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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황태후(皇太后) 왕정군(王政君)의 형제 조카들...

by 중은우시 2019. 1. 5.

글: 의사리(衣賜履)


왕씨집안의 대들보: 황후 왕정군


장안에 정위사(廷尉史, 사법부 총무관에 해당함)가 있는데 이름이 왕금(王禁)이었다. 그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었고.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하나는 술마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첩을 들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네 명의 딸, 여덟명이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딸의 이름이 왕정군이고 그녀는 정처(正妻) 이씨(李氏) 소생이다.


이씨가 왕정군을 회임했을 때, 꿈에 달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왕정군이 점점 자라면서, 꽃처럼 예뻐진다. 그리고 성격도 온유하고, 부도를 지켰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 왕정군은 집안간에 혼약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시집을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죽어버렸다. 나중에 동평왕(東平王)이 왕정군을 집으로 맞이하여 첩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미처 데려가기도 전에 동평왕이 죽어버린다. 왕금은 크게 기이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상사(相士, 관상쟁이)를 불러 왕정군의 관상을 보게 한다. 결론은 "귀하기 그지없다(貴不可言)"는 것이었다. 왕금은 그리하여 딸에게 글읽기와 탄금(彈琴)을 가르친다. 개략 기원전54년, 왕정군은 18살이 되고, 집안에서는 그녀를 궁중으로 들여보내 '가인자(家人子)가 된다. '가인자'는 후궁비빈의 등급이다. 비빈은 15급 21당이 있는데, 가인자는 제15급의 상가인자(上家人子) 혹은 중가인자(中家人子)일 것이다. 결국 직급이 가장 낮은 비빈이다.


여기에 의문은 있다. 일설에 따르면, 한원제(漢元帝) 유석(劉奭)이 비빈의 편제를 증가하였다는데, 왕정군이 입궁했을 때는 아직 한선제(漢宣帝) 유병이(劉病已)때이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원전51년, 태자 유석이 총애하던 사마양제(司馬良娣)가 병사한다. 태자의 정처는 '태자비(太子妃)'이고, 희첩은 2급으로 나뉘는데, 1급은 '양제'이고, 2급은 '유자(孺子)'이다. 죽기 전에 자신은 다른 희첩의 저주로 인하여 죽는다고 말한다. 유석은 아주 비통해 하며, 병으로 쓰러진다. 여러 희첩들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기 위하여, 그녀들과 자는 것을 거절한다. 자지 않으면 아들을 낳을 수가 없다. 황태자가 아들을 낳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황인 유병이조차도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황후에게 후궁의 '가인자' 중에서 몇몇 미녀를 뽑아 유석에게 보내게 한다. 유석이 조정에 와서 배알할 때, 황후는 후궁에서 5명의 미녀를 뽑아서 일렬로 세워놓는다. 그리고 장어(長御, 女官의 명칭)가 유석에게 누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본다. 유석은 원래 누구에게도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황후의 좋은 뜻을 거슬리기도 어려워 아무렇게나 손가락질을 한다. 마침 왕정군이 유석의 곁에 있었고, 입은 옷은 주변이 붉은 색이어서 다른 미인들과는 달리 비교적 눈에 띄었다. 장어는 태자가 가리킨 것이 그녀라고 생각하여, 바로 황후에게 보고한다. 그날 왕정군은 태자궁으로 보내진다. 유석은 왕정군을 보자 갑자기 흥이 일었다. 즉시 그녀를 품는다. 유석의 후궁에 희첩이 십여명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7,8년간 총애를 받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이 왕정군은 1번만에 바로 회임을 해버린다. 그리고 아들을 낳는다. 바로 한성제(漢成帝) 유오(劉驁)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한 가지를 말해준다. 즉, 왕정군이 황후가 되는 것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외에 유병이가 자신의 후궁중에 한 명을 돌라 아들의 비빈으로 주는 것은 한나라의 법도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가인자'라는 직급은 엄격한 의미에서 비빈에 속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저 황제의 총행을 받기 전에는 그저 예비비빈의 지위인 듯하다. 일단 황제의 총행을 받아야 비로소 전정한 비빈이 되는 것이다.


