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경화연운(京華煙雲)
이야기의 시작은 전원시같은 낙원을 방불케 한다:
"사람들의 생존과 행복에 필요한 물건을 위하여, 먹는 것이건 입는 것이건 기교(奇巧)하고 사치스럽다. 이 왕국의 경내에는 풍부한 산물이 있고, 외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유럽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혹시 없더라도 유럽인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각양각색의 많은 물건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은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이다. 중국이름은 이마두(利瑪竇)이다. 1552년,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중부의 마세라타에서 태어났다. 9살때 그 도시의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한다. 나중에 로마에서 예수회에 가입한다. 1577년, 마테오 리치는 극동으로 선교를 하러 떠나기로 한다. 1592년 8월 마카오에 도착하고 그후에 광동으로 간다. 이때부터 중국에서의 28년에 걸친 생활이 시작된다.
그때 중국으로 온 서방인은 마테오 리치만이 아니었다. 전해지는 바에 다르면, 명나라말기에 중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들은 금방 부끄럽다고 느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방대한 제국이 그들의 예상을 훨신 초월하여 부유하고, 경제와 문화가 발달했기 대문이다. 기독교회에서 형용하던 없는 게 없는 '천국'이 이곳인 것같았다.
선교사들은 금방 난제에 부닥친다. 제국의 관리들은 외래종교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공자,맹자,석가모니에 대한 신앙이 뿌리깊었다. 선교사들이 시장을 개척하는 통상적인 방법은 이렇다. 아메리카대륙이나 아프리카에서는 자선사업을 전개하고, 생산기술을 전수해주는 방식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확실히 꺼내놓을 만한 게 없었다. 아마도 화포와 시계, 기기제조기술정도였는데, 이것들도 명나라정부에서는 그저 사소한 기기음교(奇技淫巧)로 취급당했다.
그리하여 이들 주의 사도들은 어쩔 수 없이 겸직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시계장인이 되어, 자명종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희한한 기술로 권력자와 귀족들의 관심을 끈다. 이렇게 하여 요행히 선교의 길을 열곤 했다. 어떤 사람은 군사기술자가 되어, 전문적으로 과학기술기초지식이 부족한 명나라군대에 대포를 설계해주어, 제국정부에서 보답을 받고자 했다. 이런 사람은 수량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기간도 아주 길었다. 건륭제때까지도 어떤 외국인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이 자명종을 잘 수리한다고 말하면서 조정에서 써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러나 황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중국의 TIANCHAO시계장인의 기술이 이미 너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기꺼이 장인이 된 신부들은 중국역사 특히 군사역사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명말청초의 거의 모든 위력이 큰 화포는 모두 그들의 지도하에 만들어 졌다. 최소한 그들과 관계가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뒤에서 중점적으로 언급하게 될 아마도 후금의 칸 누르하치를 사망하게 만든 그 화포도 포함된다.
그리고 소수의 선교사들 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 아담 샬(湯若望)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지식은 힘이다"라는 이치를 알아차리고, 중국에서 선교를 하기 전에 많은 최신의 고급 수리학문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계를 수리하고, 대포를 제작하는 외에, 천문지리, 일식월식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공자왈, 시에서 말하기를 이라는 것만 알던 고위관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렇게 하여 일보등천(一步登天)한다. 어떤 사람은 기회를 잡아서 고관의 위치에 올라가고, 심지어 명제국 과학원원장 겸 천문대 대장(흠천감 감정)이 되기도 한다.
아편전쟁이후 유아독존격의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던 동료들과는 달리, 중외문명교류 방면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은 공헌이 컸다. 마테오 리치를 예로 들면, 그는 <사서>등 유가경전을 번역하여 서방에 소개한 선구자일 뿐아니라, 중국학자를 도와서 <기하원본>등 과학서적을 중문으로 번역했다. 수학에서 '기하(幾何)'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비록 그의 최종목적은 아마도 선교였을 것이다. <기하원본>등의 책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성경>과 <천주실록>을 번역한다. 동시에 중국최초의 천주교도들을 발전시킨다. 그 중에는 몇몇 저명한 정부관리도 포함된다.
그리고 마르코 퐆로와 이후의 유럽인들은 모두 동방의 '거란(契丹)'이라고 부르는 대국에 온 적이 있다. 다만 서방인들은 시종 그것이 중국인 줄은 몰랐다. 마테오 리치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으로 거란이 원래는 중국의 별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0세기, 거란인은 일찌기 강대한 요왕조를 창건했다. 영토는 중국북부에서 서쪽으로 이어져서 중앙아시아 초원에 이른다. 그리하여 거란의 이름은 당시 많은 국가에서 중국북부를 부르는 칭호로 쓰였고, 나중에는 전체 중국을 부르는 칭호로 쓰인다.
