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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대만3대방파: 죽련방(竹聯幇)

by 중은우시 2021. 6. 1.

글:숭명경야(崇明慶爺)

 

죽련방은 죽림연맹(竹林聯盟)이다. 1956년에 성립되었다. 그 전신은 1953년에 성립된 중화방(中和幇)이며, 저명한 국제적인 중국계 흑사회조직이다. 양안삼지(대륙, 대만, 홍콩)과 동북아, 동남아, 심지어 구미등의국가에도 모두 관계세력이 있다. 최전성기떄 핵심구성원이 약 2만명이며, 외곽조직은 10만에 이른다고 한다. 2008년 미국의 Foreign Policy잡지에서는 전세계에서 4번째로 위험한 조직으로 선정한다.

 

1953년경, 손덕배(孫德培)는 중화향(지금의 영화시, 중화시)에서 중화방을 설립한다. 그후 손덕배의 지도하에 세력을 확대한다. 2년내에 중화방의 세력은 중화, 판교(板橋)등지로 확장된다.

 

1955년에, 방주 손덕배는 다툼과정에 소년 1명을 죽여버리고,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다른 방파세력은 중화방의 방주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손덕배의 지역을 침탈한다. 중화방 내부에서도 각 파벌간에 서로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방의 골간인 반세명(潘世明)은 앞장서서 중화방을 나가 만자방(萬字幇)을 만든다; 또 다른 골간인 담주오(湛洲吾)도 1956년 별도로 삼환방(三環幇)을 결성한다.

 

나중에 중화, 영화일대에 남아 있던 조녕(趙寧)을 우두머리로 하는 두목과 원로들은 1956년 6월 중화향 죽림로(지금의 영화시)에서 제3차대회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조녕은 방주 손덕배가 감옥에 들어갔으므로, 방주를 존중하고 평등을 표시하기 위해 방주 직위는 두지 않기로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중화방이 잔여세력을 모아서 죽림연맹을 조직하며 죽림방으로 약칭하기로 한다. 죽림연맹이라는 이름은 유명배우인 김도(金滔)가 제안했다고 한다. 최초의 죽련방은 동물이름을 따라 구분했다. 최초에는 사(獅), 호(虎), 표(豹), 봉(鳳), 압(鴨)의 5개 지파의 연맹이었다. 그리고 동물의 명칭앞에 색깔을 넣어서, 배분을 구분했다. 진계례(陳啓禮)는 당시 '압'의 구성원이었다(이때의 죽림방은 기껏해야 연맹형태의 조직이고, 진정한 의미의 방주는 없었다)

 

1959년, 죽림방은 적대하던 사해방이 문산, 삼환등의 방파와 연합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한동안 조용히 지낸다. 1962년에 이르러, 당시 타이페이지역에서 최대세력이던 사해방은 정부당국의 탄압으로 강제해산의 위기에 처한다. 이는 죽림방에게 사해방의 지역을 빼앗을 좋은 기회가 된다.

 

1957년 죽림방을 떠나 별도의 '남강연맹(南强聯盟)'을 조직하였던 '한압자(旱鴨子)' 진계례는 '청사(靑蛇)' 등국풍(鄧國灃)등을 데리고 죽림방으로 되돌아 온다. '남해노방(南海路幇)의 백랑(白狼) 장안락(張安樂)은 1964년 죽련방에 가입하고, 1965년에 죽련방에 가입한 오돈(吳敦)이 죽련방을 정돈하자, 죽련방의 세력을 크게 성장한다. 당시 죽련방의 구성원은 500명 이상이었고, 점차 다른 방파의 세력을 흡수한다. 그리고 '천하제일방'이라는 칭호를 얻고, 이후 죽련방의 기초를 닦는다. 진계례는 이번 확장행동때 두각을 나타낸다. 1968년 '홍콩서찬청'의 전투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기며, 타이페이 중산구의 '우포방(牛埔幇)'을 물리친 후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68년 4월, 방내의 양씨성의 원로의 뜻에 따라, 장안락이 양명산에서 죽련방회의를 소집개최한다. 조직편제를 확대하고, 이후 각 분지는 반드시 '모금(母金)'을 납부하도록 규정한다.

