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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민국시대 성선회(盛宣懷) 유산분쟁

by 중은우시 2019. 1. 2.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상해 <신보(申報)>에는 1928년 8월 29일 헤드라인 뉴스가 실렸는데, 제목이 <여자유산상속문제>였다. 이 글에서, "성선회의 일곱째 딸 성애이(盛愛頤)가 형제들이 유산분배시 현행법률을 따르지 않고, 남녀평등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변호사를 선임하여 정식으로 법원에 제소하여,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했다."고 썼다.


성선회의 재산은 당시 중국최고부자에 속했다. 그가 사망한 다음 날은 1917년이고, 그의 미망인, 자손 및 친구들이 모여서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서 양사기(楊士琦)와 이경방(李經芳)이 '유산정리소위'를 구성하여, 유산분배전에 구체적인 유산금액을 확정하기로 정했다.


성선회의 유산정리소위는 2년반의 시간을 들여 1920년 1월 13일부터 연속으로 4번의 회의를 소집하여, 최종적으로 성선회의 유산총액을 백은 1,295만냥으로 정한다. 제4차회의에서, 유산분배에 참여하는 대상을 성선회의 5명의 아들(성선회에게는 모두 8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3명은 요절하고, 남은 아들이 5명이었다. 이들을 五房이라고 불렀다)이다.


이들 오방이 유산을 분배하기 전에, 회의에서는 성선회의 미망인과 첩의 부양료 그리고 출가하지 않은 딸의 출각비(出閣費, 혼수)를 결정한다. 그중 성장부인(盛莊夫人)은 70만냥의 부양금은 소이태태(蕭姨太太)는 30만냥의 부양금을 받는다. 일곱째딸 성애이와 여덟째딸 성방이(盛方頤)는 각각 6만냥의 출각비를 받고, 또 다른 손녀뻘의 성육용(盛毓蓉)은 3만냥의 출각비를 받았다.


그리고, 남은 1160만냥의 유산은 성선회의 오방자손이 나누었다. 1917년 성씨친우회의에서 정한 분배방안은 이러하다: "모든 유산을 10등분하여 5는 공(公)으로 돌리고, 나머지 5는 각각 오방에 나누어준다." 50%의 재산이 속하는 산업은 "우재공산(愚齎公産)"이라고 명명한다. 나머지 50%는 10%씩 오방자손들에게 나누어진다.


이 유산의 분배방안에서 '우재공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몇년후 성씨형제자매간의 소송은 바로 이 우재공산의 문제때문에 일어난다.


성선회가 처음 구상한 것은 절반의 재산을 내놓아 '우재공산'을 만들고, 일부분은 사회에 자선사업으로 쓰고 나머지 일부분은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는데 쓰고자 했고, 비율은 40:60으로 생각했다. 즉 우재공산의 수익중 40%는 사회자선사업에 쓰고, 나머지 60%는 성씨가족자손의 독서, 혼인, 사업, 제사, 성묘 및 사당수리등의 용도에 쓰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뚬은 평온한 시대를 만나지 못하다보니, 성선회가 죽은지 11년후인 1927년 북양군벌의 국민정부가 이미 무너지고, 국내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우재공산이라는 탐나는 재산을 모두 눈독들이게 된다. 40%를 자선용도로 쓴다면 아예 공적재산으로 삼는게 어떠냐는 것이다.


성씨자손들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모아서 더 이상 우재공산을 하지 않기로 하고, 남은 60%를 백은 350만냥으로 계산하여 오방이 나누어갖기로 한다.


이렇게 되자 소송이 일어난다.


당시 국민정부는 이미 <부녀운동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거기에는 미혼여자도 유산분배에 참여할 수 있게 규정했다. 당시 나이 27살의 성애이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었다. 그넌 넷째오빠 성은이(盛恩頤)를 찾아가서, 자기에게도 상속권이 있으니, 상속분대로 줄 수 없다면, 10만냥을 출국유학비용으로 분다면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세 오빠는 이 10만냥조차도 그녀에게 주지 않으려 했다. 분노한 성애이는 변호사와의 자문을 거친 후 3명의 오빠와 2명의 조카들을 상해임시법원에 제소한다. 그리고 현행법률에 따라 350만냥의 재산중 그녀의 상속분을 나눠달라고 요구한다. 최종적으로 법원이 심리를 열어 이 350만냥의 재산은 성선회 본인에 속한 것이고, 성애이는 성선회의 딸로서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한다.


판결후, 성은이등은 불복하여 상소를 제기한다. 2심의 심리를 맡은 상해공공조계의 상소법원은 마찬가지로 이 350만냥을 이미 성은이등이 승계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을 유지한다.


일곱째딸 성애이가 비록 승소했지만, 이는 유산분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여덟째딸 성방이(盛方頤)는 앞장서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그는 암중으로 이 소송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언니가 순조롭게 50만냥을 가져가는 것을 보자, 아무런 망설임없이 자신의 소송을 시작한다. 그녀는 소송에서 일곱째 언니와 같은 것을 요구했다. 법원의 재판과정과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여 성방이도 만족스럽게 50만냥을 챙긴다.


성은이등은 계속 졌다. 두번의 소송으로 350만냥의 재산은 250만냥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겨우 미혼의 딸들이 요구한 상속권때문이다. 만일 법률이 도운다면, 이미 결혼한 딸들이 남편의 도움을 받아 끼어들게 될 것이고, 손안의 250만냥조차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얼마 후 국민정부는 <부녀운동결의안>의 기초 위에서 정식으로 <민법>을 선포하는데, 그 안에는 <상속편>이 있었고, 기혼딸의 상속권도 명문으로 규정된다.


성은이 등은 처음에는 비교적 느긋했다. 어쨌든 상속소송은 <민법>이 나오기 전에 끝났으니, 새로운 법이 나와도 옛날사건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미 출가한 다섯째딸 성관이(盛關頤)와 여섯째딸 성정이(盛靜頤)는 그런 것까지 신경쓰지 않고, <민법>이 반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은이등을 상대로 소소을 제기한다. 이유는 그 350만냥을 7등분한 것은 법률에 어긋나고, 마땅히 9등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 2명도 각각 상속지분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성은이등은 승소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소송이 혁명시대에 벌어졌고, 이미 여권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앞의 일곱째 딸과 여덟째딸도 이미 승소했으니, 당연히 시대가 그녀들을 많이 도와주게 된다.


이번에 성관이, 성정이를 도와준 사람으로는 송씨자매들도 있었다. 일찌기 송애령은 성관이의 가졍교사였고, 관계가 남달랐다. 결국 성관이와 성정이도 순조롭게 소송에서 이기고, 원하는대로 재산을 나눠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