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일재경주간
20년, 무엇이 일어났는가? 이 방대한 시장은 이미 헐리우드식의 영화생산체계를 갖추었는가?
<그래비티>는 금년 오스카상의 최대수상자가 되었다. 그것은 최우수촬영, 최우수편집, 최우수시각효과를 포함한 6개의 기술류형의 상을 휩쓸었을 뿐아니라,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은 최후수감독상을 손에 거머쥐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유니버셜 픽쳐스는 이 소식을 듣고 아마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원래 그들의 프로젝트이다. 그런데 영화촬영전에 그들이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비티는 중국시장에서 4.3억위안의 매표수입을 욜렸는데, 유니버셜의 그 어떤 대작영화보다도 높은 금액이었다.
이들 기운빠지는 소식과 함께 놓인 것은 간략하지만 쉽게 건너뛰게 되는 뉴스이다. 2013년 11월, 유니버셜 픽처스의 모회사인 NBC Universal의 부회장 Ron Meyer가 중미영화서미트포럼에서 중국에 사무실을 설립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대주주인 컴캐스트(Comcast)는 이 사무실이 앞으로 NBC Universal의 자원을 통합하고, 동시에 베이징 통저우의 유니버셜 촬영세트장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이제 헐리우드 6대회사는 중국내지에 모두 독립된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1994년, 워너 브라더스는 중국내지에서 <The Fugitive>를 배급했다. 이는 헐리우드가 중국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이 시장의 놀랄만한 발전추세와는 달리 헐리우드 6대회사는 이 시장에 대한 인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결핍'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만일 그들이 20년전에 이미 사람을 중국에 파견했다면, 이는 단순한 탐색이 아니라, 헐리우드와 유사한 체계를 배양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모든 사람들은 거의 같은 출발점에 서 있다.
우리는 개략 20년전에 중국에 온 사람을 인터뷰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그들이 무엇에 부닥치고, 그들의 눈에 헐리우드가 중국에서 어떤 과거와 미래를 가지는지에 대하여.
1995년에, 미국인 Peter Loehr는 베이징으로 온다. 그것은 이곳에서 영화 몇 개를 찍기 위해서이다. 그는 대기업을 대표하지도 않았고, 그의 직함은 기껏해야 '헐리우드인사'라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완전히 그가 일본에서 드라마제작과 연예인매니지먼트를 할 때, 장위안(張元)과 왕샤오솨이(王小帥)를 대표로 하는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접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 영화가 정말 좋다고 여겼다. 그중에서 새로운 도시젊은이들의 모습은 당시에 내지에서 유행하던 역사드라마나 농촌을 주제로한 중국내지의 영화시장과 강렬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Peter Loehr은 이를 시장의 수요라고 보았다. 그는 단순한 영화창작충동으로 방대한 주제를 만들었다: 젊은이로 하여금 영화를 찍어 젊은이들이 보게 한다.
그래서 그는 이마(藝瑪, Imar)공작실이라는 회사를 만든다. 협력대상은 이전에 MV를 찍을 때 알게 된 감독 장양(張揚)이다. 그는 자신에게 중국이름도 붙였다. 바로 뤄이(羅異)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이렇게 계획없는 직업발전계횎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중국영화시장은 이같은 열혈문예청년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1995년, 전체 중국내지영화시장의 매표수입은 1억달러였다. 영화1개가 2000만위안의 매표수입을 올려야 성공했다고 본다. 만일 지금의 시장용량으로 본다면, 최소한 5,6억위안의 매표수입이 있어야 비로소 지금과 비견할 수 있었을 정도이다. 영화배급수량은 1년에 2부만 해도 고부하가 걸리는 것이 된다.
이마는 실험품과 같은 작은 회사였고, 최초의 영화는 5개의 작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1사람의 서로 다른 시기의 감정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극본은 1년여동안 썼고, 투자자들도 모두 조급해할 정도였다.
