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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자룡)

"조자룡(趙子龍)"에 대한 역사적 진실

by 중은우시 2008. 3. 11.

 

<<삼국연의>>는 사람들이 가장 재미있게 읽는 책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삼국연의>>의 내용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만일 허구를 벗겨내버린다면, 가장 먼저 신화에서 끌어내려질 사람은 아마도 제갈량(諸葛亮)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된 사람은 제갈량 뿐이 아니다. 두번째로 허구가 많이 포함된 사람은 아마도 관우(關羽)일 것이다. '온주참화웅'의 사실도 없었고, '안량은 죽였지만 문추는 죽이지 못했고', '오관참육장'도 없었고, '화용도에서 조조를 붙잡았다 풀어준 사실'도 없었다. 이들 두 사람의 소설상의 이미지와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에 대하여는 이미 많이 알려진 바 있다. 이들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되었으나, 진면목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지지 아니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조자룡", 즉 "조운(趙雲)"이다.

 

조운은 원래 공손찬(公孫瓚)의 부하였는데, 공손찬이 유비에게 보내어 전해(田楷)와 함께 원소(袁紹)에 항거하게 하였다. 조운은 유비를 따르며 그의 말을 몰았다. 조운은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로 여러가지 활약을 하게 된다. 정사에 나오는 그의 활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 당연히 장판교의 활약이다. 장판교에서 있는 일에 관하여 여러 사적에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 조운전>>: 선주(先主, 유비)는 조공(曹公, 조조)에게 쫓겨서 당양(當陽)의 장판(長板)에 이르러, 처자를 버리고 남으로 도망쳤다. 운(雲, 조자룡)은 어린 아들을 안았으니 바로 후주(後主, 유선)이며, 감부인을 보호하였으니, 바로 후주의 모친이다. 모두 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운별전>>: 운별전에 이르기를, 선주가 패하자 어떤 사람이 조운은 이미 북으로 갔다고 말했다. 선주는 손으로 극을 잡고 긁으면서 말하기를 "자룡은 나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 곧이어, 조운이 도착했다.

 

<<삼국지. 장비전>>: 표(表, 유표)가 죽었다. 조공(조조)이 형주로 들어왔고, 선주는 강남으로 도망쳤다. 조공이 추격했다. 하루낮하룻밤에, 당양의 장판에 이르렀다. 선주는 조공의 병사가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비(飛, 장비)가 20기를 이끌고 뒤를 막았다.

 

<<삼국지. 선주전>>: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조공은 정예기병 5천으로 급히 추격하게 했다. 하룻낮하룻밤에 300여리를 추격해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기와 도망쳤다. 조공은 사람과 물자를 많이 획득했다

 

<<자치통감. 65권>>: 비(備, 유비)가 이미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조(操, 조조)는 정예기병 오천으로 급히 추격하게 했다 하룻낮하룻밤에 300여리를 추격해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렀다. 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등 수십기와 도망쳤다. 조는 사람과 물자를 많이 획득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삼국연의>>에 묘사된 것처럼 조운은 아두(유선)를 안고, 수십만 조조의 군중에서 일곱번 들어갔다 일곱번 나오면서, 50여명을 베었다는 소설내용은 많이 과장되고 윤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실제의 상황은 조조의 군대가 몰려오자, 유비는 처자식은 돌보지 않고, 주변에 있던 부하장수 수십명과 먼저 도망치고, 유비의 처자식을 돌보던 조운은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워서 바로 뒤쫓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운별전에서 '조운도 곧 도착했다'는 문구가 이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군대도 수십만대군이 아니라, 하룻만에 300여리를 추격해 피로한 조조의 기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 기록에 의하면, 조운이 적의 목을 베었다든지 하는 점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운채 계속 도망을 친 것이지, 전군의 목을 벤다던지 하는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손부인이 유선을 오나라로 데려가려는 것을 막았다.

 

손권은 비(유비)가 서쪽으로 익주에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선박을 보내어 여동생(손부인)을 맞이하려 하였다. 손부인은 유비의 아들인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의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장비, 조운이 부대를 이끌고 장강에서 손부인의 배를 막았다. 그리하여, 유선을 데리고 되돌아올 수 있었다.

 

셋째, 익주를 취할 때 조운이 두 성을 취하다.

