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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소태후)

소태후(蕭太后): 무덤까지 혼외 애인을 데려가다

by 중은우시 2018. 1. 31.

글: 장계합(張繼合)


1004년 겨울, 북풍이 몰아칠 때 밀물처럼 요나라병사들이 물려왔다. 유명한 소태후 소작(蕭綽)과 그녀의 친아들 요성종(遼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는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이번에 주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실지수복(失地收復)이다. 즉 송나라의 손에서 와교관(瓦橋關)이남의 10개 현(縣)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다. 20만대군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선두부대는 교묘하게 방어가 삼엄한 성을 돌아서 병어가 비교적 느슨한 관구(關口)에 병력을 집중하여 포위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황하 가의 전주(澶州)이 이른다. 전주는 바로 현재의 하남 복양(濮陽)이다. 이곳은 송나라수도인 변량에서 하루 거리도 되지 않는다.


소태후가 왔다! 변량은 일시에 거대한 공황에 빠진다. 조정신하들은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어떤 사람은 구화(求和)를 외치고, 어떤 사람은 천도(遷都)를 주장했다. 기실 모두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리는 형편없는 의견이었다. 황제 조항(趙恒)은 비교적 젊었지만, 천도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투항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재상인 구준(寇準)은 강렬하게 "한판 벌이자"고 주장한다. 요나라의 황제와 황후가 이미 우리 집 문앞까지 왔는데, 대송황제가 어찌 어가친정(御駕親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폐하께서 만일 전쟁터에서 독전만 해주신다면 군대의 사기가 크게 일어나서 요나라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조항은 그래도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과연 구준의 의견을 받아들여 황하를 넘어 전주성 위에 오른다. 이는 특수한 시기이다. 송과 요 두 나라의 최고군사지휘관이 모조리 전선에 나온 것이다. 쌍방의 병사들이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유주를 방어하던 때와는 달리 이번은 소태후와 요성종에게 홈그라운드가 아닌 적진에서의 작전이었다. 조항이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전체적인 균형추는 기울어 버린다. 전주측에서 "여러 군인들이 만세를 외쳤고, 그 소리가 수십리밖까지 들렸으며 기세가 백배되었다." 지리, 인화는 모조리 송나라편이었다. 이와 동시에 요나라명장 소달(蕭撻)이 기습을 당해 사살된다. 이 소식을 듣고는 소작이 몇번이나 얼굴을 감싸며 통곡했다고 한다.


소태후는 보는 눈이 정확한 사람이다. 그녀는 절대로 승산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전투로 이길 수 없다면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소작은 먼저 "화담(和談)"을 얘기한다. 요나라에서 외교쪽을 내걸고 느슨하게 나오자, 송나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휴전한다. 양측의 의견이 바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결국 "전연지맹"이 맺어지고, 이 맹약에서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요나라는 실질적인 이익을 얻었고, 송나라는 체면을 살렸다. 가장 핵심은 두 조항이다. 첫째, 물질. 송나라는 매년 요나라에 백은10만냥, 견 20만필을 보낸다. 둘째, 명예. 양국은 형제관계로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한다. 송나라황제는 소태후를 '숙모'로 인정한다.  졸지에 숙모가 생겨나다니 조항과 송나라조정으로서 그다지 명예스러운 일은 아니다.  


"전연지맹"에서는 소태후에게 만족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녀는 원래 무(武)를 숭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궁과 경노로 하동안의 휴양생식과 평화세월을 얻어낸다. 그녀는 권모술수에 관심이 없지만, 거경약중(擧輕若重)으로 "병사들을 잘 다룰 줄 알았고", 거중약경(擧重若輕)으로 장수를 잘 다룰 줄 알았다. 작은 일개 여인이 큰 지혜를 지녔다. 이는 요나라백성들에게는 큰 복이다. 맹우도 좋고, 정적도 좋고, 모두 그녀에게는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치켜세웠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 소작은 작은 생선을 굽듯이 큰 나라를 다스리는 묘미를 잘 알았다.  예를 들어 내정에서 그녀는 거란인에게 밉보이지 않으면서, 한인들과 소원하지도 않았다. 관료사회를 정비하여, 과거를 통해 선비들을 뽑아서 천하의 영재를 거두어 들였다. 농잠을 장려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도왔으며,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힘썼다. 다시 외교분야를 보면, 그녀는 한편으로 고려를 '가상적'으로 놓아. 송나라사람들이 마음을 놓게 만든다. 한편으로 서하와 장사를 하면서, 대량으로 양식과 말, 병기등 전략물자를 모은다. 이렇게 괴이한 도광양회전략은 마치 그녀가 금방 과부가 되었을 때의 아름답고 안타까운 눈빛과 같다. 그것은 한 가지 뜻이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연민을 얻어내면서, 역량을 축적한다.


