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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자룡)

조자룡은 아두(阿斗)를 구했는가?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유려평(劉黎平)


유선(劉禪)은 유비(劉備)의 장남이고, 조운이 보호해왔다. 그러나 당시의 사서 <위략(魏略)>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선은 유비가 소패(小沛)에 주둔할 때 낳았고, 장판파에서 유비와 헤어진다. 나중에 서쪽으로 가 한중에 들어가는데, 사람에게 노비로 팔려가 가노가 된다. 주인은 유괄(劉括)이었는데, 유괄은 유선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여겨 그를 아들로 거둔다. 그리고 그를 결혼까지 시켜준다. 유선은 혼인을 했고, 자식도 낳았다.


당시 유괄에게는 간(簡)씨성의 이웃이 있었는데, 유비의 수하로 장군을 지냈다. 유선이 그를 찾아가서 자신의 신분을 얘기하자, 이는 간씨가 알고 있는 유비의 상황과 아주 들어맞았다. 그래서 상부에 보고를 하고 유선을 성도로 보낸다. 유비부자는 재회하고, 유선은 태자로 세워진다.


이 버전은 얼마나 믿을만 한가? <위략>의 작가인 어환(魚豢)은 위나라 관리이고, 촉한의 상황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유선의 이 이야기는 아무렇게나 날조한 것이고 순수하게 재미로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남조송의 사학자이자, <삼국지>의 주석을 단 배송지는 <위략>의 황당한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먼저 촉국사료에 따르면 확실히 조운이 구해주었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조운전>에는 "운신포약자이면(雲身抱弱子以免)"이라고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중의 다른 사료에도 명확히 적혀 있다. 강유가 죽은 조운의 봉호를 쟁취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당양지역(當陽之役), 의관금석(義貫金石)", 이는 촉국조정은 모두 조운이 아두를 구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배송지는 더 많은 실증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촉국의 사료에는 모두 223년, 유선이 등극할 때 17살이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다음해에 두미(杜微)에게 편지를 쓸 때, "조정금년십팔(朝廷今年十八)"이라고 하였다. 조정은 바로 유선을 가리킨다. 나아가 등극하던 해는 17살이 된다. 만일 <위략>의 주장대로라면 유선은 건안5년(200년)에 소패에서 출생했고, 등극할 때는 23살이 되어야 한다. 제갈량이 말한 것과 모순이 된다. 배송지는 이렇게 조소한다: "이는 위략의 망설(妄說)이다" 배송지는 또한 어환의 또 다른 잘못도 찾아낸다; 어환은 제갈량이 유선이 태부를 지낸 바 있다고 적었는데, 모든 사료를 뒤져 보아도, 제갈량이 유선이 태부를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


유비는 기실 아들이 하나뿐이 아니다. 장남 유선 외에 유영과 유리가 있다. 이들 형제 3명은 모두 어미가 다르다. 


유선의 장남은 유선(劉璿)으로 태자가 되며, 유선의 동상은 유요, 유종, 유찬, 유담, 유순, 유거가 있다. 북지왕 유담은 성도가 함락할 때 자살한다. 유선은 종회의 난때 피살당한다. 나머지는 촉이 멸망한 후 모두 낙양으로 옮겨간다. 311년, 흉노가 낙양을 함락시킬 때, 역사에서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고 불리는 사건때 유선의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이 전란중에 사망하여, "자손이 끊긴다."


손성의 <촉세보>에 따르면, 유비의 또 다른 아들 유영은 손자 1명을 남기는데 이름이 유현(劉玄)이다. 나중에 고향 사천으로 가서 이웅(李雄)의 수하로 관직에 오르고, '안락공'에 봉해진다. 345년, 이미 동진시기가 되었고, 사학가 손성은 성도로 가서 유현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