기원전49년 유병이가 병사하고, 유석이 즉위하니 바로 한원제이다. 그리고 유오를 태자로 세운다. 왕정군은 첩여(婕妤)가 되고, 왕금은 양평후(陽平侯)에 봉해진다. 3일후, 왕첩여는 황후(皇后)가 된다.


왕정군은 팔십여세까지 산다. 한선제, 한원제, 한성제, 한애제, 한평제, 유자(孺子), 왕망의 7명 황제를 거친다. 왕씨집안의 명실상부한 대들보이다. 만일 그녀가 그렇게 오래살지 않았더라면, 왕망이 어찌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겠는가?


왕씨집안의 첫번째 대사마(大司馬): 왕봉(王鳳)


기원전42년, 양평후 왕금이 사망한다. 장남 왕봉이 작위를 승계하고, 위위(衛尉, 황성 보안사령관), 시중(侍中 궁중호종)이 된다. 기원전33년, 유석이 사망하고, 태자 유오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한성제이다. 황후 왕정군은 황태후로 승격된다. 유오는 큰외삼촌 왕봉을 대사마, 대장군, 영상서사(領尙書事, 궁정기요를 주관함)로 삼는다.


기원전32년, 정월, 셋째 외삼촌 왕숭(王崇)을 안성후(安成侯)에 봉하고, 식읍 1만호를 내린다(둘째는 기원전32년이전에 이미 사망하였다). 기원전27년 육월, 유오는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외삼촌을 모두 후(侯)로 봉한다. 왕담(王譚)은 평아후(平阿侯), 왕상(王商)은 성도후(成都侯), 왕립(王立)은 홍양후(紅陽侯), 왕근(王根)은 곡양후(曲陽侯), 왕봉시(王逢時)는 고평후(高平侯)에 봉한다. 5명은 모두 같은 나라 작위를 받아서 세상에서는 '오후(五侯)'라고 불렸다. 그외에 그들의 당형제인 왕음(王音)은 궁안에서 시중으로 있었다.


왕봉이 대사마, 대장군으로 십여년간 있었다. 기원전24년, 유오와 경조윤(京兆尹) 왕장(王章)은 몰래 왕봉을 교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왕봉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긴급조치를 취하여, 황태후 왕정군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국면을 뒤집고 왕장을 성공적으로 제거한다. 이 과정에서 당제, 시중인 왕음이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왕봉의 심복이 된다. 기원전23년, 왕음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한다.


당시 왕씨집안의 권세는 갈수록 커졌고, 각군의 태수, 각 봉국의 재상과 각 주의 자사는 모조리 왕씨집안에서 나왔다. 오후는 호화사치로 서로 겨루고, 뇌물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가지고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오후는 인재를 좋아했다. 재능만 있으면, 그들은 돈을 주며 선비를 기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이들은 자연히 보답을 한다. 사방을 다니면서 왕씨집안사람들의 선행을 떠벌린다. 그리하여 왕씨집안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다.


기원전22년 가을, 왕봉의 병이 위중해진다. 유오는 여러번 직접 찾아가서 위문한다. 그의 손을 잡고, 곡을 하며 말했다. 큰외삼촌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나는 넷째외삼촌 왕담이 당신의 자리를 맡도록 하려는데, 어떻습니까?


누가 알았으랴. 왕봉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고두하며 눈물을 머금고 말한다: 왕담등은 비록 나의 친형제이지만, 호화사치하고 방자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사대부 왕음이 조심성있고 무게있으니, 신이 목숨을 담보로 그를 추천하고자 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원래 왕담은 비록 왕봉의 친동생이지만, 사람됨이 오만하고 약간은 큰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상시에 왕봉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러나 당제인 왕음은 왕봉을 도와 위기를 해결해주었을 뿐아니라(왕장의 건), 평소에도 왕봉을 아주 존경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왕봉을 모셨다. 그래서 왕봉은 왕음을 추천한 것이다.