일부 영화를 찍어냈지만, 각지의 배극업체들은 '이런 유형의 영화는 매표수입이 없다"는 이유로 배급을 거절한다. 뤄이는 카피를 들고 모든 영화관이 있는 도시를 뛰어다녔다. 현지의 배급업체의 경영진들과 여러번 술도 마셨고, 다시 영화를 틀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7주동안 28개도시에서 프로모션을 한 후에, 이마는 베이징, 상하이 및 청두 3개도시에서 상영기회를 갖게 된다. 그중 청두의 배급업체가 이 영화를 받아들인 이유는 바로 영화이름에 '마라탕(麻辣燙)'이 있었기 때문이다('마라'는 청두가 있는 사천지역 음식의 얼얼한 매운 맛을 의미하며, 마라탕은 청두가 유명하다).
결국 이 <애정마라탕>이라는 영화는 1997년 300만위안의 제작비용을 들여 3000만위안의 매표수입을 올린다. 이것은 그해 전세계를 휩쓴 <타이타닉호>의 바로 다음가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후자는 중국내지에서의 매표수입이 3.6억위안에 달했다. 이런 기록으로 뤄이는 하루아침에 촛점이 된다. '중국의 헐리우드선생'과 같은 칭호가 그의 유려한 중국어와 함게 매체에 속속 실려진다. 이들 매체의 정의 속에서 이마는 중국최초의 독립적인 영화제작, 마케팅 및 발행을 하는 민영영화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뤄이의 마케팅전략은 전체 시장을 초월했다: 예를 들어, 영화를 도시애정을 주제로 설정했고 그리고 혹은 시내버스나 TV에 광고를 냈다. 그와 접촉해본 경영진들은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이 어찌 중국으로 와서 300만위안의 저예산영화를 찍는가.
몇년이 지나자, 뤄이는 여전히 있었지만, 확실히 순조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는 촬영에 아주 시장화된 프레임웍을 만들었지만: 예를 들어, 젊은이를 주제로 하고, 도시제재를 중시하며, 풍부한 음악과 색채를 가진다. 그리고 300만위안의 촬영과 200만위안의 제작의 예산상한을 두었다...다만 그는 유사한 제재의 발굴채널이 갈수록 한계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대다수의 경우, 그의 영화는 모두 해외배급단계에서 원가를 건진다. 예를 들어, <애정마라탕>과 <세조(洗澡)>는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다. 왜냐하면 당시 매체환경은 해외관중들이 중국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대문이다. 이마의 영화는 아주 좋은 경로가 되엇다.
모든 영화인들은 영화가 제작과 배급의 두 단계로 나뉜다는 것을 안다. 전반부를 말하자면, 2000년을 전후하여 중국내지시장은 이미 대투자 대주제시리즈로 넘어간다. 이 일부분은 리안(李安)의 <와호장룡>과 장이머우(張藝謀)의 <영웅>의 국제적 영향력 때문이고, 다른 일부분은 바로 진정으로 헐리우드가 이전에는 그저 개념에 불과하던 시장에 투자를 진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뤄이는 이 시기에 자신의 제작회사 Ming Productions를 설립한다.
이어진 몇년의 기간내에, 뤄이가 투자하여 촬영한 장양의 <해바라기(向日葵)>, 싱가프로와 합작한 <차무(茶舞)>, 핀란드등 국가와 합작한 <옥전사(玉戰士)>등 몇 편의 영화가 있다. 이들 영화는 모두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해외시장을 더 많이 겨냥하고, 국내매표수입은 보통이다. 해외시장배급을 통하여 투자금을 회수한다. <와호장룡>과 <영웅>의 제작자이자 안러(安樂)영업유한공사 총재인 장즈창(江志强)은 이 시점을 헐리우드의 중국에서의 '개척기'로 본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들 거작들은 전체 시장의 성장을 불러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2000년에서 2004년까지 국내매표수입은 겨우 8.6억위안에서 15.2억위안으로 늘어난다. 15%가량의 연평균성장률로 느리게 상승한다. 본토영화시장은 시종 달아오르지 않는 상태로 있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영화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모두 직면한 곤경이었다.