요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소태후는 전후로 두 명의 황제를 보필한다. 특히 아들 야율융서가 재위할 때는 대요의 국력이 전성기에 이른다. 당연히 소작은 아주 뛰어난 아들을 두었다. 모친의 세밀한 보살핌 아래에서 야율융서는 타고닌 천고명군의 자질이 그대로 발굴되었다. <요사.형법지>에서는 소작 시개의 태평성대의 모습을 "감옥에 죄수가 없었다"고 적고있다. 감옥에 죄수가 없을 정도이면 백성들이 얼마나 편하게 살았다는 말인가. <요사>는 야율융서에 대하여 극히 찬양하는 평가를 내놓는다 누가 모르겠는가. 이런 걸출한 황제는 바로 소작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명성이 나빠지는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재물이고 다른 하나는 여색이다. 과부의 문전에는 시비가 많다. 소작의 사생활은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게 된다.


<요사.야율융운열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야율융운(耶律隆運), 원래 성은 한(韓), 이름은 덕양(德讓)...통화19년, 덕창(德昌)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22년, 야율의 성씨를 하사한다. 28년, 다시 융운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중후하고 지략이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잘 알았으며, 공을 세우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치 요나라의 영예, 지위는 모두 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같았다. 도대에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이 적담충심, 공훈탁월한 한신(漢臣)은 요나라황실과 개인적인 관계가 아주 깊다.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 한 가지 이야기는 이런 것이 있다: 소작이 소녀시절에 한덕양에게 시집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결혼하기도 전에, 부친이 황궁으로 들여보냈고, 야율현(耶律賢)의 부인이 된다. 야율현이 요절하였지만, 소작은 여전히 꽃처럼 옥처럼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옛사랑을 찾아가기로 하고, 한덕양의 곁으로 간다. 이는 거란의 풍속에서는 허가되는 것이다. 소작은 한덕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일찌기 너에게 시집가기로 했었다. 옛 사랑을 다시 찾고 싶다. 대요의 황제가 바로 너의 아들이다."


소태후는 당연히 "작은 부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한덕양의 가정을 파괴시킨다.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소태후는 한덕양과 사통하면서 사람을 시켜 그의 처를 교살한다." 그후 두 사람은 "마치 부부처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났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소철의 <용천별지>에 따르면 전주에서 화의를 논의하던 기간에, 송나라의 사신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했는데,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노모(虜母, 소태후를 가리킴)가 군중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번장 한덕양과 어떤 때는 낙타가 끄는 수레 위 앉았고, 수레 아래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화의 건을 함께 논의했다." 최소한 이 고귀한 남녀한 쌍은 이상하게 친밀했다. 심지어 보통의 군신간의 예의도 벗어났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 둘은 부부의 실질을 가졌을까? 아무도 증거는 없다. 그저 아무렇게나 얘기하고 아무렇게나 들으면 그만일 것이다.


<요사>에는 약간의 흔적이 있다. 한번은 마구(馬球)경기때, 한덕양이 귀족 호리실(胡里室)과 부딛쳐 낙마한다. 소태후는 즉시 대노하며, 그자리에서 호리실을 처결한다. 원래 그저 운동경기일 뿐이고, 서로 부딛치는 것은 별다를 것도 없지만 한덕양을 다치게 했다는 것은 소태후에게 눈알 하나를 빼가는 것이나 같았다. 자세히 이 장면을 음미해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확실히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녀간의 애정을 놔두고서라도, 한덕양을 필생의 심혈을 대요에 바친다. <야율융운열전>에는 그의 일생결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고려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병에 걸린다. 황제와 황후가 찾아가서 의약을 쓴다. 사망하니, 나이 71세이다. 상서령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며 장례도구를 관에서 내리고, 건릉(乾陵)의 옆에 묘(廟)를 세운다." 나이 고희를 넘겨서 고려로 가서 싸우다니 그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한덕양이 병석에 누웠을 때 황제와 황후가 모두 찾아와서 그를 위문한다. 이 점도의 애정이면 이미 충분할 것이다.

가장 음미할 만한 것은 건릉의 옆에 묘를 세웠다는 것이다. 건릉은 바로 소태후의 묘이다. 한덕양이 그 곁에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통합27년 십일월, 57세의 소작이 정식 은퇴한다. 아들이 컸으니 이제는 나라를 직접 끌고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은 늙었으니 이제 편안하게 세월을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누가 알았으랴. 1달후, 그녀는 출순을 떠나는 도중에 사망한다. 그녀가 한발 먼저 갔던 것이다. 그리고 묵묵히 적막한 건릉에 묻혀 있었다. 다시 1년여가 지나서 능묘의 곁에는 친구가 생긴다. 바로 한덕양이 영원히 그녀의 곁을 지켜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