 

1970년 7월, 죽련방의 구성원 진인(陳因)은 죽련방을 떠날 뜻을 품고 조직의 공금을 가지고 도망친다. 그리고 경찰에 보호를 요청한다. 이 사건은 죽련방내의 두목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그를 죽이고자 한다. 죽련방의 구성원 장여홍(張如虹)과 기타 2명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진인을 죽여버린다. 이 사건은 타이페이지역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막후지시자로 지목된 진계례는 체포되어 6년형을 받는다. 그때 학자 이오(李敖)와 같은 감옥에 수감되어 알게 된다.

 

1972년, 양검평(楊劍平)과 진계례가 연이어 감옥에 들어간 후, 죽련방은 점점 붕괴되어 가는 상황에서, 여러 두목들은 장안락을 추대하여 죽련방을 다시 정비하도록 한다. 당시 장안락은 총호법(總護法)을 맡았고, 감옥에 있던 진계례는 총당주(總堂主)로 추대된다. 장안락은 다시 조직을 개혁하고 제도화한다. 분지를 팔기제로 나누어 호, 표, 용, 사, 웅, 봉, 랑, 조등 분지당구를 만든다. 장안락의 지도하에 '신죽련'은 더욱 완비되고 정밀한 제도와 안정적인 기초를 갖게 된다. 그리고 여러 후배를 발탁하여 각자 한지역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한다.

 

다만, 죽련방의 내부에서는 계속하여 파벌간의 투쟁이 있었다. 거기에는 신구세력간의 다툼이 있다. 구파중에는 죽련방의 거물인 주용(周榕)의 세력이 가장 강대했다. 주용은 중화방 시기의 원로이고, 진계례의 큰형님이다. 진계례가 감옥에 있는 동안 주용은 명예영수로 칭해졌다. 주용과 장안락의 다툼은 원로인 '회압(灰鴨)' 유무천(柳茂川)의 거중조정으로 한때 화해했지만, 1975년 '장교찬청사건'이 발생하여 장안락은 조직내 파벌다툼에 실망을 품고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

 

1976년, 출옥후의 진계례는 한때 상계로 진출하여, 승안소방(承安消防), 미화보도(美華報道), 명상구락부(名商俱樂部)등 5개의 회사를 설립한다. 다만 얼마 후 진계례는 중앙정보국(中央情報局)에 흡수되어 그를 배후에서 뒷받침해 주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호로 나와 죽련방을 개혁한다. 주용과 양대세력이 되어 서로 대항한다. 나중에 주용의 수하들이 속속 진계례에 흡수되고, 주용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결국 진계례는 실질적으로 죽련방을 통일하고, 실질적인 초대방주가 된다. 진계례의 정돈으로 죽련방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진다. 이 기간동안 죽련방은 점차 무장현대화를 이루고, 현대화무기를 보유하게 된다. 적대적인 사해방과 1980년대에 두 방은 행화각혈안, 천주찬청사건 및 법정혈투등 사회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1980년 죽련방은 조직기업화에 착수한다. 그리고 1982년 속속 최초의 8개 분당을 설립한다. 각각 충, 효, 인, 애, 신, 의, 화, 평이다. 1984년에 이르러, '강남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모두 천, 지, 지, 존, 만, 고, 장, 청, 동의 9개 당구를 결성한다(서당, 북당은 강남사건때까지 아직 운영되지 않아서 공당(空堂)이었다. 남당은 여전히 독립조직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여성 당구인 '화당(花堂)'(인당난화회의 전신)을 둔다. 짧은 수년만에 죽련방은 진계례의 손안에서 신속히 19개의 기업화된 당구와 직속무장부대인 '죽련돌격대'를 보유하게 된다.

 

1984년 죽련방은 전성기에 이른다. 조직은 해외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전후로 홍콩에 항승국제(恒升國際, 그 대만분공사는 최대의 지하선물사업을 하고 있다), 미국 각 대도시에 용당, 봉방, 호당, 사당(이상의 4당은 성립된 후 1년도 되지 않아 강남사건으로 소탕된다). 그리고 일본 동경 긴자에 분당을 설치한다(일본,미국은 각각 황조(黃鳥) 진지일(陳志一), 청사 등국풍 및 백랑 장안락등 거물들이 책임졌다)

 

1984년초, 죽련방은 진계례에 의해 신속히 확충되었지만, 일부 당구는 이익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6월, 사해방은 죽련방에게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위해 타이난의 황포방(黃埔幇)과 연합하고, 타이페이의 다른 방파를 끌어모아 '강남사건' 이전의 최대규모 가두충돌인 '여방찬청사건'을 일으킨다.