후인들은 마테오 리치의 이 중대한 발견이 아메리카(이탈리아 항해가. 아메리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가 콜롬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것과 비견된다고 본다. 근대초기 서방지리학사상 가장 의미있는 두 가지 공헌일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흐리멍텅한 콜롬버스는 자신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끝까지 믿었고, 현지 토착민들을 '인디안' 즉 인도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와 마찬가지로, 이들 선교사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예수회에 속해 있었다. 예수회는 1534년에 성립된 천주교 수도회이다. 건립목적은 당시 날로 커져가는 신교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기율과 복종을 매우 강조하고, 예수회 수사들에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교개혁에 반대하도록 요구한다. 초대회장이자 나중에 천주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된 로욜라는 심지어 이런 '명언'을 남긴다: "나는 백이 흑이라고 믿는다. 만일 교회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다만, 이것이 예수회 수사들은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거짓말쟁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상 로욜라는 다른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세계각지를 돌아다녔고, 아조 청빈한 생활을 한다. 모든 정력을 선교에 쏟았다. 그들은 기독교 성인들도 일찌기 자신들과 같은 보통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그대 참고 견딘 고통을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들이 중국에서 선교를 하는 것만 동의해주면, 예수회 수사들은 무슨 일이든 받아들였다. 무릇 모두 변통처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국에서 수천년간 내려온 오래된 전통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금방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테오 리치는 당연히 '승려행장'을 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방 그는 유럽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승려의 이런 모습이 중국에서는 그다지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머리카락을 기르고, 유학자의 복장을 입는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관리들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데 아무런 심리적인 거부감이 없었다. 그리고 보통중국백성들처럼 아주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비록 그들 자신의 고향에서는 생활방식이 기실 정반대이지만. 거기에서는 공무원이 당연히 하느님의 종에게 존경을 표해야 마땅했다.
다시 수사들은 금방 전통역량이 강대함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주어, 주를 믿는 중국신도들에게 계속 향을 피우고 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여전히 하늘에 제사지네고, 조상에게 제사지내고, 공자에게 제사지낼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마테오 리치는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 낸다. 중국의 "하늘"과 기독교의 "주"는 기실 하나라는 것이다. 신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습속을 따르는 것이니 신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거기에 숭배, 기도같은 종교적인 성분만 들어가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기독교 교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마테오 리치 규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나중의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도 규칙이 되어 암중으로 지켜졌다.
강희제에 이르러, 도미니크회가 예수회를 대체한다. 이들 멍청한 신입자들은 선배들이 쌓아온 고귀한 경험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도 고려하지 않고 '마테오 리치 규칙'을 고치려 한다. 이백년을 앞서서 '공자'를 타도하려 한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그들이 청나라 황제들에게 쫓겨나게 된다. 게다가 성당은 중국에서 전면적으로 금지당한다. 이것이 바로 천주교역사상 유명한 '중국예의지쟁(中國禮儀之爭)"이다.
그러나 돌연, 일군의 살기등등한 야만인들이 천국의 안정을 파괴한다. 오래된 시가에서 사람들이 낭송하던 것처럼, "그들이 오고, 그들이 파괴하고, 그들이 불태우고, 그들이 죽이고, 그들이 약탈하고, 그 후에 그들은 떠났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중의 많은 사람든 모두 명말청초의 엄청난 변혁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각골명심하게 만든 역사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많건 적건 문자로 기록을 남긴다. 4세기후에 우리가 이 옛날의 기록을 들춰보면,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여전히 느껴진다. 거기에는 <달단전기>라는 이름의 소책자도 포함된다. 이 책은 명청교체기 역사를 반영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원시적인 기록중 하나이다. 이 책의 작자는 마르티노 마르티니이다.
그들의 기록에서 서방선교사들은 이들 동북에서 온 침략자를 '달단인(鞑靼人)"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고증에 따르면 요,금시기 몽골초원에서 가장 강대한 타타르부족에서 나왔다. 당시 다른 부족은 이점을 얻거나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왕왕 자신을 타타르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유럽인들은 나중에 이 단어를 가지고 중국북방의 유목수렵민족을 지칭하게 된다.
<달단전기>에서 작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북부의 유명한 장성 바깥에 거주하는 민족을 달단인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서부달단을 포함할 뿐아니라,우리 유럽에서 지금은 모르고 있는 동부달단을 포함한다." 이는 선교사도 아마 명나라백성들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왜냐하면 명나라백성들은 몽골인을 달단이라고 불렀다. 혹은 더 나아가 '달자(鞑子)'라는 멸시하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리고 의외랄 것도 없이, 이 명칭을 나중에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멸시하는 만주인들에게 붙여준다.
마테오 리치의 고향사람이자 동료인 마르티니는 명나라 숭정16년 즉 1643년에 중국에 도착한다. 그해의 정월 초이틀, 이자성은 가정제(嘉靖帝)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인 대명의 배도(陪都)중 하나인 승천부(承天府) 즉 지금의 호북 종상(鍾祥)을 점령한다. 그리고 "봉천창의대원수(奉天倡義大元帥)"라 칭한다. 이렇게 농민정권을 정식 건립한다. 이 농민군은 계속하여 섬서로 진격했고, 파죽지세로 진격한다.
