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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명말청흥: 제3자의 시각으로 본

명망청흥(明亡淸興) (3): 견딜 수 없는 아픔

by 중은우시 2018. 8. 15.

당시 자본주의가 발전한 외국인이 보기에, 명나라는 아주 특이한 나라였다.


한편으로 대명제국은 돈이 모자라지는 않는 듯했다. 황인우(黃仁宇)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체 명나라276년동안의 동전주조수량은 북송에서 2년에 주조했던 수량이다. 그러므로 명나라경제는 쇠락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그가 못본 것이 있다. 명나라 특히 명나라말기에는 제국의 주요 유통화폐가 동전 외에 백은이 있었다. 당시 세계의 귀금속 특히 백은의 상당부분은 중국에 축적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 중국의 백은생산량은 한계가 있다. 관청 은광에서의 연간생산량은 겨우 6000킬로그램(1킬로그램은 26.6냥)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연간수입은 10만킬로그램가량이다. 이렇게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백은은 해외에서 왔다. 특히 백은의 주요산지인 미주에서 왔다.


통계에 따르면, 스페인이 신대륙식민지에서 생산하는 백은의 약 20%는 Galleon(스페인대범선, 돛대는 3개 혹은 4개이며, 적재량이 크고 상선과 전선을 겸용으로 했다)으로 직접 태평양을 지나 자신의 아시아식민지인 마닐라로 보냈고, 다시 중국으로 운송했다. 그리고 일부분 미주백은은 중앙아시아무역을 통하여 유라시아초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에 들어온다.


서방의 계산에 따르면, 1597년 한 해에, 스페인이 미주에서 해상운송으로 중국에 보낸 백은은 약 35만킬로그램이었다. 이것은 명나라에서 반세기동안 생산하는 백은의 생산량보다 많다. 확실히, 미주의 주인은 표면적으로는 위풍당당했지만, 기실 머나먼 중국을 위해서 일한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모든 것은 자본주의때문이다. 이 제도에서, 상품과 서비스는 화폐를 통하여 자유롭게 시장에서 유통된다. 비록 스페인은 당시에 전형적인 자본주의국가가 아니긴 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소비재 특히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역을 통해서 얻었다. 약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하여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에서 17세기전기까지 스페인의 세빌리아는 서방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중 하나였다.


서방의 제조상품에 비하여 당시 중국의 상품은 정교했다. 그리고 고부가가치였다. 특히 자기, 비단과 차가 그러하다. 하나같이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이것을 가지려면 화폐를 주고 사야 했다. 그리고 당시 동서방에서 통용된 화폐는 바로 금,은과 같은 귀금속이다.


나중에, 백은이 무저동처럼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자, 방법이 없던 스페인인들은 조급해져서 딴 생각을 하게 된다. 16세기중엽, 마음이 조급해진 관리, 상인들은 국왕 필리페2세에게 상소를 올려 중국을 침략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중에는 심지어 필리핀총독 산드등 군정요인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해군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하고, 육군은 네덜란드전쟁에 빠져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일생동안 3번이나 파산을 선언한 펠리페2세는 더 이상 동방에서까지 전쟁을 벌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은 흐지부지된다.


후인들은 미주 신대륙에서 나온 귀금속중 절반가량이 위의 루트를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고 본다. 게다가 매년 또 하나의 공헌도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오는 15만 내지 18.7만킬로그램의 백은이다. 일본인들은 '당화(唐貨)'를 좋아했고, 당국에서는 수입초과를 막기 위하여, 부득이 중국상품에 대하여만 전문적으로 고액의 '당물세(唐物稅)'를 거두었다. 17세기 전반의 30여년간 매년 중국에 유입된 백은총퍙은 약 25만 내지 26.6만킬로그램에 이른다.


