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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두황후(竇皇后): 당고조 이연은 왜 선비족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는가?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왕덕항(王德恒)

 

두황후는 태목황후(太穆皇后)라고도 부른다. 밀반적으로 모두 그녀를 당고조 이연의 황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진정 황후가 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이연이 거병하여 수나라에 반기를 들기 3년전에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망한 장소는 사서에 탁주(涿州)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인 지점은 바로 현재의 북경시 방산구의 두점(竇店)이다. 당시에는 탁군의 관할이었고, 두 곳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그녀의 출생지는 경조 시평(지금의 섬서성 흥평현)이다. 그녀의 부친인 두의(竇毅)는 북주(北周)의 대사마였다. 수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관직이 상주국(上柱國), 정주총관에 이르고 작위는 신무공을 받았다.

 

두씨집안은 선비족 귀족이다. 많은 사람들은 두씨집안이 동한 두무(竇武)의 후손인 줄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선비족 흘두릉식(紇豆陵式)이 개명된 것이다. 두씨의 모친은 북주무제의 누나인 우문씨이다. 그녀는 양양장공주(襄陽長公主)에 봉해졌으니, 두씨집안은 명실상부한 황족이다. 

 

북주말기, 두의는 경성 장안에서 공개적으로 딸 두씨의 사위를 뽑는다. 이것은 바로 누가 이 명문집안의 딸과 결혼하느냐이고, 누가 황족의 친척이 될 수 있느냐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성내외의 귀족청년, 명문가자제들은 모두 두씨집안의 아가씨를 처로 맞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두의가 사위를 고르는 방식은 아주 독특했다. 첫째, 그는 집안과 재산은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씨집안에 넘치는 것이 금은보화였고, 그 자신이 황친에 공신이어서 더 이상 보태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용모와 기도를 중시하지 않았다. 사위를 고르는 방식도 아주 특별했다. 정원에 병풍을 놓고, 병풍에 두 마리 공작을 그렸다. 구혼하려는 자는 늙고 젊고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불문하고, 백보의 바깥에서 반드시 활을 쏘아 공작을 맞추어야 했다. 그러면 두씨집안의 사위후보가 될 수 있다. "활을 쏜 자는 수십명에 이르렀는데, 모두 맞추지 못했다. 고조(이연)이 마지막으로 쏘았는데 각각 눈 1개씩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두씨아가씨는 고조에게 시집오게 된다."(<구당서본기>
 

두의가 사위를 고르는 방식을 공표하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활을 쏘았다. 과거에 집안에 좋은 딸이 있으면 매파가 드나들어 문지방이 다 닳는다는 말이 있다. 이때는 두씨집안으로 사위가 되려고 찾아오는 남자들로 문지방이 다 닳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공작을 맞추었다. 다만 두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왕공귀족의 자제들이 하나 하나 실패하고 돌아간다. 며칠이 지나자, 두씨집안을 찾아오는 사람의 수가 확실히 줄었다.

 

이 일을 얘기하자면 재미있는 점이 잇다. 두의는 사위선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화살 2개씩을 나누어 주었고, 그저 공작을 맟추라고만 말했지 공작의 어느 부위를 맞추라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수십명이 와서 비무를 했으니, 중간에 궁술이 뛰어난 자들은 공작을 깃털을 맞추기도 하고, 공작의 벼슬을 맞추기도 했다. 수당시대에 궁술이 뛰어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이연이 나중에 사돈관계를 맺는 장손황후의 부친 장손성(長孫晟)은 화살 하나로 새 두마리를 맞힐 수 있는 신궁이었다. 북주는 무술을 숭상하여, 뛰어난 궁수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이 일은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혹시 두씨 소저가 미리 이연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연이 실제로는 궁술실력이 2등 3등임에도 1등으로 끌어올려 결혼한 것이 아닌가. 즉, 그 십여명은 모두 사위가 될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두씨는 이연이 마음에 들었다. 뒤에서 몰래 '눈'을 맞추라고 얘기해준 것이 아닐까?

