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 방어전에 뛰어난 5명의 명장

중은우시 2018. 3. 14. 12:39

글: 지역사(知歷史)


이목(李牧)


이목은 전국말기 조(趙)나라 사람이다. 전국4대명장의 하나이다. 또한 조나라 후기의 유일하게 조나라를 지탱한 장수이다. 이목은 초기에 북부변방에서 흉노를 방어했다. 한번은 전투에서 흉노의 정예기병 십여만을 섬멸하여, 흉노가 수십년간 감히 남하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그후 여러번 조나라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격패시킨다. 비수지전에서 방어후 반격전략으로 환의(桓齮)를 격패하고 진나라군대에 대승을 거둔다. 왕전(王翦)이  수십만 진나라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할 때도 이목은 1년여동안 지켜낸다. 나중에 반간계에 걸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경공(耿恭)


경공은 동한이 부풍 무릉사람이다. 두고(竇固), 경병(耿秉)등이 차사국(車師國)을 물리친 후, 차사국을 동한의 판도에 편입시키고 경공을 남겨서 수비하게 했다. 북흉노 선우는 좌녹려왕(左鹿蠡王)으로 하여금 차사국을 공격하게 한다. 경공은 금포성(金蒲城)에서 두번이나 흉노대군을 물리친다. 서역도호부의 군대가 전멸한 후에는 경공이 소륵성(疏勒城)을 점령하고 수천면을 데리고 사수한다. 몇달간 수비를 하고 나자, 식량이 모조리 바닥나고 겨우 몇십명의 한나라병사들만 남는다. 북흉노에서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투항을 권한다. 경공은 사자를 성으로 올라오게 유인한 후, 친히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성위에서 북흉노 사자의 시신을 불에 굽는다. 북흉노 선우는 대노하여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성을 포위한다. 그래도 여전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나중에 한장제(漢章帝)가 파견한 군대가 구원을 와서 위기를 벗어나는데, 소륵성에서 출발할 때는 겨우 26명만이 남았다. 귀로에서도 계속 북흉노의 추격을 받는다. 옥문관(玉門關)에 도착했을 때는 경공과 부하는 겨우 13명만 남게 된다. 악비의 "소담갈음흉노혈(笑談渴飮匈奴血)의 전고는 바로 경공이다.


장순(張巡)


장순은 당나라 포주 하동 사람이다. 안사의난(安史之亂)때 장순은 일개 현령(縣令)이었다. 안사의 반란군이 가는 곳의 지방관리는 바로 투항했다. 그러나 장순은 수하 수천명을 데리고, 옹구(雍丘), 영릉(寧陵), 수양(睢陽)에서 항거한다. 안경서(安慶緖)가 안록산(安祿山)을 죽인 후, 부장 윤자기(尹子琦)에게 반군의 정예병 10여만을 이끌고 수양을 공격하게 한다. 장순은 성안에 양식도 없고, 성밖에 구원병도 오지 않는 상황하에서 수양을 사수한다. 전후로 400여회나 교전이 있었고, 안사의 반군은 손실이 컸다. 반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바람에 당나라의 동남은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장순은 양식이 모두 떨어지고, 사병들이 부상과 사망으로 모두 없어진 후 포로로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장순이 수양을 방어하면서 많은 전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왕견(王堅)


왕견은 남송의 명장이다. 항몽총지휘 여개(余玠)의 지휘하여 그는 조세웅(曹世雄)등과 함께 합주(合州), 광안(廣安)등지에서 몽골군을 격패시킨다. 몽케 칸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합주를 포위공격한다. 왕견은 부장 장각(張珏)과 조어성(釣魚城)을 사수하며 여러번 몽골군대를 물리친다. 몽케는 진국보(晋國寶)를 조어성으로 보내서 투항을 권유하나, 왕견에게 죽임을 당한다. 몽골대군은 조어성을 9개월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게다가 몽케칸마저도 선풍화포에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할 수 없이 철수한다. 역사에서 조어성전투라고 불리우는 전투이다. 조어성전투는 세계역사를 바꾸었고, 조어성은 몽골인이 함락시키지 못한 유일한 성이 된다.


우겸(于謙)


우겸은 명나라의 명신이고, 민족영웅이다. 토목보(土木堡) 전투후에 명영종(明英宗)이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히고 명나라군대의 정예병은 거의 전멸힌다. 우겸은 남천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남북양경과 하남의 비조군(備操軍), 산동과 남경연해의 비왜군(備倭軍), 강북과 북경소속 각부의 운량군(運糧軍) 합계 22만을 동원하여 경사를 보위한다. 오이라트 예센(也先)의 정예부대 5만과 싸운다. 22만을 각각 9개의 성문에 배치하고 매 성문 밖에는 2만의 명군이 진을 펼쳐서 적을 맞이한다.


우겸은 각 성문을 모조리 닫아걸고, 자신이 친히 전투를 독려한다. 그리고 명령을 내린다. 전투에 임한 장수가 부대를 돌보지 ㅇ낳고 먼저 퇴각하면 장수를 참한다; 벼사가 장수가 먼저 퇴각하지 않는데 퇴각하면 후대(後隊)가 전대(前隊)를 참한다. 그리하여 장수와 사병들은 모두 이것이 결사의 전투라는 것을 인식하고 군령을 따른다. 예센은 재물을 배앗는 것도 안되고,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기 어렵고, 게다가 명군이 퇴로를 차단하는 것도 겁이 나서 5일간 대치한 후에 철군한다. 우겸은 장수를 보내어 추격하게 하여 거용관(居庸關)까지 촟게 한다. 우겸이 주재한 경사보위전은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북송의 '정강지치'가 재연되는 것을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