다른 한편으로 돈은 영원히 쓰는데 부족하다.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썼다: "세금, 관세와 기타 공물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에 따르면 1년에 1억5천만(마테오 리치가 어떤 화폐단위를 사용했는지는 명확치한다. 당시의 이탈리아 각지의 화폐종류는 다양하다. 그러나 앞뒤의 문장을 고려하면 1억5천만은 분명히 아주 큰 금액임에 틀림없다)을 넘고, 그 돈은 황제의 금고에 들어가지 않는다. 황제도 이 수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통용화폐인 은자가 국고에 들어가고, 쌀로 납부한 수입은 정부의 창고에 보관된다. 민용과 군용비용과 정부각부서의 지출은 모두 이 국고에서 나온다. 그리고 국가예산이 많아서 유럽인의 상상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믿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떤 때는 이렇게 방대한 수입으로도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새로 세금을 거두어서 예산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세수는 왕왕 그저 장부상일 뿐이다 .진정으로 얼마를 거두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를 들어 1618년, 비록 변방이 위급하여 천하에서 세금을 추가로 거두었지만, 제국의 재정부 즉 호부는 요행히도 거두어야할 세금 210만냥의 70%를 거둔다. 이것은 당시로서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세무관리들이 하늘과 땅에 감사해야할 정도로.


제국의 일상적인 운영비용을 유지하고, 황실의 호화사치스러운 소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각급관리들의 부정수입을 위한 것 이외에 또 하나의 큰 지출은 바로 장성밖의 기마민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쓰는 군사비이다. '만력삼대정'의 군비만도 1,200만냥에 달한다. 당시 장거정이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모았던 돈을 모조리 써버린 것이다. 제국의 북부 변방군대의 매년 군비지출도 800만냥이상이다. 이것은 겨우 일상적인 지출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국정부는 돌발적인 전쟁에 필요한 예산은 준비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북방과의 전쟁은 결코 적지 않았다. 몽골인의 권토중래를 막기 위하여, 주원장때부터 시작하여, 황제들은 여러번 대규모 원정을 조직한다. "그는 달단인을 중국에서 축출하는데 만족하지 않았고, 달단의 본토까지 추격해서 여러번 그들을 격패시키고, 그들의 토지를 파괴한다. 마침내 동달단인은 절망에 빠지고 마침내 무기를 내려놓고 조공을 바치며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기실, 명군의 이런 원정은 선교사들이 말한 것처럼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그중에는 1388년 포어아해(捕魚兒海)의 대승도 있다. 당시 명군의 장수 남옥(藍玉)이 몽골군을 대파하고 북원군 8만을 포로로 잡는다. 북원의 익종황제(천원제)는 패전후에 부하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원"이라는 이 한족식 국호는 이후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한 1449년의 토목보에서와 같은 대패도 있다. 당시 명영종은 50만의 부대가 모조리 전멸당했고, 황제 본인마저 포로로 잡혀간다. 이 전투는 북경이 포위되는 장면까지 초래했고, 제국이 하마터면 무너질 뻔했다. 다만 어찌되었건, 달단인이 중국에서 쫓겨났고,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서방 선교사들은 확실히 잘 모르고 있었다. 당시 명군과 격렬하게 싸운 주체는 몽골인이지 여진인 소위 "동달단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둘을 혼동해서 말하고 있다: "이번 전쟁의 폭풍은 주로 여진지구의 달단인에게 일어났고, 달단인이 중국에서 축출된 후 여진으로 되돌아갔다."


사료를 보면, 최소한 명나라중기까지, 명나라와 중국동북의 여진인은 평화롭게 지냈다. 현지의 여진추장들은 번속의 신분으로 제국에 조공을 바쳤고, 조정에서 봉상을 받아갔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한 무역특허권을 받았다.


비록 몽골과 여진을 혼동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세계에서 온 선교사들은 절대로 여진과 중원의 무역상황을 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에 대하여도 자세히 언급한다: "나중에 거기의 달단인은 혹은 신복하거나 혹은 친구로서 매년 요동성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와 현지 주민과 교역을 한다: 달단인들은 빈곤하므로, 중국과 다시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이 휴대한 각종 물품중 중국인이 중시하는 것은 인삼이라고 부르는 뿌리가 있고, 해리피(海狸皮), 초피(貂皮), 흑초피(黑貂皮)등 귀중한 가죽이 있고, 중국인들이 그물을 짜는데 쓰는 마종(馬鬃)이 있는데, 남자들이 머리를 묶는데 쓰고, 가장 아름답게 단장한 모습을 만든다." 