2006년 뤄이는 헐리우드의 유명한 매니지먼트회사 CAA의 중국자회사 경영진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이 사건을 헐리우드의 중국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뤄이 개인이 잠시 문예청년시기와 고별을 한 시기라고 보아도 좋다. CAA는 중국에서의 사업모델이 미국본사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이 시장에 진입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경쟁적수인 WME가 이미 한걸음 먼저 상하이에 사무실을 설립했는데, 자신은 자원이 더 많으므로 그들보다 뒤쳐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뤄이가 영화를 시내버스에 광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약간은 한걸음 앞서간 것이다. 중국영화시장이 진정 번영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다. 2010년의 <아바타>가 기록적인 13.2억위안의 매표수입을 올렸건, 아니면 중국내지 스크린수량이 2008년연말에 5000개로 늘어났던, 이는 모두 시장의 용량이 완전한 산업체인을 지ㅐㅇ할 수 있고, 비교적 복잡한 회사운영도 가능하다는 것을 예시했다.
이들 사정을 얘기할 때, 뤄이는 그다지 유감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도 '나는 하는 일마다 모두 약간 빨랐던 것같다"고 얘기하기는 하지만.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약간 편한 것같다. "현재 가장 다른 점이라면 이 분야에 뛰어들면서 이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계속 해나갈 수 있다. 내일이 없다고 말하는게 겁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아직 최초의 독립제작자의 그 뿌리깊은 우려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용카드도 없고, 주머니속의 현금을 넣어서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고, 국유회사의 지급기한은 계속 늘어나고, 몇 달의 캐시플로우만 끊겨도 전체회사가 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가 이 시장이 번영하는 것을 볼 때 아주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이것은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2012년 4월, 뤄이는 Legendary East(傳奇東方)의 CEO를 맡는다. 이것은 Legendary Pictures의 해외자회사이다. 레전저리 픽처스가 제작한 <인셉션> <Batman: The Dark Knight Rises>는 모두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중잉(中影)과 합작을 하였다. 뤄이가 해야할 일은 동방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황타지와 특수효과를 특색으로 하는 대작영화이다.
"소위 대작은 1억달러이상의 영화이다. 어떤 특수기법을 사용하고 싶든 다 사용할 수 있다. 어떤 배우를 쓰고 싶든 다 쓸 수 있다. 이런 대작이 중국에서 기실 필요하다." 그는 말한다. 레전더리 이스트는 저예산영화는 절대 찍지 않는다. 이상적인 제품은 <스파르타300용사>에 더욱 접근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문화를 미국상업영화의 구조에 집어넣은 것. 아마도 중국문화도 유사한 방식으로 국제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투자액이 1억달러에 접근하는 영화 하나가 10월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뤄이는 말한다. 자신은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흥분해본 적이 없었다고.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제품모델을 건립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아닐 수도 있다. 헐리우드는 중국에서의 발전이 비록 20년이지만, 시작과 현상은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뤄리는 전체 시기를 3단계로 나눈다: 제1단계, 헐리우드 독립제작자가 중국으로 와서 독자적으로 구르면서 기회를 찾는 시기; 제2단계. 대작영화사들이 진입하여 합작으로 영화를 찍는다. 다만 이 단계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제3단계가 금방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헐리우드대기업의 기대가 이미 금전을 넘어섰다. 만일 국제시장에 진입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중국영화인들은 본토자금으로 제작회수율이 더욱 좋은 저예산영화를 찍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회사는 아주 많다. 다면 소스는 여전히 문제이다." 뤄이는 시장수요와 상대적으로 현재의 좋은 제품은 아직 부족하다고 본다. 다만 그래고 역시 그 말이다. 이미 생존해나갈만한 산업은 충분히 형성되었다. 그는 말한다. 그 속에서 개인의 성패는 아마도 재능과 노력의 성분이 있을 것이지만, 운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 <애정마라탕>을 상영할 때, 상영기간이 <타이타닉호>와 겹치지 않았다. 만일 같은 날 상영했다면 '아마도 우리가 오늘 대화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바바라 로빈슨(Barbara Robinson)은 소니중국에서 11년간 일했다. 그러나 마지막 몇년동안 중국에서는 실질적인 의미의 영화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것은 모두 "값싸게, 배경을 찍는 곳"에 불과했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결정자라고 할 수 없다. 1980년대 후반, 바바라는 Era International이라는 타이완영화사에서 일을 했고, 디즈니, 컬럼비아 및 MGM의 영화테이프를 배급하는 것을 책임졌다. 판단기준은 현재와 차이가 크지 않았다. 액션영화가 비교적 인기있었고, 애정영화는 문화차이로 그다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리고, Cast(배우진용)가 아주 중요했다.