 

두소저의 비무초친은 분명히 정교하게 기획된 것이다. 먼저 조직을 동원해야 하고, 최소한 공고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활쏘는 자 수십명'이 참가했겠는가. 이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그저 들러리일 뿐이었던 것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비무초친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남성을 선택하는 방식이 된다. 그리고 쌍방의 가족의 가장들에게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남녀당사자들의 자유혼인과 부모포판(包辦)결혼과의 양자 사이의 절충인 셈이다. 비무의 방식을 빌어 약간의 리스크를 안고, 여자측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비무초친은 여성의 완강한 개성을 드러내면서 주류문화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협정의담의 여성성격이 두드러진 심미적 표현이다. 일정한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을 속박하던 족쇄를 풀어버린 것이다. 이런 혼인형식은 상무의 시대에나 상무의 민족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아무도 맞히지를 못한다. 부인 양양장공주는 남편을 원망하기 시작하다. 하필 이런 방식을 내놓아서, 사위를 고르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두의도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담담한 듯이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공주를 위안시켰다: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딸은 기상(奇相)을 타고 나서, 지혜가 비범합니다. 반드시 기인을 배우자로 맞이할 것입니다. 부인은 선제(先帝)가 옛날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원래 두씨소저는 태어나자마자, 머리카락이 어깨에까지 내려왔고, 세 살이 되었을 때는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끌렸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기이하다고 말했다. 4,5살이 되었을 때는 글씨를 쓰고 글을 읽었으며, 책과 이치를 알았고, 재능이 남달랐다. 이 아가씨는 총명하고 아름다울 뿐아니라, 기억력도 아주 뛰어났다. <여계>. <열녀>등의 전을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그녀의 외삼촌인 북주무제 우문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서 기른다. 자주 자신의 곁에 있도록 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게 된다.

 

당시 중국의 북방은 3갈래의 세력이 있었다. 북제, 북주 그리고 돌궐.

 

북주와 북제는 대항과 쟁탈과정에서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돌궐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중 아주 중요한 방식은 돌궐과의 화친이다. 즉 황제의 공주를 돌궐의 칸에게 부인으로 보내는 것이다. 돌궐에서는 속칭 "가하돈(可賀敦)"이라 불렀다. 가장 좋기로는 돌궐공주를 취하여 황후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더욱 보장되었다.

 

북주는 5,6년의 노력을 거쳐 여러 사절단을 돌궐에 사신으로 보낸다. 돌궐의 목간칸(木杆可汗)은 마침내 자신의 딸을 주무제에게 시집보내기로 동의한다.

 

목간칸은 아사나가족의 백인종의 유리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과라가 죽자 동생 애근이 칸에 오른다. 목간칸이라 불렀다. 애근은 일명 연도(燕都)인데, 용모가 기이했다. 얼굴은 1척여로 넓었고, 그 색깔은 아주 붉었으며, 눈은 유리와 같았다." 구라파인종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던 것같다.

 

이 돌궐공주는 아마도 부친의 용모를 이어받아 하얀 피부, 파란색이 눈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보기에는 아름다운 미모의 특징이지만, 당시로서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오랑캐 족속으로 보았다. 어쨌든 좋게 보지는 않았다.

 

거기에 주무제는 자신이 많은 인력과 재물을 들여서 데려왔다고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맞이한 후, 냉담하게 대한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아마도 주무제는 그녀로 인하여 돌궐의 통제를 받게될까봐 우려했던 것같다고 한다. 그래서 아사나황후에 대하여 전혀 호의를 나타내지 않고, 아사나씨를 멀리한다. 이때 나이 겨우 6,7살이던 두씨는 황제인 외삼촌에게 말한다: "사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돌궐은 아직도 강합니다. 원컨대 외삼촌은 천하창생을 중히 여겨서 황후에게 잘 대해주십시오. 외삼촌이 만일 이를 통하여 돌궐을 다독거려 돌궐의 원조를 얻을 수 있다면, 강남, 관동은 더 이상 우리의 강산을 교란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강남은 진나라를 말하고, 관동은 북제를 가리킨다.

 

주무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멍해진다. 그 후에 이 어린 아가씨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여기고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아사나황후를 점차 총애하기 시작한다. 과연, 1년후, 목간칸은 기병1만을 보내어 북주의 대장군 양충과 연합하여 북제를 공격한다. 이렇게 하여 북주의 세력은 더욱 강해진다. 그것은 두씨가 처음 역사에 그 면모를 드러낸 사건이다.