사실상, 그때 누르하치가 북경으로 선물을 주러 온 목적은 바로 무역허가증과 수출입전매권을 얻기 위함이다. 즉 소위 '칙서'이다. 후인들은 이런 칙서만 있어야, 허가증이 규정한 범위내에서 누르하치같은 추장들은 동북에서 인삼, 초피, 동주(東珠)등 귀한 물건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물품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칙서를 받아서 특권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부족민들을 통치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해서, 특허무역권에 대한 통제는 명제국이 여진인의 경제명맥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달단인. 오해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달단인은 동몽골부락의 후손들을 얘기하는게 아니다. 또한 볼가강변이나 크림반도의 그 금발벽안의 타타르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가리키는 것은 그 시대 유럽인들이 '돼지꼬리'를 남겨둔 중국인에 대하여 부르는 칭호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유럽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Tatar라는 칭호는 몽골인들이 이끌고 간, 우랄산자락에서 모스크바성까지의 광활한 지역을 다니던 투르크인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이 단어로 퉁구스귀족과 무사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아무르강남쪽에서 북미얀마사이의 광활한 제국의 모든 신하들을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온화하고 살기좋은 도시에서 자란 현대인에게 "달단인"이라는 칭호의 배후에는  잘 길들여지지 않고, 광활한 땅에서 말들과 함께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잃어버린 양강(陽剛)의 기운을 지닌 야성을 대표한다. 이런 초원정서를 지닌 낭만주의사조는 아마도 닭잡을 힘조차 없는 작가들이 섬세한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겨서 거친 문자로 써낸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칭호가 대표하는 것은 이미 땅 속에 묻힌 선조들이 가졌던 유일한 정신을 잊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야만


