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소태후)

소태후(蕭太后)는 어떻게 조정을 장악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3. 24.

글: 장계합(張繼合)

 

중국역사는 일방적이다. 남자들중 운이 좋은 사람이 자연히 주인공이 된다. 운이 나쁘면 조연이 된다. 여자는 '단역'조차도 할 자격이 없었다. 당당하게 조정에 들어가서 정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거란국지>와 <요사>만이 예외적이다. 이 정권은 '집단적 공처가'들로 이뤄져 있다. 그들에게는 기이한 풍속이 있었는데, '모든 일에 부인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여자들이 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게 하는 기반이 된다.

 

요나라의 후비들은 관여하는 일이 많았다. 황제의 침상을 장악하기만 하면 요나라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개국황제인 야율아보기때부터 시작하여 집안의 여주인은 없애도 없애도 계속 나타났다. 예를 들어, 태조황후 술율평, 태종의 정안황후, 경종의 황후 소작(蕭綽, 나중의 소태후), 성종의 흠애황후, 도종의 선의황후 소관음(蕭觀音), 천조문비 소슬슬(蕭瑟瑟), 야율순의 처인 소보현녀(蕭普賢女)등등. 이들중 누가 가장 유명할 까. 당연히 요경종의 황후인 소작이다.

 

<요사.후비열전>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품게 된다. 요나라의 황제는 모조리 소씨집안의 여자들 틈에 둘러싸였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다. 황후는 대대로 소씨(蕭氏)이다. 그리고 친척관계에 친척관계가 더해져서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 일은 거란의 개국때부터 얘기해야 한다. 야율아보기는 "오랑캐"이다. 그러나 중원의 문화를 좋아했다. 막 황제가 된 후에 그는 스스로를 한고조 유방에 비유하고, 스스로의 성을 유씨(劉氏)로 한다. "을실기(乙室己)"와 "발리(拔里)"의 두 가족은 한나라의 승상인 소하(蕭何)에 비유하여, "소씨(蕭氏)"를 하사한다. 그들은 원래 친척간이었고, 혈연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중에 요나라의 제2대황제인 야율덕광은 아예 위의 두 소씨를 "후족(后族)"으로 확립한다. 즉, 황제들은 이 황후족인 소씨집안여자와 결혼해야 한다.

 

<거란국지>를 보면, "번법(番法)에는 왕족은 오로지 후족과 통혼한다."고 되어 있다. 이 제도에 따라, 요나라의 황제와 친왕은 소씨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해야 한다. 소씨남자도 반드시 황실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발리'가족에서는 11명의 부마가 나왔고, '을실기'가족에서는 13명의 부마가 나왔다. '고종사촌간에는 뼈를 부숴도 근욕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권력이 외부로 누수되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안팎으로 모두 자신의 집안사람이니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예지황후" 소작의 집안은 '후족'의 줄기를 따라 발전해왔다.

 

소작의 어릴 때 이름은 소연연(蕭燕燕)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태어날 때부터 황실이 인척이었다. 부친인 소사온(蕭思溫)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전쟁에 능하지는 못했지만, 고관대작이었다. 북부재상, 남경유수등의 요직을 역임한 바 있다. 소작의 모친은 더욱 대단하다. 그녀는 바로 요태종 야율덕광의 친딸인 연국대장공주이다. 이 부마가 전투능력이 없다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의 정치적 역량은 대단했다. 요세종은 포악하여 피살당한다. 소사온은 위험을 무릎쓰고 야율현을 황제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요경종이다. 즉 소사온이 마음에 둔 사윗감이다.

 

소작은 자신의 행복을 황제에게 건다. 즉 집안의 운명을 건 것이다. 다행히 이 혼인은 순조로웠다. 첫째, 소사온은 옹립에 공이 있었다. 둘째, 소씨집안은 "후족"이다. 셋째, 야율현은 일찌감치 소작의 명성을 들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소작은 일류의 여인이었다. <요사.후비열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소작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소사온은 여러 딸들이 땅바닥을 청소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 오직 소작만이 깨끗하게 치웠다. 소사온은 기뻐하며 말했다: '이 딸은 반드시 일가를 이룰 것이다' 황제가 즉위하자 귀비로 뽑힌다." 과연 그의 말대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마음 씀씀이가 뛰어난 어린 여자아이는 정궁황후가 되었을 뿐아니라, 요나라의 운명을 주재하는 지도자가 된다.

 

보녕원년 즉 969년 22세의 야율현이 황제위에 오른다. 북국의 삼월은 "매화가 눈 속에 지고, 봄바람이 버드나무 위로 돌아간다" 16살된 소작은 후궁으로 당당하게 들어간다. 그녀는 바로 귀비에 책봉된다. 나이어린 부부가 한창 사랑에 빠져있을 때, 소사온에게 일이 터진다. 보녕2년, 그는 사냥도중에 정적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소작은 즉시 고통에 빠진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호랑이와 승냥이 틈에서 살아남았다. 그러자면 머리를 굴리지 않고, 수완을 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나라의 공자진은 <기해잡시>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설상영웅수모일(設想英雄垂暮日), 온유부주주하향(溫柔不住住何鄕)". 만일 공명을 이룬 늙은이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청년황제의 입에서 나왔다면 그것은 이른 감이 있다. 야율현은 일찌감치 '온유향'에 빠진다. 이해해줄만한 점은 그의 몸이 병약했다는 것이다.