 

사후에 주무제는 두의에게 감탄하며 말한다: "이 여자아이는 재능과 용모가 비범하니, 함부로 아무에게나 시집보내지 말라"

 

두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이 일을 양양장공주에게 말한다. 그래서 딸을 위하여 좋은 사윗감을 골라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두씨의 이 말은 두의가 시킨 것이라고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주무제가 돌궐에 보낸 가장 중요한 초친사신이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난 후 한 사람이 찾아와서 비무에 참가하겠다고 한다. 그는 소년이었고, 16,7세의 나이였다. 그는 시원스럽게 생겼고, 용모가 웅위(雄偉)했으며, 영무한 가운데 활달한 기운이 있었다. 두의는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인사를 한 후, 이 소년은 자신의 집안내력을 말한다: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연)淵)입니다. 자는 숙덕이고 섬서 성기 사람입니다. 부친은 이병(李昞)으로 당국공, 안주총관, 주국대장군입니다. 다만, 이병은 이연이 7살때 사망한다. 두의는 그의 말을 듣고 원래 당국공 이병의 아들이면 장수가문출신이다. 그래서 더욱 좋아하게 된다.

 

주인과 손님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두의가 이연을 데리고 화원으로 간다. 그리고 그에게 화살 2개를 준다. 이연은 활을 들어 병풍의 공작을 향하여 슉,슉 화살 두 발을 연이어 쏜다. 하나는 왼쪽 눈에 맞고, 하나는 오른쪽 눈에 맞는다. 두의는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해 마지 않는다. "노부가 오늘에서야 멋진 사위를 얻는구나!" 그리하여 혼인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집안이 맞을 뿐아니라, 재능과 용모도 맞았다. 그러다보니 장안성의 사람들은 모두 그 둘을 부러워한다.

 

이연이 두씨를 부인으로 맞이한 후,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원래, 수국공 양견이 북주의 우문씨로부터 황제위를 넘겨받아 북주가 멸망한 것이다. 두씨소저를 취할 당시에는 외삼촌 주무제가 젊은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 일을 들은 후에 대성콩곡한다. 분명히 어린아이가 생떼를 쓰는 것같이 울었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손짓발짓을 하면서 침상에서 땅바닥에 떨어진다. "내가 사내의 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내가 남자였다면 외가의 어려움을 구해주러 갔을텐데." 놀란 두의와 양양공주는 급히 딸의 입을 막는다. "착한 딸아. 함부로 말하지 말라. 만일 이 말이 당금황상에게 전해진다면 일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할 수도 있다."

 

그들은 양견의 수단이 악독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정에서 우문씨를 동정하던 대신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이 말은 <구당서열전제일>에 기록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수문제가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는다. 두씨는 크게 곡을 하며 말하기를, '내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함스럽다. 외삼촌의 어려움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두의와 양양장공주는 급히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너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 우리 일족이 멸문될 수 있다." <북사>에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투상대곡(投床大哭)"

 

두씨일족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1년을 보낸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의는 여전히 정주총독을 맡았고, 작위도 유지했다. 우문가의 인척으로, 두씨집안은 연좌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두의가 근신자수(謹愼自守)하면서 수문제를 조심스럽게 모신 외에, 그와 이연의 집안이 혼인을 맺은 것도 약간 관계까 있다.

 

원래, 이연과 양견은 비교적 친밀한 친척관계이다. 이연의 모친은 북주 주국대장군 독고신의 넷째딸이다. 수문제 양견의 독고황후(일곱째 딸)의 언니이다. 궁내 혹은 친척관계에 대한 처리에서 독고황후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녀는 절대적인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자형인 이병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독고황후는 자주 언니를 보살펴주게 된다. 당연히 영준한 외조카 이연도 아주 좋아한다. 이연과의 관계때문에, 두씨집안은 신왕조인 수왕조에서도 황친국척이 될 수 있었다.

 

두씨가 이연에게 시집간 후, 과연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사이가 좋았다. 두씨는 어려서 황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치를 잘 알았고, 사서를 읽기를 좋아했으며 서예에 뛰어났다. 부부는 자주 서재에서 글을 썼다. 두소저는 남편의 필적을 모방해서 거의 어느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익힌다. 부부간이든 고부간이건 모두 사이가 좋았다. 이병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모조리 이연의 모친 독고씨 한 사람이 주재했다. 그녀는 일생동안 힘들게 살았고, 말년에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두씨는 세심하게 보살폈다. 한번은 독고씨의 병이 아주 위중했는데, 집안의 며느리들은 모두 독고씨의 성깔이 대단하여 모시길 꺼려했다. 두씨만이 밤낮으로 그녀의 곁을 지킨다. 독고씨는 이 며느리를 아주 좋아한다. 다시 말해서 독고씨의 큰언니는 주명제 우문육의 황후이고, 두씨의 외숙모이다. 이런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부간의 관계도 더욱 친밀했다.

 

이 기간동안 두씨는 이연과의 사이에 4남1녀를 낳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씨가 이연의 정치참모역할을 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