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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역사적 사실인가?

by 중은우시 2018. 5. 8.

글: 이자지(李子遲)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음 명청(明淸) 장회소설(章回小說) <삼국연의>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중 하나이다. 여기에 앞의 '실가정(失街亭)'과 뒤의 '공성계(空城計)'까지 합쳐서 3부분을 합치면 희곡(특히 경극) 무대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나가 북벌을 시도하는데 의도는 관중등지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마속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정(지금의 감숙성 진안의 동북쪽)을 지키겠다고 하고, 군령장을 쓴다. 당시 제갈량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서, 일찌기 유비가 그에게 말해주었던, "마속은 말하는 것이 실제보다 과장되니, 크게 쓸 수는 없다"는 말을 잊고, 마속을 가정이라는 중요한 군사요새를 지키는 주장으로 삼는다. 마속은 가정에 가서는 오만하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제갈량의 지시도 어기고, 부장인 왕평의 권고도 듣지 않고, 산꼭대기에 군영을 차리는 전략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산아래의 강을 버려둔다. 그리하여 위나라의 맹장 장합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지 참패하고 가정을 잃고 만다. 그리하여 대군은 어쩔 수 없이 한중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촉국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제갈량은 한편으로 임시로 각종 조치를 취하여 적군을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군기를 엄중히 하고, 조야를 다독이고 민심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자리에서 마속을 참한다. 다만 어쨌든 마속은 장수의 인재였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자신이 선제 유비의 당부를 잊고 사람을 잘못쓴 잘못을 저질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하여도 회한이 밀려왔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고,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했다.


"제갈량휘루참마속"의 이야기는 소설 <삼국연의>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서인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이 서현의 천여가를 데리고 한중으로 돌아온다. 마속을 죽여서 사람들을 달랬다.(亮拔西縣千餘家,還於漢中,戮謖以謝衆)". 이렇게 보면 읍참마속은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같은 사서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마속이 하옥된 후 사망하니, 제갈량이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謖下獄物故, 亮爲之流涕)"(<삼국지. 촉서. 마량전>). 즉, 마속은 옥중에서 병사했다는 말이다. 제갈량이 죽인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제갈량은 역시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삼국지. 촉지. 향랑전>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마속이 도망갔고, 향랑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향랑을 미워하여, 관직을 파면하고 성도로 돌려보냈다."(謖逃亡, 朗知情不擧, 亮恨之, 免官還成都)" 즉, 가정의 전투이후, 마속은 자수한 것이 아니라 도망쳤고, 장사관인 향랑은 이를 알고서도 마속과 관계가 좋아서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향랑의 파직시키고, 그후 이십년동안 조정에 등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제갈량이 마속을 참수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다. 같은 작자가 같은 저작에서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기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합쳐서 볼 수도 있다. 즉, 마속이 당초 패배한 후 확실히 벌받을 것이 두려워 도망을 친 바 있다. 다만 나중에 촉한의 장병들에게 붙잡힌다(혹은 스스로 자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확실히 그를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아니면 제갈량이 고의로 형집행을 늦추었을 수도..), 마속은 감옥에서 병사하고 만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가정에서 패배한 후, 마속은 아예 제갈량을 다시 보지도 못했고, 왕평이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마속은 제갈량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다. 즉, "제갈량휘루참마속"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