가 고의로 사실을 숨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단 <한서.원후전>에 적혀 있는대로 "한성제는 즉위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후사가 없었고, 몸이 항상 좋지 않았다."는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한성제의 몸이 항상 좋지 못했다면, 분명 오랫동안 어떤 질병이 쌓여서 결국은 폭사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단지 이론적인 추측이다. 구체적인 원인에 대하여는 사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없다.

 

<한서.전한효성제황제기.권27>과 <자치통감>의 기재를 보면, 한성제가 폭사한 일에 대하여 <한서.외척전>과 대동소이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두 한성제가 폭사한 원인을 조합덕에게 돌리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원인에 대하여는 역시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한서.원후전>의 기록을 제외하면, <한서.외척전> <한서.전햔효성제황제기>와 <자치통감>의 3개의 사료기재는 모두 "한성제는 줄곧 신체건장했고, 무슨 병도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고, 옷을 입지 못했으며, 아침에 사망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를 가지고 판단하면 한성제의 발병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급성뇌경색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관련사료의 증빙이 부족해서 추단할 뿐이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그럼 도대체 한나라시기의 사료기록중에 한성제의 사인을 연구한 것이 있을까 알아보자. 있다. 한나라때 하동도위 영현(伶玄)이 쓴 <비연외전(飛燕外傳)>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한성제의 사인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소설에 불과하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은 야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은 저명한 사학자인 사마광의 눈에 들어서 그중 일부 내용은 <자치통감>에 수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분명 일정한 참고가치는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그런 문제를 따지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일단 <비연외전>에는 도대체 한성제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비연외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한성제는 병이 있어 방사(房事)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태의도 속수무책이어서 명약을 구하다가 '춘휼고(春恤膠)'를 얻는다. 매번 방사때마다 1알씩 먹었다. 하루는 밤에 소의 조합덕이 술에 취하여, 황제에게 한꺼번에 7알을 먹인다. 그리하여 방사를 진하게 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 한성제가 정액을 다량 쏟고 죽어 있었다.

 

그외에 또 하나의 책이 있는데, 북송때 만들어진 <조비연별전(趙飛燕別傳)>이다. 거기에도 한성제의 사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한성제는 걸음걸이도 느릿하고, 정신도 피로해서, 방사를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한 도사가 단약을 바쳤고, 하루에 1알을 먹어야 소의 조합덕과 방사를 치를 수 있었다. 하루는 저녁에 조합덕이 술에 취한 후, 한성제에게 10알을 한꺼번에 먹여서, 방사를 진하게 치렀다. 그러나 한밤중에 한성제는 잠들지 못하고 몸이 불편하여 뒤척였다. 조합덕이 급히 일어나 촛불을 켰는데, 한성제의 정액이 계속 흘러나왔고, 얼마 후 사망한다. 황태후는 사람을 보내 조합덕에게 원인을 추궁했고, 조합덕은 벌받는 것이 두려워 목을 매 자살한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성제는 아마도 급성뇌경색으로 죽은 것같다. 혹은 단약을 먹고 죽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느 원인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지는 여기서 결론내리기 힘들다. 새로운 역사연구자료가 나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혹은 한성제의 능묘인 연릉을 열게 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