1998년, 바바라는 소니로 가서 아시아시장을 관리하고, 주로 배급과 영화투자를 책임졌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녀는 이 회사의 전체 시장의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다. 이 이름없는 시장에서 이름없이 일을 했다. 소니이건 바바라이건 모두 낮은 자세였다.
그래서 장이머우와 같은 인물이 적극적으로 찾아와서 합작을 얘기할 때, 바바라는 아주 기뻤다. 그녀와 장이머우는 타이완에서 일할 때 알게 되었다. 1989년부터, Era International은 장이머우의 <대홍등고고괘(Raise the Red Lantern)>와 <활착(活着, To Live))를 배급한 바 있다. 다만 이번 합작은 옛친구간의 신뢰뿐아니라, 상당히 명망있는 감독과 국제적인 배급망을 갖춘 대기업간의 담판이었다. 다만 바바라때문에 쉽게 서로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일 뿐이다.
소니의 배급과 프로모션하에, 2000년, 장이머우의 <나의 부친모친>은 제50기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도 없어서는 안된다>는 제56기 베니스국제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장이머우는 바바리에게 사인을 해준 바 있는데, 종이 위에 "농민감독"이라고 적었다.
2000년, 바바라의 팀은 중국내지에서 합작영화촬영을 시작한다. 이전에는 비록 <와호장룡>과도 같은 중국어영화의 발행경험이 있었지만, 수익은 주로 해외배급에서 나왔고, 투자는 본토에서 나왔다.중국시장에 대한 이해에 기하건, 아니면 당시 중국시장 자체의 산업체인발전에 기하건 이것은 모두 리스크가 아주 큰 일이었다.
소니가 결국 체결한 합작당사자는 화이(華誼)였다.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이 합작은 중국영화발전에 하나의 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바로 "포편제도(包片制度)"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찍든, 예산은 고정숫자이고, 시스템적인 계산에 따라 비용지출할 필요가 없었다. 바바라는 홍콩영화인을 모셔와서 전체 예산계산방법을 중문으로 번역하고, 다시 간략화하였다. 이것이 소니와 화이간의 의사소통하는 기초문건이 된다.
최초에 쌍방의 합작은 소니에 있어서, 펑샤오강(馮小剛)의 중국내지에서의 매표수입전망을 좋게 본 것이다. 화이에 있어서는 어떻게 영화 자체를 제작하고 배급하는지 배우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바라가 아마도 바바라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역사이다(최소한 그녀가 공헌자라는 입장에서 언급하지 않는). 그녀는 학습자의 내심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소니는 중국시장에서의 안목이 장기적이다'라는 한 마디로 개괄하는 편을 원한다.
제작자인 두양(杜楊)이 보기에, 이런 학습은 크고 작은 모든 것에서 이루어진다. 그녀는 당시에 화이의 선전배급책임을 맡았는데, 합작때 처음으로 이렇게 상세한 예산표를 보게 된다. 이전에는 겨우 한 두장 짜리의 것이었는데, '못 하나까지도 계산하는" 문건으로 바뀐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 장면의 설치에서 철거까지의 비용과 시간을 모두 세분화할 수 있었다. 촬영계획도 이때 처음으로 중국영화인의 시야에 들어온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 처음으로 '기한초과'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기간이 넘으면 넘지라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모두 놀고 있었고 할 일이 없었으니까." 두양의 말이다.
영화는 이런 합작모델하에서 처음으로 그다지 예술적이지 않은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법률책임인사가 개입할 때 혹은 제작자가 매일 보고서를 검사하지 현장으로 가서 촬영을 감독하지 않을 때가 그러하다. 두양은 두 분야가 컬럼비아와 가장 많이 소통했다: 제작부문, 주로 보고서를 보는 것을 책임진다; 법률부문. 미국법률에 부합하는 촬영인지에 대한 것을 검사하는 책임을 진다.
