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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

SMIC 20년간의 내부권력투쟁사

by 중은우시 2020. 9. 10.

글: 계면신문(界面新聞)

 

2020년 7월 16일, SMIC(中芯國際)는 정식으로 커창반에 상륙했다. 회사상장과정에서 '쾌(快)'자는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19일만에 심사통과, 모집총액 532.5억위안, 커창반역사상 그리고 A주 근 10년동안 최대의 IPO였다. 어떤 증권회사의 애널리스트는 SMIC가 커창반에 상륙한 후, 시가총액이 6,500억위안을 돌파하고 심지어 1조위안을 돌파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SMIC가 A주로 돌아온 것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중국반도체칩제조의 선두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SMIC는 2000년에 성립되었다. 현재 중국내에서 유일하게 14나노이하의 고급반도체칩을 제조할 수 있는 회사이다. 대륙반도체칩제조기술의 가장 선진적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심(中國芯)"의 중견역량이자, 대륙최대의 웨이퍼제조공장으로서, 20년동안 SMIC는 중국반도체의 역사와 미래에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SMIC의 발전과정에서의 4대에 걸친 동사장, 5명에 걸친 CEO의 교체는 어떤 복잡다기한 지분변경과 쟁탈로 인한 것이었을까?

 

1. 반도체공장건설의 대가가 귀국하다. SMIC는 장장(張江)의 황무지에서 굴기하다.

 

제로에서 시작하여, 20년의 부침과 변화를 겪으면서 일약 '중국심'의 빛이 되었다. 어느 정도에서 SMIC는 중국반도체발전사의 축소판이라 말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세계반도체판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도체는 혁신, 번영, 쟁탈과 폭등폭락이 교차하는 강호이다. 20세기, 중국이 문을 닫았을 때 중국반도체는 세계에서 5년정도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20-30년 뒤처져 버렸다.

 

2001년이 되어, 중국은 WTO에 가입했고, 미국의 인터넷버블, 일본의 경제붕괴로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이런 것은 모두 중국에 좋은 기회가 되었고, 국가급전략인 '909공정'을 시작한다. 국가에서는 반도체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이고, 투자총액이 건국이래 모든 집적회로프로젝트투자의 총액보다 많았던 화홍반도체(華虹半導體)는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세계반도체업체의 제1차 인수기회를 날려버린다.

 

2000년, 중국대륙에 집적회로의 대부인 장루징(張汝京)이 귀국하여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중국반도체발전의 한줄기 가는 빛이었다.

 

장루징은 미국의 반도체거두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20년이상 근무했고, 그가 건설에 참여한 최고급 칩제조공장은 유럽, 미국, 아시아의 3대주에 걸쳐 있다. 그는 1997년 타이완으로 가서 스다집성회로(世大集成回路)를 만들었으나, 2000년 TSMC에 합병당하고, 회사를 떠난다. 그후, 그는 대륙으로 간다. 먼저 베이징으로 갔으나 시장, 부시장등 고위관료를 만날 수 없게 되자 다시 상하이로 간다. 당시 상하이시 경제위원회 부주임으로 있던 장상저우(江上舟)는 시장 쉬광디(徐光迪)에게 장루징을 소개하고, 쉬광디는 장루징을 데리고 장장을 가서, 아무 땅이나 골라서 공장을 짓도록 해준다. 이렇게 하여 SMIC는 상하이에 자리잡게 된다.  

 

2000년 4월 외자기업의 형태로 회사를 창립하고, 5월 장루징은 수백명의 옛 스다집성회로의 엔지지어를 이끌고 상하이로 간다. 8월에 착공한다.

 

장루징은 SMIC의 제1대 동사장에 오른다.

 

2. TSMC와의 소송이 벌어지고, 장루징은 패소하여 회사를 떠난다.

 

그후 3년간, SMIC는 장장의 황무지에 공장을 건설한다. 4개의 8인치생산라인과 1개의 12인치생산라인을 건설한다. 이 3년간, 그는 대륙의 반도체산업을 30년은 끌어올렸다고 말할 수 있다. 2003년에 이르러, SMIC는 6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90나노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게 되어 글로벌 3위의 반도체 위탁생산공장이 된다.