 

야율현은 요세종 야율완의 둘째아들이다. 951년, 그가 세살 때, 눈을 벌겋게 뜨고 부친과 모친이 반신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친척들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어린아이였던 그는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풀숲에 숲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그후 그는 계속 병약했다. 즉위초기, 풍질에 걸려서, 출병해서 전투하는 것은 고사하고, 말에도 겨우겨우 올라탔고, 제대로 앉아있지는 못했다. 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얼굴색이 창백했다. 그저 여인의 품 속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어린 두 부부는 모두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하지만, 소작이 야율현보다는 강했다. 그녀는 머리가 영특하고, 손발이 기민한 어린 보모처럼 남편의 먹고 마시고 싸고 걷고 안고 눕는 일을 돌본다. 황제는 그저 이불 속에서 힘없이 웃을 뿐이다. 내정, 외정은 모조리 처가 대신했고, 그는 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나라말기 토토(脫脫) 태사가 <요사. 후비열전>을 새로 쓸 때, 간단하게 소작의 평생을 요약한다: "황제가 즉위하고, 귀비에 뽑힌다. 황후가 되고, 성종을 낳는다. 경종이 붕어하자, 황태후가 되어 국정을 섭정한다."

 

아들을 낳고, 황후가 된다. 황후가 되고 섭정을 한다. 이것은 거란의 풍속이다.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실 후궁에 들어온 미인들 틈에서 군계일학으로 뛰어나고, 황제의 총애를 독점하는 것은 단지 출신집안이 좋고, 얼굴이 예쁜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황제의 곁에 온 여인들 중에서 누가 집안이 떨어지겠는가? 누가 예쁘지 않겠는가? 황제가 후궁을 뽑으며 미인을 얻기는 쉽다. 그러나 재녀를 얻기는 어렵다. 야율현은 천성적으로 유약했지만, 강인한 소연연을 만났다. 하늘이 가련하게 여겨서 요나라에 치세의 명주를 보내준 것이다. 이 여인의 영향은 아주 크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낸다.

 

소작은 독서를 좋아했다. 머리도좋고 세상일도 능수능란했다. 그녀는 중원의 제도를 잘 알았고, 거란과 주변민족의 본성도 잘 이해했다. 이 '미녀참모' '신변브레인'은 황제의 베개옆에 미소를 지으며 낮은 소리로 군국대사를 처리했다. 야율한은 단 하루도 그녀가 없으면 안되었다. 두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한 마음으로 지냈다. 황제는 아예 소연연을 공공연히 정치대리인으로 삼는다.

 

<요사.경종본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보녕) 팔년 봄, 이월 임인일, 사관학사에 명하여 황후도 '짐(朕)'과 '여(予)'라 칭할 수 있게 하도록 하였고, 법제화한다"

 

남송의 섭융례는 <거란국지>에서 이렇게 확인해준다: 연연황후는 여주인으로 조정에 나와서 국사를 그녀의 손으로 결정했다. "게 벌을 주거나, 정벌을 하거나, 여러 신하들이 집단으로 논의하여 황후가 재결했고, 황제에게는 알려주면 그만이었다." "형벌을 내리거나 상을 주는 정사나 병력을 일으키는 일은 모조리 황후가 결정했다. 황제는 침대에 누워서 손을 맞잡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황후에게 황제와 마찬가지의 칭호를 쓰게 한 것은 그녀를 나라의 주인이 되도록 묵인한 것이다. 이 결정은 법률로 된다. 즉 소작은 '준1인자'의 정치지위를 가진 것이다. 야율현은 그저 '간판'이 되고, 소작이 요나라의 용포를 입지 않은 '여황제'가 된 것이다. 그녀는 눈꼬리를 높이고 군신을 내려다 보았고, 북중국의 모든 정치는 그녀가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요경종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13년간의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황제의 황후에 대한 신임과 의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쉽게도 산도 무너질 때가 있다. 건형4년, 즉 982년 깊은 가을, 야율현은 대동성 서쪽의 초산행궁에서 사망한다. 향년 35세이다. 죽기 전에 그는 부인과 자식을 잊지 못하고 유조에서 이렇게 특별히 당부한다: "양왕 융서로 하여금 황제위를 잇게 하라. 군국대사는 황후의 명을 들으라." 이때 소작의 나이는 32살이고, 아들인 야율융서는 겨우 12살이었다. 고아과부는 파도의 꼭대기에서 부침했다.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요나라의 조정은 어두운 구름이 뒤덮인다. 음모가, 야심가들이 하나하나 황권을 엿본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논했다. 소작은 이미 정치적인 위협이 다가옴을 느낀다. 그녀는 조급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한다. 소연연은 소복을 입고 슬픈 표정으로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았다. 이제 누구에 의지해야 할 것인가? 국세가 명확해질 때까지는 그저 혼자서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