명나라에 화불단행(禍不單行)인 것은 마찬가지로 이 해에, 화북에서는 서역(鼠疫, 페스트)이 일어나서 금방 서북으로 확산된다. 명군의 방어와 농민군의 진격에 모두 상당히 큰 문제를 야기한다. 얼마전의 <대명겁(大明劫)>은 바로 이 일을 배경으로 한다. 그 해의 팔월 초구일, 재위18년된 청태종 홍타이시가 붕어한다. 명쟁암투를 거쳐 6살짜리 황제 푸린(순치제)가 등극한다. 그의 숙부인 도르곤은 섭정왕의 신분으로 실권을 장악한다. 십월 초삼일, 이자성의 대군이 동관(潼關)을 함락시키고, 독사(督師) 손전정(孫傳庭)은 대명의 최후 정예군과 함께 전사한다. 농민군과 달단인의 내외협공하에 누구든지 알 수 있었다. 명제국에게 남은 나날은 이미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상황하에서, 총명한 마르티니는 즉시 자시에게 중문이름을 만들어 붙인다. 위광국(衛匡國). 이를 통하여 자신은 대명의 백성으로 공동으로 사직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나타낸다. 그는 비록 북경에 가보기는 했지만, 주요활동지역은 강소,절강 일대였다. 그리하여 강남의 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시기를 겪는다. 나중에는 심지어 현지에서 반청복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는 만청에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651년, 위광국은 유럽으로 돌아간다. 로마교황청에서 선교사들이 받들던 '마테오 리치 규칙'을 변호한다. 동시에 라틴어로 서방에 중국을 소개하는 책을 쓴다. 편년체사서인 <중국상고사>, 지리학저작인 <중국신도지>, 언어학도구서인 <한어어법>, 그리고 명청교체기의 참혹한 역사를 기록한 <달단전기>등이 그것이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서방에서 초기의 가장 중요한 한학자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1657년, 위광국은 중국으로 돌아온다. 청나라조정과 화해하고 계속 선교한다. 4년후 항주에서 병사하고, 그의 묘지는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잇다.
설명이 필요한 점은 위광국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명청쌍방의 핵심기밀에는 접촉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친히 관련인물들과 얘기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북경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야사 비사와 유사하다. 선교사들이 기록한 많은 내용은 기실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다. 마치 마테오 리치가 쓴 <기독교극동중화제국사>의 서문에서 예수회 수사 니콜라스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閣)가 말한 것처럼, "현재까지, 두 가지 유형의 중국을 쓴 저자가 있다. 한가지 유형은 상상을 너무 많이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이 들은 것을 생각없이 그대로 출판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자신의 모 신부를 이 후자에서 배제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달단전기>의 작자인 위광국은 청군입관떄 남방에 있었다. 그의 중국북방에 관한 많은 기록 특히 원숭환과 모문룡등의 사적에 관한 묘사는 분명히 이런 류일 것이다. 그 외에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마테오 리치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문자표현능력은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연대가 오래되고, 문화차이로 인한 오해까지 겹쳐서 이들 문헌을 읽는 것은 아마도 사람을 극히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어떤 때는 보면 머리가 아프고,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는 현대독자들은 작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 정도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이들 자료는 여러가지 결함이 있고 또한 반드시 정확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어쨌든 그 시대의 당사자로서 일차적 소재이다. 뒤에 우리가 언급할 <명계북략> <명계남략> <양주십일기>등의 민간자료와 마찬가지로, 곳곳에 풀뿌리백성과 소인물의 피눈물이 스며 있다. 알야야 할 것은 칼과 창에는 눈이 없다. 그것은 네가 황인종인 대명백성이건 파란 눈의 하느님의 종인지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기록은 대체불가적이다. 예를 들어 몇명의 선교사가 남긴 그들이 장헌충 농민군에서 친히 겪은 경력같은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역사를 연구하는데 극히 희귀한 일차자료이다. 아담 샬은 명청 양왕조에서 고위직에 있었다. 심지어 만청 최고통치자와도 밀접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기록한 고위층의 기밀은 가치가 엄청나다. 위광국의 <달단전기>에 대하여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방호(方豪)는 아주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은 "기록이 아주 상세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감추지 않았으며, 중국정사의 빈틈을 메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시의 그 역사에 관한 기록은 비록 일치감치 한우충동(汗牛充棟)으로 많지만, 왕왕 각양각색의 설로 분분하거나 자기 혼잣만의 주장을 펼친다. 이런 상황하에서, 잠시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외국인들은 어떻게 중국인을 썼는지 보는 것이 아마도 서로 다른 느낌과 발견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마테오 리치, 위광국, 아담 샬등이 남긴 기록을 맥락으로 하고, 동시에 필요한 중국외국사료를 결합하여, 독자들에게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자 한다. 비록 한 사람이 비록 스스로는 아주 좋다고 느끼지만,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그가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본다고 느끼는지, 다른 사람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본다고 느끼는지 이 4자는 왕왕 같지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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