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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 아들에게 살해당한 6명의 황제

by 중은우시 2018. 2. 19.

글: 이자지(李子遲)


첫째,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천사(天嗣)6년(409년) 십월 십삼일. 객황제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拔珪)는 그의 차남인 청하황(淸河王) 탁발소(拓拔紹)의 모친 하부인(賀夫人)이 큰 잘못을 저질러 그녀를 궁안에 구금시킨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바로 처형을 집행하지는 않았다. 하부인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탁발소에세 자신을 구해달라고 알린다. 그날 밤 탁발소는 부하무사 및 환관등 수인과 연락한 후 담장을 넘어 궁안으로 들어가서 천안전(天安殿)으로 간다. 도무제를 좌우에서 모시던 시위는 적구(賊寇)가 왔다고 고함친다. 도무제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으나 주변이 활이나 칼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탁발소에게 살해당한다. 도무제는 즉위초기에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히써서, 선비족 정권을 봉건사회로 진입하게 한다. 그러나 말년네 주색에 빠지고, 걍팍자용하면서 형제들과 화목하지 못하여 이런 결과가 초래된다. 도무제가 죽었을 때 39살이며, 24년간 재위한다.


둘째,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유송(劉宋)의 원가(元嘉)30년(453년), 무고(巫蠱)사건으로 유송왕조의 세번째 황제인 송문제(宋文帝) 유의륭(劉義隆, 아명은 車兒)은 장남 유초(劉劭)를 태자에서 폐위시키고자 한다. 유초는 이를 알고난 후, 동생인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浚)과 공모하여 병사를 이끌고 한밤중에 황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부친을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가 송원제(宋元帝)이다. 연호는 태초(太初)로 바꾼다. 유초는 부친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함에 따라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재위 겨우 3개월만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유준(劉駿)에게 궤멸되고, 유초는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한다. 송문제는 향년 46세이고 30년간 재위했다.


셋째, 수(隋)나라 인수(仁壽)4년(604년) 칠월, 개국황제인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은 병이 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다. 차남이자 두번째 태자인 양광(楊廣)은 자신이 황제에 오를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더 기다리지 못하고 대신 양소(楊素)에게 서시을 쓴다. 어떻게 수문제의 후사를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서신을 보내는 사람이 양소의 회신을 수문제에게 보낸다. 수문제는 이를 읽고 대노하여 즉시 양광에게 입궁하라고 하여 직접 책임을 물으려 한다. 바로 이때, 총비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가 의복이 흩어진 채 뛰어들어와 양광이 그녀를 놀렸다고 울면서 호소한다. 그제서야 수문제는 확연히 깨달았다. 침상을 내려치며 크게 욕하면서 말한다: 급히 대신 유술(柳術), 원암(元巖)에게 조서를 초안하라고 한다. 내용은 양광을 폐출시키고 다시 양용(楊勇)을 태자에 앉힌다는 것이다. 양광은 이 일을 알고서, 수문제를 모시던 사람을 모조리 갈아치운다. 그리고 그날 수문제는 죽는다. 향년 64세이고 24년간 재위했다. 역사상 수문제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하여 명확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인들은 양광이 독수를 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양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수양제(隋煬帝)이다.


넷째, 오대십국(五代十國)이 후량(後梁) 건화(乾化)2년(912년), 후량의 개국황제 태조 주온(朱溫)이 셋째아들 주우규(朱友珪)에게 피살된다. 향년 61세이고 재위6년이다. 주온은 말년에 성격이 포악하여 살인을 무수히 저지르고, 여색을 탐한다. 심지어 난륜도 저지른다. 며느리까지 입궁하여 시침들게 했다. 건화2년 육월, 주우규는 그가 궁정숙위시종을 장악한 것을 기화로 궁정정변을 일으킨다. 한밤중 삼경에 만춘문(萬春門)을 치고 들어가 침궁에 이른다. 모시던 사람은 모두 놀라서 도망친다. 주온은 놀라서 일어나 앉아 크게 소리친다: "나는 네가 이미 이런 마음을 먹고 있는 줄 알았다. 일찌감치 죽여버리지 못한 것이 한이다. 네가 감히 애비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주우규는 심복인 풍정악(馮廷諤)으로 하여금 주온을 검으로 찌르게 한다. 주온은 기둥을 붙잡고 빙빙 돌다가 검이 세번이나 기둥을 찌른다. 주온은 지쳐서 침대 위에 엎어진다. 풍정악은 그를 검으로 찔렀고, 검이 배로 튀어나오고, 내장도 쏟아져 나온다. 주우규는 시신을 모기장과 이불로 싸서 침궁에 놔둔다.


다섯째, 오대십국의 민국(閩國) 영화(永和)원년(935년), 민국의 세번째 군주인 왕연균(王延鈞)은 장남 왕계붕(王繼鵬)이 일으킨 궁중정변으로 피살된다. 사후에 혜황제(惠皇帝)라는 시호를 받는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일설에는 시호가 제숙명효황제이고 묘호가 혜종이라고 한다) 왕연균은 왕린(王鏻, 王璘이라고도 한다)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광주 고금 사람이다(지금의 하남성). 927년 형인 왕연한(王延翰)을 죽이고 왕에 오르고, 933년에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용계(龍啓)라 하고, 국호를 대민(大閩)이라 한다.


여섯째, 서하(西夏)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 10년(1047년), 개국황제인 하경종(夏景宗) 이원호(李元昊)는 차남인 이녕령가(李寧令哥)의 며느리로 몰이씨(沒移氏)를 구해준다. 그런데 이원호가 몰이씨를 보니 미모가 뛰어나자 자기가 빼앗아서 새로운 황후로 삼고 야리황후(野利皇后)를 폐출시킨다. 이녕령가는 도저히 그 원한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야심가인 몰장와방(沒藏訛龐)이 옆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창을 들고 궁으로 들어가 이원호를 찌른다. 그 결과 이원호는 아들에게 코를 베인다. 나중에 코에서 상처가 나고 치료가 되지 않아 다음 해(1048년) 정월에 사망한다. 당항족의 일대영주는 이렇게 죽는다. 마지막에 이녕령가는 몰장황후 오누이의 '반간계'에 걸려 주살당하고,이원호의 막내아들인 이량조(李諒祚)가 황제로 즉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