사전에 얘기할 것이 있다. 이것은 절대로 폄하하는 뜻이 아니다. 의미는 간단명료하다. 유럽백인들이 쓸 때는 동방에서온 침략자이다. 중세기의 유럽인들에게, 자신들과 다른 사람과 일은 모두 두려워하고 사악하다고 믿었다. 구릿빛 피부를 지닌 킵차크인과 사라센인들이 그러했다. 완전히 비백인의 용모를 지닌 몽골인이 그러했다. 생각해보라. 처음 이런 야만인군대를 본 중서유럽의 기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얼마나 지옥같은 광경이었을까? 이들 몸이 왜소한 몽골인들은 반인반야수의 외모를 지니고 있고, 피부는 병든 것같은 납황색이다. 눈썹과 수염은 많지도 않으면서 새카맣다. 얼굴과 이마에는 오랫동안 비바람을 맞고 전쟁을 거치면서 얻은 골이 있다. 그들의 무기는 이름도 모르는 독약을 바른 화살과 우각궁이다. 모자를 쓴 머리의 뒷쪽에는 머리카락이 각양각색으로 복잡하게 묶여져 있다. 그들과 비슷하게 왜소한 마필은 날카롭게 울부집고, 옅은 색의 모닥불은 그들의 영지 주위에 연기를 피워내서, 모래먼지와 함께 사람과 말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게 만든다. 이들 이역에서 온 야만인은 이렇게 추악하고 두렵다. 그들은 그래서 마귀의 대명사가 된다. 생각해보라 잘 생긴 레골라스가 큰 늑대를 탄 짐승같은 자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유럽의 왕공과 기사들의 당시 느낌은 아마도 그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만일 몽골서정군의 4천명의 흉맹하기 그지없는 반인반수같은 자들은 남러시아초원에서 킵차크인들과 힘을 합쳐서 마치 밀물처럼 유럽으로 밀려들어간다. 한차례 도 한차례 유럽의 동부전선으로 밀고 들어갈 때, 이들 야만인들이 가는 곳의 유럽농업문명은 파괴되어 버린다. 이 물결은 헝가라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사들에 의하여 저지될 때까지 이어진다. 부다페스트의 성벽을 무너뜨리지 못하면서. 설사 몽골인들의 물결은 테무진의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그들이 건립한 킵차크한국은 남아있었다. 이들 킵차크인들은 일찌기 분산된 부락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영장에서 공동으로 칸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 동류럽의 도륙하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한다. 15세기에 이르러, 주치의 칸국은 일찌기 와해되었다. 그러나 칸국의 폐허엔ㄴ 타타르인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고, 동유럽각국은 서유럽이 분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이들 야만인들과 게속하여 밀고 당기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유럽인들이 중국인에 대하여 이렇게 달단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깊은 원한과 미움과 멸시를 담고 있는지. 이는 스스로 문명대륙이라고 자처하는 종족이 다른 대륙을 배척하는 것이고, 오래된 노제국의 잔존가치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유럽인의 눈에 중국이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 스페인 총독이 국왕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중국인의 항해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해상역량이 강대하다고 하였으며,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명나라군관들과 정부가 얼마나 서방의 군사기술을 취득하기를 원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귀족들은 중국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그들에 있어서 중국은 서로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문명적인 참신한 세계였던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비록 듣기에는 민족적 편견같지만 그러나 사실이다. 퉁구스 빙하지대에서 남하한 야만인이 가장 주요한 화근이다. 영국인은 여러번 중국의 '달단화'가 통구스인이 산해관을 들어온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언급했다. 그후의 반세기동안 모든 것은 몽골인의 남하를 재연하는 것이다. 심지어 더욱 나빴다. 일찌기 자신있던 중국인은 철저히 붕괴된다. 그들의 황제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남은 사람들은 모조리 한 부족우두머리의 노예로 전락한다. 젊은 귀족들은 말을 타고 광활한 화북평원에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달려서 이 토지와 그 위의 인민을 영구족으로 점유한다. 3,4명의 무사로 이루어진 소규모부대는 수백명의 피난가던 중국인을 붙잡은 후 그들을 노예로 삼는다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밧줄도 필요없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은 말을 잘 들었다. 스스로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옆에 있는 사람의 두 손을 묶고, 자신은 다른 동료가 자신의 손을 묶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비록 피난가려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하여 생존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많은 퉁구스귀족은 사람고기를 해동청에게 먹이고, 여자들을 마음대로 유린하는 것으로 악명높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반항하지 않고 줄을 서서 앞 사람의 허리띠에 묶여 있다. 그 후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새 주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새 주인의 보내는 곳으로 간다.