왕씨집안의 두번째 대사마: 왕음(王音)


기원전22년, 팔월 이십사일, 왕봉이 사망한다. 구월 이일, 유오는 어사대부 왕음을 대사마,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한다. 넷째외삼촌 왕담은 "특진(特進)"에 봉해진다. 특진은 삼공(三公, 대사마, 대사도, 대사공)의 바로 다음가는 자리이다.


기원전18년, 다섯째 외삼촌 왕상이 병석에 눕는다. 피서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요양하려 한다. 그래서 유오에게 명광궁(明光宮)을 빌린다. 명광궁은 장안성내에 있고, 계궁(桂宮) 부근이다. 신하가 황제에게 궁전을 빌리다니, 그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만하다. 나중에 왕상은 장안성의 성벽을 뚫어서 풍수(灃水, 섬서성 호현 남쪽 진령의 북록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위하로 들어간다)의 물을 끌어들여, 그의 집 화원의 연못으로 물을 끌어온다. 이렇게 하여 문을 나서지 않고도, 배를 타고 놀 수 있게 된다. 놀이배에는 깃털로 화려하게 덮고, 사방에 장막을 내리고, 배를 젓는 사람은 남방의 민요를 부른다. 실로 남다른 풍광이다. 한번은 유오가 왕상의 집에 들렀는데, 연못이 물이 성벽을 뚫어서 끌어들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 속으로 분노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화를 내지는 않고, 억지로 참는다.


또 한번은 유오가 미복으로 나갔는데, 일곱째 외삼촌 왕근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정원에 토산(土山), 점대(漸臺)가 있는데, 완전히 백호전(白虎殿, 미앙궁 내에 있음)을 본떠서 만들었다. 유오는 대노하여 궁으로 돌아온 후, 오후가 참월(僭越)했다는 죄목으로 거기장군 왕음을 질책한다.


왕상, 왕근은 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그래서 누나인 왕정군을 찾아가서 사정한다. 한명은 곧 자기의 코가 베어질 것이라고 말하고(劓刑), 한명은 자기의 얼굴에 먹으로 새길 것이라고 말한다(黥刑). 유오는 그 말을 들은 후, 더욱 분노하여, 상서를 보내 사례교위(수도위수사령관)와 경조윤(수도특별시장)을 질책한다. 왕상등이 사치, 참월하는 여러가지 불궤행위(不軌行爲)가 있고, 심지어 나쁜 자를 숨겨주는데도, 모두 아부만 하고 고발하지 않고, 그들을 법대로 처벌하지 않았다고 질책한 것이다. 사례교위와 경조윤 두 사람은 금궁의 문밖에서 고두(叩頭)하며 죄를 청한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들을 잡아넣을 수 있었단 말인가?


유오는 왕음에게 그들 몇몇 외삼촌을 처벌해야겠으니, 그들로 하여금 왕음이 있는 곳으로 와서 처리를 기다리도록 명한다. 그날 유오는 다시 상서에게 명하여 한문제 유항(劉恒)이 외삼촌 박소(薄昭)를 주살한 사건기록을 가져오게 한다.


기원전170년, 한문제 유항의 외삼촌인 박소는 정부사절(使節)을 살해한다. 유항은 차마 처결하지 못하고, 공경(公卿)을 보내 그와 함께 술을 마시게 하며, 자결할 것을 암시한다. 박소는 자결하려 하지 않았다. 유항은 다시 문무백관을 보내어 통곡하며 조문하게 한다. 박소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살하고 만다. 유오는 이 사건기록을 내밀며 외삼촌들에게 경고한다. 황제가 외삼촌을 죽이는 것이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왕음은 풀을 깔고 앉아서 죄를 청했다. 고대에는 죄수를 참수할 때 피가 사방에 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바닥에 풀을 깔았다. 왕상, 왕립, 왕근도 모두 등에 칼과 도끼(참형용) 그리고 침판(砧板, 고기를 썰때 쓰는 나무토막)을 지고 죄를 청했다.


