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국민당 장군간의 배분(輩分)과 칭호(稱號)

by 중은우시 2019. 1. 13.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어느 영화에서 두율명(杜聿明)과 부작의(傅作義)가 북경에서 만났는데, 부작의가 두율명을 '광형형(光亨兄)'이라고 부르고, 두율명은 부작의를 '의생형(宜生兄)'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서로를 부르는 것은 정말 황당하다; 어떤 드라마에서 장치중(張治中)과 대립(戴笠)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대립이 장치중에게 '문백형(文白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정말 헛소리이다.


중국인들의 칭형도제(稱兄道弟)는 규칙이 있다.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 같은 배분끼리, 선배가 후배에게 사교나 서신에서 칭형도제할 수 있다. 즉 상대방의 자(字)나 호(號)의 뒤에 '형(兄)'을 붙여서 존중을 표시할 수 있다. 이때 쌍방의 연령의 고하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응흠(何應欽)을 '경지형(敬之兄)'이라 부르거나, 백숭희(白崇禧)를 '건생형(健生兄)'이라고 부르는 것등이다. 다만, 후배가 자시보다 윗사람이나 직접 상사에게 이런 칭호를 사용할 수는 없다.


국민정부시기에, 종적으로 구분하다면 국군장군은 대체로 3대로 나눌 수 있다:


제1대: 청나라말기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거나 보정육군속성학당에서 공부한 군인을 위주로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개석(蔣介石), 염석산(閻錫山), 정잠(程潛), 이제심(李濟深), 하응흠, 진의(陳儀)등이다. 이 제1대의 군인은 대부분 신해혁명때 각성에서 무장의거를 일으킨 중견역량이다. 주로 북양군벌 통치시기에 활약했고, 북벌이 완성된 후, 여전히 군사무대에서 활약한 사람들이고, 이미 그 수는 많이 남지 않았다.


제2대, 보정군교(보정육군군관학교) 출신의 군인을 위주로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축동(顧祝同), 장치중, 진성(陳誠), 백숭희, 당생지(唐生智), 여한모(余漢謀), 유문휘(劉文輝), 왕천배(王天培), 부작의, 양애원(楊愛源), 유다전(劉多荃), 진덕순(秦德純)등이다. 이 대의 군인은 국민정부 시기 각 파계(派系)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장군의 수량도 가장 많았다. 1920년대부터 해방때까지 중국군사무대의 주인공들이다.


제3대. 바로 '천자문생(天子門生)이라 불리는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을 위주로 한다. 대표인물은 호종남(胡宗南), 두율명, 황유(黃維), 왕요무(王耀武)등이다. 북벌전쟁부터 시작하여, 점차 방대한 군사정치집단을 형성한다. 다만 분포면적은 비교적 좁았다. 주로 중앙군에 있었다. 소위 '잡패군(雜牌軍)'인 동북군, 서북군, 진수군(晋綏軍)등에는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보정군관학교의 전후 8명 교장 중에서 5명이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교장이하의 교육장, 각 병과 과장, 교관등은 다수가 사관생이 맡았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의 교관, 대장은 절대다수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다.