이것이 바로 1644년 이후 중국인의 운명이다. 도르곤친왕은 모든 중국인들에게 건주여진과 똑같이 체두변발을 하도록 명령한다. 머리꼭대기에 두 줄의 금전서미변(金錢鼠尾辮)을 땋은 후, 중국인은 달단인이 붙여준 칭호로 불린다. 유럽인이 보기에, 이 일찌기 부유했던 제국은 점점 허약해지고 노후되어 갔다. 영국인이 건륭연간에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보녚적으로 빈곤하고 기아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곳곳에 거지가 있고, 유럽보다 1세기는 낙후된 터키화승총을 장착하고 있는 제국이 육군과 무인조종의 낡은 삼판선으로 구서오딘 제국의 함대를 볼 수 있었다. 이 둘은 대부분 명제국이 말기에 농민반란군과 왜구를 상대하기 위하여 만든 것들이다. 선교사들과 탐험가들이 칭송하던 중국인의 우량한 품성과 우수한 제도는 일찌감치 만주인들이 강제한 부족노예제도와 야만적인 수탈로 사라졌다. "예친왕"으로 불리는 도르곤은 이 점을 명확히 했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문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모든 중국인들을 퉁구스인과 같이 야만인이 되도록 만들겠다. 그리하여 엄격한 진압조치가 보편적으로 시행된다. 중국인의 문화,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은 모두 심각하게 제약받는다. 이런 것들을 발전시킬 권리가 있는 퉁구스귀족들은 그저 정기적으로 황실에서 하사받는 돈과 재물에 만족했고, 궁중의 권모술수와 중국인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골몰했고, 세계의 조류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사실상, 이러한 극단적 보수통치정책의 결과는 일찌감치 강희연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청나라가 2만명의 병사를 동원하였고, 이들의 대부분은 아무르강남부에서 뽑아왔기 때문에, 아직는 조상의 용맹하고 잘 싸우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야만인들인데도, 유럽보다 백여년이나 낙후된 목제소릉보(小棱堡)와 그 안의 3백여명의 러시아 깡패들을 어찌하지 못했다. 거기의 한 전투에서, 달단인은 화포로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코사크기병의 맹렬한 반격에 1천여 사병, 3천여필의 전마를 잃는다. 그 시대에 달단인의 강희제(그는 동시에 테무진 동생의 직계후손이다. 그러나 그가 잔인하고 일관되게 몽골인의 인구를 감소시키는 정책을 집행하는데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그래도 국의 방대한 인적자원으로 러시아인을 물리쳤지만, 그의 자손이 영국의 황실해군과 해병대를 맞았을 때 아무리 용맹한 달단인도 열강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강녕(江寧 남경)의 한 퉁구스무사들은 그들의 3백여년전의 조상들과 거의 동일한 진형으로 용맹하게 돌진했지만 참혹한 사상자만을 남긴다. 그들의 공격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영국군은 이들 고대의 화석같은 부대에 거의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는다. 전투의 결말은 달단인의 부도통 해령(海齡)이 자신과 수하의 가족들을 모아놓고 집단으로 불을 붙여 자살한다. 그렇게 영국인은 손쉽게 이 도시를 점령한다. 달단인의 통치와 보호를 받고 있던 중국인들은 무사들의 장열한 희생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기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을 구경하는 듯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축하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해령이 이전에 무고한 중국인들을 붙잡아서 함부로 죽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년후의 팔리교(八里橋) 옆에서 키가 큰 몽골기사가 영국군의 밀집된 포탄을 맞으며 승왕(僧王)의 기치를 흔들고 있었다. 결국 세계전쟁역사상 마지막 몽골기병이 백인의 소총에 철저히 매장되는 것으로 끝난다.


아편전쟁으로 유럽인은 중국인의 우매를 목격한다. 태평천국전쟁의 참혹함에서 그들은 중국인의 야만을 목격한다. "이들 중국사병은 비록 화총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여전히 칼창을 들고 육박전을 벌여서 전투를 끝낸다. 만일 승리를 거두게 되면 패전한 병사들이 수급을 베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야 승리의 과실이 더욱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는 유럽장교가 본 중화제국 최후의 내전에 대한 평가이다. 설사 일찌기 원명원을 파괴하고, 나중에 수단폭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던 고든 장군도 이홍장이 이미 투항한 태평군사병을 도살하는데에는 분노를 금치 못한다. 비록 우리는 유럽인의 소위 인도주의와 기사도정신을 악의에 충만한 가식이라고 비난하지만, 최소한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항복한 적군을 무참히 도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물며 청군이 도살하는 것은 바로 동포들이다. 달단통치자의 무능과 중국인의 쇠약을 목격한 열강은 연이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이 늙은 동방제국의 마지막이 된다: 백인 맹수들에게 물려서 온몸이 상처로 가득한 병든 뱀처럼, 그들의 인민은 유럽인들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종족의 이름이 붙여지며 모욕과 구타를 당하게 된다. 퉁구스인의 우두머리들은 편안히 자신의 황궁에 앉아서 전체 제국에 명령을 니게 되고, 전체 제국의 신민은 우매한 노예로 전락한다. 이런 변화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청나라가 멸망하고, 몽골이 분열할 때도 어떤 중국 문인이나 관리는 이 일찌감치 몰락한 야만인정권을 위하여 자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달단인의 인구는 신속히 증가했다. 그들은 금방 스스로 맹(盟)이라 칭하는 7개 부를 형성하고, 서로 공격한다. 결국 1550년 하나의 나라로 병합되고, 여진국이라 칭한다."