매체선전도 마찬가지였다. 화이가 <대완(大腕)>를 배급할 때, 소니는 <와호장룡>의 문건을 들고온다. 화이는 이 문건에 따라 주창인원과 매체의 접촉을 몇 개의 조로 나눈다 그리고 어떻게 평면매체와 인터뷰할 것인지를 교육훈련시키고, TV에서는 어떻게 다른지, 서로 다른 시간뿐아니라, 선전포인트도 ㄷ르게 고려한다. 기자회견후 이 일 자체가 매체가 보도하는 소재가 되었을 정도이다.
모든 분야에서의 합작하에, 언어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된다. 그래서 바바라는 "라오바(老巴)"가 된다. 이 이름은 그녀의 일처리방식이 시원시원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친절하다는 것때문이다. 모든 컬럼비아의 직원은 회의때 중국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바바라가 정한 세부사항중 하나이다.
다만, 헐리우드의 소니 의사결정권자들이 보기에, 이런 장기적인 투자는 희망이 별로 없다. 2005년, 소니는 시장을 옮기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10년이상 투자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시장이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소니의 수입구조는 매표수익, TV방송국의 TV판권 및 DVD판매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매표수입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시기 소니는 인도, 러시아, 브라질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시험했다." 바바라의 말이다. "왜냐하면 소니는 비록 글로벌 회사이지만,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헐리우드영화였다. 어떻게 돈을 쓰고 어떻게 투자를 회수하는지 알았다. 어느 한 국가의 영화를 찍을 때는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시장에 대한 투자가 너무 많으면 회사의 전체전략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니가 이전한 후, 바바라는 여전히 4년간 남아 있는다. 그녀는 그녀의 회사에 비하여 시장의 변화를 더욱 많이 보았다. 이들 변화는 기실 모든 시장참여자들이 다 본 것이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시장은 완벽해졌다. 더욱 중요한 점은 본토의 영화회사가 더 이상 헐리우드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자라는 점에 있어서 오히려 헐리우드가 더욱 중국을 신경썼다.
그후, 2009년, 몸과 마음이 모두 피로해진 바바라는 잠시 중국을 떠난다.
Dede Nickerson의 "헐리우드-중국" 연대표에 따르면, <패왕별희>가 세계에 중국영화의 예술창조성을 보여준 후, <아바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베이징올립픽은 전체 시장에 기회를 부여한다.
Dede Nickerson의 이런 발언권은 그녀가 바바라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헐리우드대기업의 중국내에서의 탐색에 참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2000년이후, 그녀는 디즈니 산하의 미라맥스회사의 아시아 담당자로서 제작과 투자프로젝트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소니중국의 제작과 전략발전부 책임자가 된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그녀가 당금의 중국영화시장에서 아직도 활약하고 있으며, 최근에 소니는 장원(姜文)의 <일보지요(一步之遙)>에 투자했다.
만일 "헐리우드출신"이라는 신분을 빼고나면, Dede가 중국영화시장을 언급할 때, 얘기하는 내용은 기실 그녀의 중국동료들과 별 차이가 없다. 영화관 수량의 급속한 증가는 시장의 소비습관을 불러일으켰고, 인터넷문학은 더 많은 영화소재를 제공했다. 그녀는 <소시대(小時代)>를 좋아하고, <치청춘(致靑春)>를 좋아한다.
다만, 그녀는 3D에 대하여 언급할 때면 예상외라는 반응이다. 그녀는 <아바타>를 언급한다. 그녀는 이 영화가 시장의 발전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특수효과를 위한 특수효과를 만든 영화가 이 시장에 출현한 것이다. 비록 <아바타>가 직접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특수효과는 단지 마케팅의 포인트였고 간접적으로 중국영화산업체인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20세기폭스영화오락회사의 CEO인 James N. Giaopulos는 중국시장을 얘기하면서, 예상외라는 말투를 보인다. 다만 그는 이 시장의 신속한 발전에 더욱 감탄한다. "중국의 영화관은 대부분 면모를 일신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디지탈기술을 채택하고, 아주 잘 3D효과를 나타낸다. 그들은 전세계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신의 최고의 영화관이다."