이런 관계로인하여, 일본사관학교유학생, 보정생, 황포생이 비교적 선명한 3개의 세대를 형성한다. 여기에 당시 여전히 남아 있던 '문생'관념으로 군관학교에서 수업ㅇ르 받았건 말건, 아래 세대는 윗 세대의 앞에서 모두 학생으로 자칭하고, 윗 세대도 이런 심리가 있었다. 다만 다수는 그것을 표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영화 <개국대전>을 보면, 부작의가 이런 대사를 한다: "임표는 나의 만배(晩輩)이다..." 이 대사가 정말 부작의의 입에서 나왔는지 아닌지, 부작의의 사람됨에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얘기한 것은 기실 부작의, 임표는 각각 보정, 황포출신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부작의는 탁주를 수성할 때, 봉군장령 우국한(于國翰)을 '노사(老師, 스승)'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고증한 바에 따르면 사실이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우국한은 일본사관학교 출신으로 부작의보다 세대가 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대차이를 나타내는 장군들간의 칭호는 대체로 3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직접적인 에속관계난 사제관계가 없거나, 혹은 비록 예속관계는 있지만, 직급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경우, 자심자(資深者, 윗사람)가 자천자(資淺者, 아랫사람)에게 '형'이라고 불러서 겸손을 나타낸다. 이것이 아주 정상적인 경우이고 아주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거꾸로 불러서는 안된다. 즉, 자천자가 자심자를 '00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벌시기에 한번은 백숭희의 부인이 남창으로 갔는데, 마침 백숭희가 장개석의 명을 받아 전선으로 갔다. 그래서 장개석은 백숭희의 부인을 초대하는 동시에 백숭희에게 전보를 하나 보낸다. 전문에는 "형수를 만나지 않으면 이는 중정(中正, 장개석의 호)의 잘못이다"라는 겸사(謙辭)가 나온다. 당시 장개석과 백숭희 두 사람의 출신경력과 임직을 보면, 장개석이 백숭희의 부인을 형수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의 사교습관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장개석은 보정협화육군속성학당 출신이고,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다. 그의 배분이나 직위는 모두 보정군관학교출신에 장개석의 참모장을 맡고 있던 백숭희보다 위이다. 그리고 나이로 보더라도 장개석이 백숭희보다 몇 살이 많다. 그래서 이런 겸사를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다만 반대로 만일 백숭희도 장개석을 '개석형'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대단한 불경이다. 당시의 도덕예의로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북경에서 부작의와 두율명이 만났을 때의 두 사람의 칭호는 당시 부작의, 두율명 두 사람의 직위로 보면 비슷하지만, 부작의는 보정출신이고 두율명은 황포출신이다. 두 사람은 그리고 서로 다른 군계(軍係)에 속해 있다. 부작의가 겸손하게 두율명을 '광형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리에 맞는다. 반대로 만일 배분이 부작의보다 낮은 두율명이 부작의를 '의생형'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아래위도 없는 것이고 윤리에 어긋난다.


1948년 이제심과 백숭희간의 서신왕래때도 이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이제심이 백숭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백숭희를 '건생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백숭희가 이제심에게 보내는 회신에서는 이제심을 '임공(任公)'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심의 배분이 백숭희보다 높고, 백숭희의 직접 상급이 아니기 때문에, 예의상, 연령이나 경력이 모두 자신보다 낮은 백숭희에게 이렇게 부르는 것이 그들의 신분에 맞는 것이다. 다만 만일 백숭희가 이제심에게 보내는 회신에서 '임조형(任潮兄)'으로 불렀다면, 마찬가지로 아래위가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 두율명이 부작의를 '의생형'으로 부른 것은 황당무계하다. 실제로 두율명이 북평에서 부작의를 만났을 때, 부작의에게 계속 '의공(宜公)'이라고 존칭을 썼었다.


둘째, 쌍방이 동일한 파계(派系)집단에 속하고, 깊은 상하급관계나 사제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모두 '칭형도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장치중과 대립간에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장자인 장치중이 이렇게 부르게 되면 자신의 신분을 너무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 그리고 아랫사람인 대립이 이렇게 부르면 그것은 분명한 하극상이다.


대립의 직업때문에, 이 황포6기 출신의 인물에 대하여 그의 사후 수십년간 대거 떠들어댔다. 실제로, 대립의 경력이나 지위는 당시 국군장군들 중에서 아주 낮았다. 항전때 한번은 진성이 제6전구사령관으로 있을 때 대립과 얘기한 적이 있다. 1시간여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진성은 앉았다가 일어서서 걸어더나기도 했지만, 대립은 계속 차렷자세로 서서 듣고 대답했다. 그리고 진성에게 말끝마다 "노사'라고 부르고 자신을 '학생'이라고 칭했다. 기실 대립은 진성보다 1살이 많았다. 대립이 황포군관학교에 있을 때, 진성은 일찌감치 교관의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바로 보정과 황포의 이런 배분관계때문에 대립은 진성을 '노사'라고 부른 것이다. 장치중은 보정3기생이다. 그의 경력은 진성(보정6기)보다 위다. 그리고 대립이 황포에서 훈련을 받을 때, 장치중은 마침 황포군관학교 교육장의 신분으로 교무를 주재하여 교장대행이었다.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너무나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대립이 아무리 호랑이간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감히 스승의 앞에서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립이 장치중을 '문공(文公)'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까? 되기는 되지만, 적절하지는 않다. 대립과 장치중의 관계는 두율명과 부작의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백숭희와 이제심의 관계와도 다르다. 그는 그저 장치중의 관직으로 부르거나 '노사'라고 불러야 한다. 그 영화에서 감독이 대립으로 하여금 장치중을 '문백형'으로 부르게 한 것은 정말 황당무계한 것이다.