1550년은 가정29년으로, 경술년이다. 당시 여진인은 여전히 분열상태였다. 아직은 '하나의 나라로 병합되지' 않았다. 여진각부를 통일한 누르하치가 9년후에야 태어난다. 그리고 여진각부는 스스로를 '맹'이라 칭하지도 않는다. 이 선교사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인지 모르겠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선교사는 아마도 몽골인의 일을 여진인의 것으로 혼동한 것같다. 16세기전기에 20녀년의 전투를 거쳐 쿠빌라이의 후손인 바투몽크(중원역사서에서는 '소왕자(小王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가 몽골본토를 다시 통일하고, "다얜칸(達延汗)"으로 불린다. "다얜(達延)"은 "대원(大元)"과 발음이 같다. 그 후 다얜칸은 몽골고원을 6개의 만호로 나누고, 그의 7명 아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한다. 이들 만호는 나중에 점점 몽골의 행정구획인 '맹"으로 발전한다. 다만 이 일은 1550년보다 40여년전에 발생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말한 시기와 맞지 않는다.


1550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저명한 "경술지변"이다. 몽골 투무터부 우두머리인 안다칸(俺答汗)(나중에 아르탄칸으로 불리며 북원의 중흥군주인 다얜칸의 손자이다)이 고북구를 통하여 장성을 뚫고 들어와 무인지경으로 제국의 동대문 통주까지 진입한다. 천자의 발아래까지 쳐들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북경주변은 인심이 흉흉해진다. 명나라조정은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고, 몽골병은 북경주변을 8일간 약탈하고 만족하여 돌아간다. 이 일로 병부상서 정여기(丁汝夔)는 속죄양이 되어 주살당한다. 진정한 책임자인 재상 엄숭(嚴嵩)은 무사히 지나간다.


"서달단인"에 대하여, 선교사들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중국은 선물을 준다는 명목으로 서달단인들에게 공품을 바치고, 이를 통해 전쟁을 피한다. 중국인은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영광스릅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들의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의 국가는 다른 방법으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한다." 확실히 이들이 가리키는 것은 몽골인이다.


다만 기실, "중국이 선물을 준다는 명목으로 서 달단인들에게 공품을 바치고, 이를 통해 전쟁을 피한다"는 것은 중국의 사정에 대하여 겉모습만 본 외국인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대외정책에서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던 송나라 혹은 두 번의 아편전쟁후 말잘듣는 손자같던 대청과는 달리 명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초 얜다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조정은 어쩔 수 없이 얜다한이 요청한 '조공호시'요구를 받아들이지만, 바로 마음을 바꾸어 선부, 대동등 무역시장을 폐쇄하고,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된다. "조공"을 요구한 것은 실패자인 대명이 아니라, 승리자인 안다칸이었다. 조공의 목적은 그저 '호시(互市)'를 위한 것이다. 무기, 장식품등 소수의 물건을 제작하는 외에 초원민족은 수공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원도 결핍되어 있고, 기술도 낙후되어 있다. 대량의 일상용품은 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무역을 통하여 말과 교환하거나, 칼을 들고 내려가서 빼앗아 오는 것이다. 전자가 소위 "호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것처럼, 소수민족과의 무역은 명제국에게 있어서 단순한 경제수단만이 아니라, 중요한 정치수단이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명나라의 경제봉쇠로 얜다한이 다스리는 몽골인은 철기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어떤 가정에서는 음식을 끓여먹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밥을 짓는데 쓸 솥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보면, 무역이 서로에게 이점이 있다. 중원은 물자가 풍부하지만, 전투용의 전마는 부족하다. 쌍방은 서로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얜다한의 호시요구는 명제국상하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그저 입만 살아서 떠드는 인물이 아니라, 세상에서 공인된 강골사나이 양계성(楊繼盛)이다. 나중에 그는 간상 엄숭을 탄핵하다가 무고를 받아 하옥된다. 그는 맞아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을 때, 이 사나이는 스스로 자기를 깨서 썩은 살을 도려내서 뼈가 드러난다.