이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서 이 사건은 무마된다. 유오는 그저 그들을 겁주고자 했던 것이고,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왕음은 비록 황친(皇親)이기는 하지만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당구(堂舅, 오촌외숙)일 뿐이고, 그들 몇몇은 친구(親舅, 친외숙)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조심하면서 직무와 본분에 충실했다. 기원전20년에 이르러, 유오는 왕음을 안양후(安陽侯)에 봉하고, 식읍도 오후와 동등하게 내린다. 모두 3천호였다.


한무제 유철때부터 시작하여 재상은 후로 봉하는 것이 이미 관례로 되었다. 그러나 대사마는 유사한 규정이 없었다. 비록 이때 대사마의 권력은 일찌감치 재상을 능가했지만, 왕음은 후작이 아니었다. 이해에 비로소 후에 봉해진다.


왕정군은 둘째동생 왕만(王曼)이 일찍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형제8명중에서 오직 그만이 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왕만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바로 왕망(王莽)이다. 그는 왕씨집안의 다른 형제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왕정군은 수시로 이 이야기를 꺼낸다. 넷째외삼촌 왕담, 다섯째 외삼촌 왕상과 많은 조정의 관리들도 왕망을 칭찬한다. 기원전16년, 유오는 명을 내려 왕만을 정릉후(定陵侯)로 추존한다. 왕씨 친척들 중에서 모두 10명의 후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바로 왕정군의 7명 형제, 당제 유음, 조카 왕망, 그리고 외조카 순우장(淳于長)을 합쳐서 모두 10명이 된다. 이 작위들은 모두 황제가 봉한 것이고, 세습된 것은 포함하지 않았다. 즉, 왕씨집안에 후작의 편제는 10개라는 것이다. 후작이 된 사람은 이 숫자를 훨씬 넘는다.


왕씨집안의 세번째 대사마: 왕상(王商)


기원전17년, 넷째외삼촌 왕담이 사망하고, 유오는 왕담을 대사마에 임명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약간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다른 외삼촌을 임명하여 이를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다섯째 외삼촌 왕상을 특진으로 승진시키고, 성문의 위병을 통할하게 한다. 거기장군 왕음과 마찬가지로, 막부(幕府, 장군의 행정기구)를 설치할 수 있게 해주고, 참모인원을 임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원전15년, 대사마, 거기장군 왕음이 사망한다. 유오는 다섯째 외삼촌 왕상을 대사마, 위장군(衛將軍, 수도위수사령관)에 임명하고, 여섯째 외삼촌 왕립으로 하여금 왕상의 자리를 이어받아 '특진'이 되게 하여 성문위병을 통할케 한다.


기원전13년, 십일월, 왕상이 병으로 면직된다. 기원전12년 이월, 왕상이 다시 나와 여전히 대사마, 위장군이 된다. 십이월 이일, 유오는 왕상을 대장군에 임명한다. 십이월 십팔일, 왕상이 사망한다.


왕씨집안의 네번째 대사마: 왕근(王根)


다섯째 외삼촌 왕상이 죽고, 순서에 따라, 당연히 여섯째 왕립이 대사마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약간의 상황이 발생한다.


이전에 왕립은 그의 문객을 보내어 남군(南郡, 호북성 강릉형)태수 이상(李尙)을 통해 소부(少府, 궁정조달부서)에서 백성에게 개방한 경작지 수천경(頃)을 침점하고, 다시 고가로 정부에 팔았다. 그리하여 1억이상의 가격을 받는다. 이 일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승상사직(丞相司直, 재상부 집행관) 손보(孫寶)가 상소를 올려 고발한다. 그러자 유오는 진노하여, 왕립이 대사마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일곱째 외삼촌, 광록훈(光祿勛, 궁정금위사령관), 곡양후 왕근을 기용한다.


기원전12년, 십이월 이십칠일, 왕근을 대사마,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한다.


에피소드: 관료사회의 한 늙은 여우 이야기


기원전20년, 재상 장우(張禹)가 연로하고 병이 많아 직무를 사직한다. 유오는 그에게 후작의 신분으로(안창후), 매월 1일, 15일에 조회에 참가하고, '특진'의 자리를 준다(특진은 조회때 삼공의 아래이나 후작보다는 위이다). 접견예절은 재상의 예절과 같이 하고, 그에게 내린 하사품이 전후로 수천만에 이르렀다.