이것이 바로 3D가 이렇게 보급된 객관적인 원인이다. Dede가 산업체인층면을 얘기할 때, 중국의 영화제작자는 특수효과를 일종의 '감각을 조정하는 도구"로 본다. 컨텐츠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수효과회사인 Base FX의 창업자중 하나인 세닝(謝寧)은 하나의 전형적인 장면을 얘기한다; "이상적인 상황하에서, 극본단계에, 우리같은 회사가 개입해야 한다. 전체 스토리의 설계에 참여하고, 제작자를 도와서 어떻게 비용을 줄일 것인지를 얘기한다. 다만, 실제로 중국특수효과산업은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감독과 제작자는 처음부터 특수효과회사를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전체 영화를 다 찍을 때쯤에서야 특수효과회사에 던져주고 하라고 한다."
"나는 현재 겁이 난다. 매일 영화관에서 엉터리영화를 보고 있다." Dede의 말이다. "정말이다. 어떤 영화는 이 업계에 나와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특수효과를 대표로 하는 기술변혁, 시장의 성장과 체계의 결핍이 가져오는 모순은 일종의 '대국굴기'의 역량속에서 특히 복잡하게 변한다. Dede는 올림픽은 전세계로 하여금 중국의 에너지를 보게 했다. 이전에 얼마나 많이 좌절했건, 헐리우드회사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시장이 마침내 정교하게 기획해야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헐리우드의 중국에서의 상태는 진정으로 변화하지 못했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 헐리우드가 시장을 열려면, 반드시 누군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 Dede는 자신이 할 일은 단지 더 많은 중국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젊은 소비자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소비하며, 어떻게 위챗(중국판 카톡)을 하는지. 이런 일들은 헐리우드가 자주 중시하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우리는 아주 좋은 시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개발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개발할 수 있다. 관중이 있고, 영화관이 있으며, 매표수입이 있다. 이전과 달리, 현재 해야할 일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가 바로 현재이다."
1993년, 워너브라더스가 중국에 사무실을 낸 이래, Ellen Eliasoph는 책임자를 맡아 왔다. 이 묘사의 복잡한 말 속에 이 헐리우드대기업의 중국에서의 20년동안의 변신을 엿볼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중국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최초의 합자영화제작회사를 만든 헐리우드회사이다. 최초로 수입영화계약을 체결한 곳이며, 최초로 멀티플랙스를 개발한 곳이다. 일찌기 1949년이전에 워너브라더스는 중국의 몇몇 도시에서 <카사블랑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배급한 바 있다.
그래서 '장기투자안목'으로 말하자면, 워너브라더스는 다른 어떤 헐리우드회사보다 먼저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Ellen은 그녀가 <The Fugitive>수입계약을 체결할 때를 회고한다. 워너브라더스를 대표하여 중잉에 "우리는 영화를 수입하는 것뿐아니라, 수입을 재투자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잉의 대답은 "미안하다. 우리는 단시 수출힙회사이다. 합작영화를 찍을 수는 없다."
2004년, 워너브라더스와 중잉, 헝덴(橫店)은 합자로 영화제작회사를 설립한다. 워너브라더스의 당시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일부 중소형영화에 투자하고, 약간의 젊은 감독을 배양한다. 다만 중잉이 더욱 바란 것은 이 시장에 매년 2,3편의 대작영화를 내놓는 것이었다. '그들의 산업화 계획과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 달랐다. 우리는 미래를 더 많이 생각했고, 그들은 급속히 시장을 배양하고자 했다." 엘렌의 말이다.
<풍광적석두(瘋狂的石頭)>이전에 엘렌은 닝하오(寧浩)를 알았다. "한번은 그의 집에서 그가 이것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당시 우리는 모두 아주 신선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것을 좋아할지 아닐지 자신이 없었다." 당시는 워너브라더스의 합작회사 설립시이고, 그래서 그들은 류더와(劉德華)의 뒤를 이어 두번째 투자자가 된다.