이후의 달단황제도 양계성에게는 탄복한다. 나중에 순치제는 이렇게 말한다: "짐니 명나라 270년을 보니, 충간의 신하들이 간혹 있었다.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황제에게 직언했던 사람으로 양계성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참혹하게 화를 입고 살신성인한 사람도 역시 양계성 만한 사람이 없었다." 확실히 그는 명예를 추구하는 소인이 아니었다. 그가 호시를 격렬하게 반대한 것에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양계성은 이렇게 생각했다. 달단인과의 무역에는 "십불가(十不可)"와 "오대류(五大謬)"가 있다. 즉, 10가지 해서는 안되는 것과 5가지 큰 잘못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몽골인이 호시를 기화로 장성을 쳐들어올 수 있다. 혹은 암중으로 매복하여 중요관리를 기습할 수 있다는 등등이다. 그외에 다른 우려도 있다. 예를 들면 체면상으로 몽골과 장사를 하는 것은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본다. 국가의 존엄을 해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매년 수십만을 주고 말 수만필씩 얻으면 10년이 지난 후에는 말이 줄어들어서 몽골인들이 줄 것이 없어질 것으로 보고 그 후에 처리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몽골인들이 매매를 강요하는 경우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우려는 모두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할 수능 벗다. 몽골인들이 잘 속이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양계성이 애기한 '십불가' '오대류'는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그렇고 모두 발생한 적이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것은 당시 명군의 실력이 쌍방이 모두 이익을 얻는 상황하에서 정상적으로 무역을 진행하도록 보장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약탈시의 비용이나 리스크가 교환시의 비용이나 리스크보다 훨씬 클 때, 비로소 초원민족은 호시에서 진심으로 중원인과 교역할 것이다. 이전에는 약탈하는 것이 거래하는 것보다 훨신 쉽다. 그런데 왜 힘들게 교환을 하겠는가. 설사 정말 호시를 열었더라도 일방적으로 강매강매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악심을 품은 몽골인이 침략하여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명제국은 부득이 장성을 쌓고, 방대한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선교사는 일허게 적었다: "동시에, 적들이 자신의 재부를 노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국은 계속 백만사병을 보내어 동에서 서쪽까지의 장성을 방어했다."


명나라의 장성연변에는 "구변삼위(九邊三衛)"를 건립했다. 즉 대동, 유림, 감숙, 영하(치소는 지금의 영하 은천), 태원, 요동, 선부(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선화), 계주(치소는 지금의 천진 계현)과 고원의 9개 변방도시 즉 총병관할구와 장성이북의 태녕, 동승, 개평의 3개 위소이다. 동시에 제국은 확실히 숫자가 백만에 달하는 상비군이 있었다. '구변'만 해도 장기적으로 60만이상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것은 숫자일 뿐이고, 그중 얼마나 많은 유령사병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제국의 호부가 가진 자금중에서 대부분은 군사비로 쓰였다. 그렇기는 해도, 여전히 변방의 수요에는 부족했다. 만력제때, 중국북방의 각군진은 등기된 군인수가 70만에 달했다. 각 군비에는 현금만 해도 은자로 800만냥에 달했다(그 외에도 양식, 노무등 대량의 실물성 지출이 있다), 이 숫자는 말녁초기에 이미 관부에서 인정하는 상례가 된다.


이에 대하여,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비록 달단인의 침략이외에는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고 있을 뿐아니라, 정부는 돈을 들여서 백만이상의 군대를 유지시킨다. 이 숫자는 보기에 과장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북방삼성중의 하나는 요동이라고 불리는데, 거의 전인구의 반수가 자주 황제를 위하여 병사가 되어 출전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명왕조와 몽골은 이미 안정적인 무역호시관계를 건립했다. 이는 주로 고공, 장거정이 집권했을 때의 장기적 안목의 공이다. 신정을 통하여 점차 회복된 군사력이 배경이다. 그들은 마침내 명제국을 2세기동안 괴롭히던 몽골문제를 해결해낸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서 적지는 않겠지만, 선교사들이 보기에 평화로왔다. 이런 평화로운 모습에 외부인인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중국은 대며옹치하에서 공고해졌고, 이백오십년간 지속된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런데, 또 다른 달단인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