 

장루징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세계반도체칩의 다음 중심은 상하이라고, 그리고 SMIC는 중심중의 중짐이라고.

 

장루징이 중국에서의 고급반도체산업의 결심을 드러낼때, 글로벌반도체칩위탁생산의 거두인 TSMC가 SMIC를 겨냥한다.

 

2003년, SMIC가 자금을 모집하고, 상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TMSC와 북미자회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연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한다. SMIC가 특허와 영업기밀을 절취하였다고 주장하며 10억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 이는 간단한 특허소송이 아니었다. 중국대륙의 하이테크기업의 국제화와 시장화를 막으려는 시도였다. 2년에 걸쳐 소송이 진행되고, 2005년 1월 30일 SMIC는 TSMC와 소송외에서 합의를 한다. 합의계약에 따라 SMIC는 TSMC에게 1.75억달러를 배상했다.

 

SMIC는 이 과정에서도 발전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2004년, SMIC는 처음으로 이익을 실현하고, 뉴욕거래소와 홍콩거래소에 상장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90나노제조공법으로 양산을 실현한다. 기술력에서 TMSC를 뒤쫓는 형국이 된다. 그리하여 TSMC는 다시 소송을 제기한다. 이번에는 3년을 끌었고, SMIC의 패소로 끝난다. SMIC는 부득이 TSMC와의 합의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두번의 패소로 SMIC의 손실은 참혹했다.

 

2005년 7월 28일 SMIC는 왕양위안(王陽元) 원사가 장루징 박사를 대체하여 동사장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2005년 8월, 장루징은 타이완당국의 방해에 불만을 품고 타이완호적을 포기한다.

 

제1차패소에서 장루징은 동사장의 직위를 내놓았지만, 여전히 회사의 실제지배권은 행사했다. 제2차패소에서 합의조건중 하나는 장루징이 경업금지계약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만든 SMIC를 떠나야만 했다.

 

2009년 6월 23일, SMIC는 장상저우가 왕양원을 대체하여 동사장에 오른다고 선언한다.

 

3. 중심제일검(中芯第一劍) 장상저우, 승전계후(承前啓後)의 주요 추진자.

 

장루징이라는 중심이 사라지자, 여러 세력의 균형을 잡아서 SMIC를 이끌 중임이 장상저우의 어깨에 떨어진다.

 

장루징이 장상저우를 후계자로 고른 것은 당초 SMIC가 투자자들을 유치하고 공장을 건립할 때 장상저우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완성했기 때문이다. 전자업종의 전문가로서 장상저우는 청화대학 무선전신을 전공했다. 더더욱 개혁개방후의 제1차 유학생으로 전설적인 명문교 ETH(쮜리히연방이공대학)를 졸업한 박사였다. 반도체업체의 사람들은 장상저우를 전략적 과학자라고 부른다. 그는 중국칩, 대형비행기, 전기자동차를 추진한 인물이다.

 

장상저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0일만에 빠르게 경영진을 재편한다. 원래 화홍집단 CEO였던 왕닝궈(王寧國)으로 하여금 SMIC의 CEO를 맡게 했다. 양스닝(楊士寧)은 SMIC의 COO가 된다.

 

2009년 11월 10일 SMIC는 왕닝궈(David N. N. Wang) 박사를 장루징을 대체하여 총재 겸 수석집행관(CEO)로 선포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 장상저우는 이미 말기암환자였다. 동사장을 맡은 것도 억지로 맡은 것이지만, 회사의 영혼인물을 잃은 SMIC는 압력도 많고, 일도 힘들었다. 어렵게 2년간 업무를 수행한 후 장상저우는 암이 재발하여 세상을 떠난다.

 

4. SMIC의 위기: 권위는 사라지고, 주주들간 균형을 잃는다. 복잡한 회사지배권 다툼이 벌어진다.

 

2011년 6월 27일, SMIC의 동사장 장상저우가 사망한다.