기원전12년, 장우는 유오에게 평릉(平陵, 한소제 유불릉의 능묘, 섬서성 함양시 서평릉향 남쪽)의 비우정(肥牛亭) 토지를 자기에게 하사해달라고 청한다. 왕근은 반대한다. 이 땅은 평릉묘원 침묘 부근이므로, 유의관(遊衣冠, 매월초하루, 고조의 의관을 능묘의 궁전에서 고제묘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므로 다른 땅으로 바꾸어 하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오는 듣지 않고, 그 땅을 장우에게 하사한다. 왕근은 이로 인하여 장우를 미워하게 된다. 여러번 유오의 앞에서 장우를 비방했다. 다만, 유오는 장우를 더욱 존경하고 후대했다. 장우가 매번 병에 걸리면, 유오가 그의 음식휴식상황까지 물어본다. 심지어 친히 장우의 집으로 가서 문병하기도 했다. 장우의 막내아들에게 관직이 없자, 장우는 유오의 앞에서 자주 막내아들을 쳐다보았다. 유오는 장우의 침상앞에서 그를 황문랑(금궁 고문관), 급사중(어전 감독관)에 임명한다. 장우는 비록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유오는 반드시 그와 상의한 후에 결정했다.


당시 조정의 많은 사람들은 상소를 올려, 재이(災異)가 출현한 것은 모두 왕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오는 그 말이 맞다고 여겼으나 자신이 없어, 장우의 집으로 찾아가서 직접 물어본다. 장우는 자신의 나이가 많이 들었으나, 자식들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왕근과 불화하면 일단 자기가 죽은 후에 가족들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이다. 그래서 유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춘추>에 기재된 일식, 지진은 혹은 제후들이 서로 공격하여 죽이거나 혹은 이적이 중국을 침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재이를 내리는 것은 의미가 아주 심원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도 천명을 잘 얘기하지 않았고, 한번도 신괴(神怪)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천명, 천도는 자공같은 사람조차 공자가 얘기하는 것을 듣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견식이 얕고 비루한 유생들이 하는 말은 전혀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치를 바르게 하며, 좋은 일을 많이 하십시오. 그래야 하늘의 경고에 대응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가의 교의의 본뜻에도 부합합니다. 함부로 말하는 자들은 믿지도 말고 기용하지도 마십히오. 모든 것은 유학경전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유오는 장우를 계속 믿고 신임했다. 그래서 더 이상 왕씨를 의심하지 않는다. 금방 장우의 말은 왕근과 다른 왕씨자제들의 귀에도 들어간다. 그들은 장우의 태도에 아주 만족해 했고, 장씨왕씨 두 집안은 친밀한 우의를 형성한다.


왕씨집안의 다섯째 대사마: 왕망(王莽)


기원전8년, 왕근이 보정한지 5년이 되었고, 은퇴를 청한다. 유오는 그에게 오천호를 추가하고 4필마가 끄는 수레, 황금 오백근를 하사하고 면직시킨다. 그전에 정릉후 순우장은 외척의 신분으로 그리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위위, 시중을 맡았다. 순서대로라면 그가 보정(원래는 여덟째 외삼촌 왕봉시가 맡아야겠지만, 그는 명이 짧아서 이때 이미 죽었다)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도후 왕망이 돌연 대의멸친하며, 순우장이 일찌기 홍양후 왕립과 결탁하여 벌인 범죄를 고발한다. 순우장은 하옥된 후 죽는다. 왕립은 봉지로 보내어진다. 이 사건은 나중에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래서, 곡양후 왕근은 왕망을 추천하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한다. 유오는 왕망이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명성이 좋았으므로 왕망을 시중, 기도위, 광록대부에서 대사마로 승진시킨다.


왕망은 그 해에 38살이었다. 대권을 장악하고 꿈을 꾼다. 그는 구세계를 타파하고 신세계를 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