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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의 딸들은 누구와 결혼했는가?

by 중은우시 2018. 2. 9.

글: 이치아(李治亞)


정략결혼은 고대 정치투쟁에서의 큰 일이다. 삼국시대에는 아주 빈번했다. 조조도 여러번 이를 활용한다. 조조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많은 여인이 있었고, 많은 딸들을 낳아서 길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는 자신의 부하 혹은 상대방과 정략결혼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목적은 당연히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을 없애고,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여 더욱 잘 일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래에서는 조조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과 정략결혼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황제(皇帝) 유협(劉協). 조조는 통이 크다. 일찌기 한꺼번에 3명의 딸을 묶어서 황제에게 시집보낸다. 이 점도면 통이 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황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것같다. 왜냐하면 조조가 일찌기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황후와 귀비를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에게 딸들을 시집보낸 이유는 당연히 황제를 감시하기 위함이다. 황제는 비록 원치 않기는 했지만, 할 수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조조는 일거에 황제의 장인이 된다. 당연히 조조는 황제의 장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주로 생각한 것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큰 딸 청하공주(淸河公主)는 하후돈(夏侯惇)의 아들 하우무(夏侯懋)에게 시집간다. 조조는 한때 대재자(大才子) 정의(丁儀)를 마음에 두었다. 정의의 부친인 정충(丁沖)은 조조와 관계가 좋았다. 일찌기 조조에게 한헌제를 영접하라고 건의한 바 있는 조조의 심복이다. 조조는 정씨집안에 아주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조비(曹丕)는 다른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정의가 자기 진영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에 대하여 모욕적인 말을 한다. 조비는 정의가 눈이 하나여서 이미지가 좋지 않고, 여동생인 청하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는 그의 말을 듣자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딸을 애꾸에게 시집보내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보아서 그 생각을 포기한다. 나중에, 조조는 정의를 불러서 자신의 속관으로 임명하고, 정의와 자주 문제를 토론했다. 그리고 정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조조는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정의라는 이 친구는 아주 괜찮다. 설사 두 눈이 모두 멀었다고 하더라도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어야 했따. 하물며 겨우 눈 하나만 못쓰는게 아닌가. 나의 아들 조비가 확실히 나를 망쳤구나. 청하공주는 조조의 대장 하후돈의 아들 하후무에게 시집간다. 하후무는 전형적인 환고자제(紈絝子弟,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는 귀족(부자집) 자식)로 재능이랄 것이 없었다. 비록 장수가 되어 전투에 나서지만 항상 패전만 했다.


셋째, 안양공주(安陽公主). 그녀는 순욱(荀彧)의 큰아들인 순운(荀惲)에게 시집을 간다. 순욱은 모두 알다시피 조조 휘하의 제일모사이다. 조조에 의하여 장량과 같은 인물이라고 칭해지는 인물이다. 부친 순욱이 죽은 후, 그는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고 나중에 호분중랑장이 된다. 순운은 조식과 교분이 있었고, 하후상(夏侯尙)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리하여 조비의 불만을 산다. 순운은 요절하는데 그의 아들 순감(荀甝)이 작위를 승계한다.


넷째, 금향공주(金鄕公主). 하진(何進)의 손자인 하연(何宴)에게 시집간다. 하진은 예전에 아주 유명했었고, 일찌기 대장군을 지냈다. 조조는 당시에 하진의 부하였다. 아쉽게도 하진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동탁을 경성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조조는 무슨 심리에서인지, 나중에 하진의 며느리를 후궁으로 들인다. 그리고 하연을 자기가 기른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딸을 하연에게 준다. 어쨌든 자기가 길렀으니 어떤지를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연은 비록 명성이 높았고, 글을 잘 썼지만 화려하나 실속이 없고, 일찌감치 죽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과부가 된다.


다섯째, 임분공주(臨汾公主). 조충(曹沖)의 쌍동이여동생이다. 나중에는 행방불명이 된다. 그녀의 모친인 환부인은 조조가 생전에 아주 좋아했던 여인이다. 특히 조충, 조우(曹宇), 조거(曹據)의 엄마이다. 그러나 역사상 이 공주가 누구에게 시집갔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