일찌기 디즈니의 중국제1대 총경리를 맡은 바 있는 지알웨이(戢二衛)는 1990년대를 회고하면서, 마치 여름캠프를 회상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때는 좋은 사무실건물도 없었다. 우리와 워너브라더스의 사무실은 붙어 있었다. 모두 베이징 서쪽 화웬춘(花園村)의 샹그릴라호텔에 있었다. 소니는 우의빈관(友誼賓館)에 있었다." 일부 업무는 낭만적인 색채가 있었다. "관련부서의 심사에서 필름을 가져오라고 하면, 헐리우드에서는 그렇게 하다가 해적판이 만들어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직접 카피를 했고, 필름통에는 FBI를 표시했다. 가져갈 때는 5개 혹은 7개의 통을 같이 가져갔고, 운송할 때는 짝수와 홀수를 나누어 부쳤다. 혹은 첫부분과 끝부분은 손에 들고 가고 나머지만 부쳤다. 보고나면 다시 가져갔다. 상영실에서 기다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눈도 그 필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바바라가 말한 "당시 그 단순한 시기"라는 것일 것이다. 1990년대에 중국에 왔던 외국영화인들은 아마도 모두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시장의 급속한 변화를 언급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런 급속한 변화는 워너브라더스와 같은 회사가 촉진시킬 결과이다. 많은 국유기업개혁, 민영기업탄생, 독립제작회사의 출현....다만, 이것은 헐리우드회사에 가장 유리한 결과가 아니다. Dede Nickerson이 말하는 것처럼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
"그들은 당신들이 처음 들어왔다고 하여 당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워너브라더스이건 디즈니이건 영화가 재미있는지 아닌지만 본다." 엘렘의 말이다. "모든 프로젝트늠 새롭게 시작한다. 서로 다른 이념이고 서로 다른 게임규칙이다." 현재까지, 모든 사람의 자세는 아주 낮다. 프로젝트 하나만 잘하면 만족한다. 엘렌은 현재 Villiage Roadshow Entertainment 아시아를 책임지고, 2013년 주성치(周星馳)의 영화 <서유:항마편>에 투자해서 매표수입이 12억위안을 넘어섰다.
곤혹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저 곤혹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1990년에는 네트워크가 부족하여, 보급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산업이 완비되지 못하여 비지니스협력도 불확정적인 형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모든 것이 공개된 정보가 되었다. "우리는 개략 2억위안을 투자한 프로젝트를 개발한다. 과거 12개월 내지 18개월의 같은 유형의 영화, 동일한 감독과 배우의 매표수입을 참고하면 안전하게 투자하는 예산이 개략 얼마인지 나오게 된다." 그래서 대기업과 소기업은 같은 내용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직면한 문제는 어떤 컨텐츠가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이다.
상당한 기간동안, 중국의 전체 영화업계의 자금은 대형프로젝트에 치중되었다. 뤄이가 직면한 상황과 같이 젊은이를 배양하는 것은 없었다. 최근 들어 저예산영화가 생겨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가격대비효과'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엘렌이 자신이 여러해동안 해온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그녀가 말한 첫마디는 "내 생각에 요즘은 아주 좋은 상황이라고 본다."
어떻게 마케팅을 할 것인지를 빨리 배운 사람에 있어서, 헐리우드에서 온 경력많은 관리자들과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렌은 발견한다: "중국인은 영화 하나를 하나의 유형으로만 보지 않는다. 하나의 시리즈, 하나의 유형이므로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왜 미국매체가 모두 <퍼시픽림>이 내용없는 대작이라고 비난하고 있을 때, 이 영화가 중국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끈 이유이고, 매표수입은 심지어 미국본토를 넘어섰다.
인터뷰한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진정 중국에서 일하는 인재는 헐리우드 의사결정층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다만 DMG의 창업자인 Dan Mintz는 말한다: "진정 헐리우드 6대기업의 90%이상의 사안을 결정하는 사람은 미국사무실안에 앉아있는 그 6명의 CEO이다." 지알웨이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현재 헐리우드 대작영화사의 전략중점은 본토내용을 촬영하는 것에서 대작을 중국에 도입하고, 글로벌수익분배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 쿼터를 얻어서, 순조롭게 심의를 통화하고 배급까지 하는 것을 바란다."
이것은 엘렌이 말한 '현재가 바로 미래이다"라는 말을 잘 해석해준다. 비록 갈수록 많은 헐리우드 회사가 중국에 진입하고, 이것이 확실히 산업을 날로 완비시키지만, 시스템은 아직 건립되지 않았다. 이전에 중국에서 20년간 있던 사람들은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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