 

SMIC는 처음에 장루징이 케이만아일랜드에 설립한, 국제자본이었다. 미국국적을 지닌 타이완상인인 장루징이 미국국적과 타이완국적을 가진 엔지니어를 데려와서 만든 것이었다. 이는 SMIC에 3종류의 서로 다른 세력이 존재하게 만들었다: 대륙세력, 대만세력, 자본세력

 

장상저우가 살아있을 때는 그가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갔다. 최소한 갈등이 폭발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동사장의 돌연한 사망으로 권위는 사라지고, 회사지배권을 둘러싼 주주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공개적으로 결렬하고, 내분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많은 중견기술자들이 회사를 떠난다. 한때 거래정지까지 당한다.

 

당시 SMIC에서 대만파의 우두머리는 왕닝궈이다. 왕닝궈는 장루징과 마찬가지로 대륙에서 태어나고, 대만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성공했다. 그후 대륙으로 돌아와 반도체산업을 키웠다. 장상저우는 왕닝궈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장루징은 사직하고, 장상저우는 죽고나니, 왕닝궈를 지지하는 원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주주총회에서 SMIC의 내부에서 명망이 높던 왕닝궈가 58%의 반대표로 낙선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대륙파의 대표인 대주주 다탕전신(大唐電信)이 있었다. 다탕은 자신들이 미는 인물인 양스닝이 SMIC의 CEO가 되기를 바랐다. 이를 통해 SMIC의 발전방향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왕닝궈'와 '양스닝' 두 명을 미는 양대파벌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싸워서, 권력투쟁이 공개화되게 된다.

 

다행히 장상저우가 사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서 장원이(張文義)를 동사회에 영입해 놓았다. 장원이는 청화대학 전자학과를 졸업한 장상저우의 동기동창이었다. 일찌기 전자공업부 부부장도 지낸다. 전후로 중국대륙의 제1차 8인치 집성회로칩생산아린을 만들었던 상하이 화홍집단의 동사장도 맡았었다. 장원이는 장상저우와 마찬가지로, 기술배경을 지닌 경영인재였고, 장상저우 전략을 집행하기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2011년 7월 18일, SMIC는 장원이 선생이 SMIC의 동사장, 집행동사 및 대리CEO에 선임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앞으로 CEO의 인선을 물색하겠다고 한다.

 

장원이가 동사장을 맡으면서 그의 경험과 인맥으로 잠시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대 장원이는 한 사람을 추천한다. 외부에서 새로 인물을 골라서 낙하산으로 CEO에 내려보낸 것이다. 이는 SMIC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2011년 8월 5일, SMIC는 츄츠윈(邱慈雲, Chiu Tzu-Yin) 박사를 CEO겸 집행동사로 임명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츄츠윈은 투자자, 주주, 직원들이 모두 만족할만한 CEO였다. 그는 일찌기 장루징을 따라 TSMC를 떠났ㅇ르 뿐아니라, SMIC를 설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력자였다. 그리고 그는 화홍NEC를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집적회로제조기업으로 만들어 냈던 인물이다. 그외에 츄츠윈 본인이 타이완사람이다. 게다가 기술자출신이다. 그리하여 기업내부의 대만파의 인심도 다독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츄츠윈이 CEO에 오르면서 기업의 파벌은 균형을 이루게 되고, 내부투쟁을 감소하여 양호한 발전의 길을 닦게 된다.

 

이번 투쟁의 두 주인공이었던 왕닝궈와 양스닝은 모두 물러나고 끝난다.

 

난국을 안정시킨 후, 장원이는 물러난다. 2015년 3월 6일, SMIC는 저우쯔쉐(周子學) 박사가 SMIC의 동사장, 집행동사를 맡는다고 선언한다.

 

5. 수성대장 츄츠윈, 개척선봉 량멍송(梁孟松)

 

츄츠윈을 얘기하자면 그는 무실파(務實派)이다. 그가 쓴 전략은 이러하다:

 

첫째, 더욱 성숙된 공법을 응용하는제 주력하고, 잠정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제조공겁을 추구하지 않는다.