셋째, 쌍방이 같은 파계에 속하고, 같은 부대에 있는데, 후배가 상사인 경우. 예를 들어 황포생이 보정생의 상급인 경우. 이런 관계도 당시에는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호종남과 배창회(裴昌會), 왕요무와 시중성(施中誠)등이 그러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왕왕 쌍방의 나이도 크게 차이나지 않고, 직급도 크게 차이 나지 않으면, 출신과 직급으로 평수를 이루는 것으로 해서, 많은 경우는 동배(同輩)로 처리해서 서로 '형'이라 불렀다.


'형'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다. 상대방을 '제(弟)'로 칭하는 경우와 '공(公)'으로 칭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는 '형'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제'로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상대방의 경력이 자신보다 명확히 낮을 때이다. 겸손을 표시하거나 부탁을 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흔구(忻口)전투때, 황포학생 이선주(李仙洲)는 부상을 입었다. 장개석이 이선주에게 전보를 보낼 때, "선주오제(仙洲吾弟)...마음 편하게 먹고 부상을 치료하시오. 그리고 매일 부상상황을 나에게 보고해 주시오. 내가 걱정하고 불안하지 않도록."이라는 말이 있다. 장개석은 교장인데, 자신의 학생에게 '나의 동생'이라고 칭한 것은 그가 고심해서 쓴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에 자주 볼 수 있는 사교습관이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결의형제를 맺은 경우에 나이많은 측이 상대방에게 쓰는 것이다. 그게 생일이 하루 빠른 경우라 하더라도. 풍치안(馮治安)이 죽은 후, 하응흠, 백숭희, 진성, 고축동등이 보낸 만련(挽聯)의 서두에는 모두 "앙지오형(仰之吾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유여명(劉汝明), 진덕순, 석경정(石敬亭)등이 보낸 만련에는 서두에 모두 "앙지오제(仰之吾弟)"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유여명, 진덕순, 석경정이 스스로를 높이려 한 것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은 풍치안과 결의형제관계이기 때문이다. 서주회전때, 장자충(張自忠)은 번송보(樊松甫)에게 브랜디 몇 병을 보내면서 이런 말도 써서 보낸다: "철산제호음(哲山弟好飮)....망타소갈(望他少喝)"(철산 동생은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니...바라건데 줄여서 마시기를)이라는 문구가 있다. 장자충, 번송보 두 사람의 출신, 경력, 파계를 살펴보면 장자충이 번송보에게 '철산제'라는 칭호를 쓴 것을 보면, 두 사람은 반드시 결의형제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고증해볼 필요도 없다.


사교에서 '공(公)'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수의 지위가 높고 권력도 있으면서 자심망중(資深望重, 경력이 많고 명망이 높은)한 사람에게 적당하다. 같은 배분의 사람도 사용할 수 있다. 배분이 약간 낮으면서 직접적인 예속관계나 사제관계가 없어도 사용할 수는 있다.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와 다른 점이라면, '공'이라고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 '자'중의 1글자에 '공'자를 붙여서 부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종인(李宗仁)을 덕공(德公)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자가 '덕린(德隣)'이어서이다. 정잠을 '송공(頌公)'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자가 '송운(頌雲)'이어서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고위장군들간의 비공식 장소에서의 사교칭호를 논의한 것이다. 배분의 차이가 너무 크면, 예를 들어, 어느 상장과 어느 위관 경관급의 장교와의 사이에는 위에서 말한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은 일반적인 경우이다. 구체적인 사람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설사 같은 상황이라도, 쌍방간의 관계의 원근, 선악과 개인성격, 수양 그리고 당시의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