 

사건발생후 죽련방과 사해방의 충돌은 길거리충돌에서 금융과 정치층면으로 옮겨간다. 먼저 두 방이 개입한 주식시장전은 당시 전체 대만에 금융풍파를 불러온다; 이번 금융풍파의 후기에 두 방은 손을 잡고 암중으로 조작하여 주식시장에서 불법이익을 취득한다. 사건은 정부의 주목을 끌었고, 형경대대대장 증문봉(曾文奉)은 명을 받아 금융풍파의 내막을 조사한다. 그는 진상을 파악해 냈으나, 바로 전보발령을 받는다. 당국에 대한 극도의 실망으로 그는 사직해버린다. 그리고 진계례를 찾아서 복수하려 할 때 안전국 국장 왕경후(汪敬煦)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금융풍파후, 정부와 흑사회의 관계는 서로 융합하는 지경에 이른다. 진계례가 출옥한 후, 죽렴장의 수악봉(帥岳峰)은 이미 작고한 감독 백경서(白景瑞)를 통해 군정국(軍情局)에 선을 닿는다. 그리고 군정국에서 훈련을 받고, 가명을 받는다. 군정국은 죽련방을 정부에 조력하는 조직으로 바꾸고자 했다(이를 흑방을 표백한다고 하였음)

 

1984년 10월 15일, 진계례등은 대만정보국 국장 왕희령(汪希苓)의 명을 받아 미국으로 가서 일찌기 대만일보 주미특파원을 지낸 저명한 작가 유의량(劉宜良)을 암살한다. 이것이 바로 저명한 '강남사건'이다. 사건발생후, 정부는 민중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전체 대만에서 조폭조직을 소탕하는 '일청전안'을 발동한다. 일청전안으로 인하여 죽련방의 많은 두목들이 체포되고, 진계례와 오돈은 무기징역형을 받는다(나중에 15년형으로 감형된다). 일부 방내의 주요인물은 대만을 떠나 국외에서 발전한다. 한때 죽련방의 기세는 크게 꺽이게 된다.

 

1988년 대만정부는 3천여명의 방파분자를 석방한다고 선포한다. 그중에는 죽련방의 주요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죽련방은 다시 정비할 수 있었다.

 

1990년 대만경제는 급속히 발전한다. 정부는 8조의 공공공사계획을 내놓는다. 죽령방은 이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전후로 도략집단, 준국기업, 천안영조 및 동규집단등 여러 외곽 기업을 설립한다. 암중으로 입찰을 조정하여 짧은 수년만에 폭리를 취한다. 충분한 자금을 모으게 되자 다시 세력판도를 확장하게 된다.

 

1991년 진계례가 가석방으로 출옥한 후, 남, 서, 북, 중등의 당이 이미 정식 운영되고 있을 뿐아니라, 당내의 거물들도 속속 한위대와 오행, 풍, 화, 뢰등의 당구를 설립하기 시작한다.

 

1995년 12월, 진계례는 직접 황소잠(黃少岑, 원래 總巡査임)에게 방주를 맡도록 한다. 그리고 1996년 자신이 운영하는 <미화보도> 잡지에 이를 공개한다.

 

1996년 8월이후, 진계례는 "치평전안'으로 해외로 도주한다. 몇달 후, 황소잠도 마찬가지로 흑사회소탕을 피해 외국으로 떠난다. 진계례가 출옥한 후 해외망명할 때까지(개략 1993년) 죽련방은 용당, 봉당, 호당, 사당과 해외교당, 학당을 부활시킨다. 용, 봉, 호, 사의 4당은 원래 해외에서 설립되었으나 1년도 되지 않아 평정된다. 1995년을 전후하여 다시 대만에 매, 란, 죽, 국분당을 설립한다. 그리고 경찰에 단속받아 파괴된 두육당도 있다 .이때 죽련방은 개략 이미 30여개의 정규당구를 가지게 된다.