둘째, 장루징이 창건한 초기의 맹목적인 확장전략을 포기하고, 생산능력을 끌어올려 양호한 수율을 달성한다.

셋째, 중점을 국내시장에 두고, 국내시장에 의존하여 발전한다.

 

그의 지휘하에 3년연속 영리를 이루어내고, 연속 13분기 영리의 좋은 실적도 만들어 낸다.

 

츄츠윈이 취임할 때, SMIC의 시가총액은 118억홍콩달러였는데, 2015년 그가 최고의 CEO상을 받을 때, SMIC의 시가총액은 317억홍콩달러가 되어 있었다.

 

시가총액이 거의 3배나 늘었다. 4년간의 복합증가율은 28%이다. 이는 SMIC는 항상 결손을 보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2017년 전세계의 반도체시장총액은 일약 4,000억달러의 관문을 돌파한다. 2016년에 비하여 20%가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추세였다. 중국이라는 전세계최대의 반도체시장은 정책, 자금, 수요등의 요소로 급속히 발전했고, 이번 고속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해에 SMIC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2017년 5월 10일, SMIC는 공고를 내어 61세의 CEO 츄츠췬이 개인적인 원인으로 사임한다. 그리고 대륙출신의 자오하이쥔(趙海軍)이 신임 CEO가 된다. 자오하이쥔은 SMIC의 원로이다. 일찌기 COO를 역임했다.

 

같은 해 10월, SMIC는 전 TSMC 연구개발처장 량멍송이 SMIC에 입사하여 CEO가 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SMIC는 28나노, 14나노제조공정을 위해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했다.

 

자오하이쥔은 제조를 책임지고, 량멍송은 연구개발을 책임진다. SMIC는 이때부터 복수CEO의 모델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량멍송을 얘기해보자. 량멍송은 기술천재이다. 미국에서 반도체특허기술을 발명한 것만 181건에 이른다. 모두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중요한 핵심기술들이다. 그외에 타이완과 미국 두 곳에서 발표한 기술관련논문만 350편에 이른다. 그는 TSMC 장중머우(張忠謀)의 수하로 14나노를 개발한 강장일 뿐아니라, 삼성이 TSMC를 추월하도록 해준 공신이기도 하다.

 

그때 동사장으로 있던 저우쯔쉐는 '수성'의 SMIC를 수비에서 공격으로 바구어 기술적으로 TSMC에 도전하도록 한다. 그가 앞장서서 량멍송을 입사시키기 위해 나섰고, 1년간의 접촉끝에 량멍송이 비로소 들어왔다.

 

량멍송이 SMIC에 입사한 후 SMIC는 공법상으로 크게 진보한다. 2018년 10월 SMIC는 14나노 FinFET공법의 연구개발에 성공한다. 2019년 다시 12나노 FinFET공법이 곧 채택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제조공법의 발전으로 보면, 28나노에서 14나노가 하나의 핵심관문이다. 업계에는 이를 기준으로 제조능력의 선진성여부를 따진다. 지금 글로벌범위내에서 14나노제조능력을 가진 곳은 TSMC, 삼성, 글로벌파운드리, UMC, SMIC의 5곳에 불과하다. SMIC는 이미 중국대륙 자체칩제조의 가장 선진적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 4월 9일, 화웨이의 기린710A가 세상에 나온다. 이 칩은 화웨이가 설계하고 SMIC가 위탁생산했다. 진정한 중국칩이다.

 

6. 20년의 노력으로 칩을 자주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SMIC의 과거 20년의 힘들었던 성장과정을 보면 4명의 동사장, 5명의 CEO가 교체되었다. 그중 3명의 중요한 인물은 장루징, 츄츠윈, 량멍송이다.

 

장루징은 강산을 만들었고, 츄츠윈은 강산을 안정시켰고, 량멍송은 강산을 키웠다.

 

TrendForce의 데이타에 따르면, 2020년 1분기 전세계 10대 웨이퍼위탁생산공장의 영업수익랭킹에서, TSMC가 1위로 54.1%를, 삼성이 2위로 15.9%를, SMIC는 5위로 4.5%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