 

제갈량, 장비, 조운등의 장병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했다. 오직 관우만 남겨서 형주를 지키게 했다. 부대를 나누어 조운은 외수에서 강양, 건위를 평정했고, 장비는 파서, 덕양을 평정했다.

 

넷째, 공영계(空營計)

 

조조는 쌀을 북산의 아래로 옮겼다. 황충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쌀을 취하려고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익군장군 조운이 수십기를 이끌고 군영을 나가 살펴보았다. 마침 조조가 병사를 대거 이끌고 나와서, 조운은 황급히 그들과 맞부닥쳤고, 뚫고 나왔다.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퇴각했다. 위나라 병사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이면서 군영아래로 몰려왔다. 조운은 군영에 들어간 후, 대문을 크게 열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쳤다. 위나라병사들은 조운이 매복을 두었는지 의심했다. 조운은 북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강한 활로 위나라병사를 쏘았다. 위나라병사는 깜짝 놀라서 서로 짓밟았고, 한수에 떨어져 죽는 자가 많았다. 유비가 다음 날 아침에 조운의 군영으로 와서 전날 전투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룡은 온 몸이 담(膽)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섯째, 기곡(箕谷)

 

제갈량이 병사를 일으켰을 때, 사곡도를 통하여 공격한다고 겉으로 말하고는, 조운, 등지를 의군(疑軍)으로 보내어 기곡을 지키게 하였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曹眞)이 무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다. 조운, 등지는 약한 병사로 강한 적에 대응하다보니, 기곡을 잃었다. 그래도 무리를 모아서 잘 지키는 바람에 대패(大敗)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일로 진군장군으로 강등된다.

 

조운이 활약하는 정사상의 이 다섯번의 전투를 보면, 성을 공격하여 취한 것은 단 한번이다. 그것도 이미 피폐해진 익주의 두 군현이다. 이때 유비는 이미 면죽(綿竹)을 격파했고, 장비는 또 다른 노선을 따라 공격하고 있어서, 성 두개는 거의 거저 주운 것이고 실패하기가 오히려 어려운 임무였다. 나머지 네번은 그저 패전하였거나, 패전중에 어찌어찌하여 겨우겨우 대패를 면하게 하는데 기여하거나, 주요인물을 구출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정도이다. 기록상 그는 적군의 유명한 장수를 죽인 적도 없고, 군사상 요새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례도 없으며, 대형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도 없다.

 

조운이 비록 무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정치적인 안목은 아주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유비가 사천(익주)을 얻은 후에 성도의 전답을 여러 장수에게 분배하고자 하였다. 이때 조운은 "곽거병은 흉노를 아직 소멸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집안을 위하여 쓸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적은 흉노뿐이 아닌데 어찌 편안함을 구하겠습니까. 천하를 평정한 후에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익주인민은 오랜동안의 전란으로 고통을 겪어왔으니, 전답을 그들에게 돌려주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나중에 다시 징용하여야 그들의 환심을 살 것입니다. 그들이 아끼는 것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둘째, 유비가 관우의 죽음후 손권을 치려하자, 익군장군이었던 조운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만일 위를 먼저 멸한다면, 손권은 알아서 항복할 것입니다. 이제 조조는 비록 죽었지만, 그 아들인 조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민심을 따라, 하루빨리 관중을 취하고, 황하와 위하의 상류를 차지하여 역적을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관동의 사람들도 왕의 군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위나라를 놔두고 오나라와 먼저 싸워서는 안됩니다."

 

셋째, 조운의 군사물자에 여유분이 있었다. 제갈량은 장사들에게 나눠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운은 "군사적으로 실적이 없는데, 어찌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물건을은 적안고에 모두 넣어두었다가 10월이 된 후에 겨울에 하사품으로 내려야 합니다" 제갈량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재를 보면, 조운은 대국관과 정치적 판단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 전후좌우 4장군(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게 결핍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비록 군사적으로 큰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큰 잘못이나 참패도 없었던 것이다. 유비가 그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변에 둔 것은 그의 이런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한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대국관과 장기적인 정치적안목이 있어, 곁에 두고 의견을 듣기에도 아주 적합하다. 성도의 무후사(武侯祀)를 가면, 순평후(順平侯) 조운(趙雲)이 무관(武官) 자리가 아니라, 문관(文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