 

강남사건이후, 진계례가 감옥에 들어가고, 여러 두목들이 해외로 도주한다. 나중에 진계례가 직접 지목한 황소잠이 방주를 맡아 죽련방을 이끈다. 다만 황소잠은 중대한 형사사건을 범하여 해외로 도주한다(1999년 대만으로 돌아와 자수한다). 내부는 분열과 혼란에 빠진다. 2001년에 여러 원로들이 추대하여 조이문(趙爾文)이 대리방주에 올라 죽련방을 이끌게 된다.

 

다만 신문보도와 외부소식에 따르면, 2002년말, 황소잠은 방주의 직위를 지당당주인 이종규(李宗奎)에게 맡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황소잠이 여전히 실질적인 죽련방 방주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실이 어떠한지 잘 모르는 상황이 된다. 2004년 9월, 다시 외부에 알려진 소식에 따르면, 황소잠이 진계례의 지시를 받아 타이페이 사림의 모 농장에서 방주직을 진계례와 같은 동물자배에 속한 원로인 후왕(猴王) 호태부(胡台富)에게 넘겼다고 한다. 이상은 마치 황소잠이 기실 계속하여 죽련방의 실질적인 방주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같다.

 

2007년, 죽련방의 정신적 지도자인 진계례가 사망한다. 황소잠이 장례위원회의 주임위원이 되어 진계례의 장례를 주관한다. 주용과 조이문이 각각 부주임위원이 된다. 강호의 규칙을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이 명단이 보여주는 것은 황소잠이 여전히 죽련방의 공인된 방주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역대방주

제1대방주: 진계례(1976-1995) 2007년 10월 4일 홍콩에서 병사. 향년 64세.

제2대방주: 황소잠(1995-

대리방주: 조이문(2001-2007) 

 

방회고위층

 

1985년을 전후하여 공표된 죽련방의 주요 당구와 간부는 아래와 같다:

 

총당주(방주): 한압자 진계례

총호법: 귀견수(鬼見愁) 오돈(전임은 백랑 장안락)

호법: 희합교주(嘻哈敎主) 진공(陳功)

총순사: 요요(幺幺) 황소잠

순사: 왕패뢰(汪沛雷), '선장(船長)' 임경증(林慶增), '소장미(小薔薇) 장계민(張啓民)

 

충당 당주 동계삼, 효당 당주 화지 화계충, 인당 당주 항미화, 부당주 이마 풍재정, 홍인회 호리, 홍인회 신죽분회 회장 장가준, 부회장 강준덕, 애당 당주 구두 유진남, 부당주 장서륭, 왕유홍, 신당 당주 번서 구문흠, 의당 당주 대추 양용순, 화당 당주 주사홍, 평당 당주 소귀 황운룡, 천당 당주 구자 왕국경, 지당 당주 종규 이종규, 부당주 장북화, 지당 당주 소불 장위화, 존당 당주 팽영호, 만당 당주 아빈 구일봉, 고당 당주 아남 진영남, 부당주 정문빈, 장당 당주 지장로, 유필성, 청당 당주 노서 하근성(홍콩교당당주), 동당 당주 대위 장대위 등

 

죽련방은 70개 이상의 직계 분지당구를 가지고 있다. 당구의 아래에는 분회가 있다. 그중 천당과 지당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 한다.

 

경찰이 공표한 직계분지당구는 다음과 같다: 충당, 효당, 인당, 애당, 신당, 의당, 화당, 평당, 동당, 남당, 서당, 북당, 천당, 지당, 지당, 존당, 만당, 고당, 장당, 청당, 매당, 란당, 죽당, 국당, 풍당 화당, 뢰당, 전당, 용당, 봉당, 호당, 사당, 전당, 맹당, 성당, 정당, 한위대, 교당, 표당, 천응당, 건곤당, 태극당, 문무당, 현무당, 광무당, 충의당, 군당, 장당, 오행당, 호당, 화당, 중산당, 도당, 대용당, 명당, 두육당, 천갈당, 천룡당, 지호당, 지해당, 웅당, 표당, 금당, 은당, 동당, 철당, 비휴당, 기린당, 정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