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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3. 30.

글: 왕립군(王立群)

 

항우가 잔학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결론이 나있다. 아무도 항우가 잔학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다시 항우의 잔학에 대하여 재론하고자 하는가. 주로 한 가지 생각때문이다. 항우의 잔혹이 항우의 패망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항우의 잔학함으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은 그가 투항한 진나라병졸 20만을 갱살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진나라사람들의 인심을 완전히 잃고 결국 항우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대지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모두 인정한다: 인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得人心者得天下). 인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失人心者失天下). 항우가 진나라 투항병사 20만을 갱살했다. 이렇게 잔혹한데 어찌 천하의 민심을 얻겠는가? 만일 한 사람이 민심을 잃는다면 그가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이같은 단계적 추리로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항우의 잔혹은 그가 실패한 주요원인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그가 실패한 유일한 원인이다. 그래서 항우의 실패원인을 논할 때 그의 잔학을 얘기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원인을 말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추리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역사연구가 정말 이렇게 간단하다면, 역사연구는 그 자신의 가치나 매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민심을 잃는 자는 천하를 잃고, 민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이 두 마디 말을 멋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역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사실로 이것이 진리임을 입증할 수 있다.

 

문제는 역사에 반증이 있다는 것이다: 항우가 진시황보다 잔학했는가?

 

진시황은 무력으로 육국을 병합시켰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래도 제업을 완성한다; 다만, 아무도 진시황이 사람을 무수히 죽였기 때문에 진시황이 패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해야 이렇게 말할 뿐이다. 진시황의 성공 속에 진이세의 망국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말은 너무나 일반적이다. 어느 개국황제가 건국의 성공 속에 수대, 혹은 수십대 이후의 망국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만일 이를 보편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보편적이다.

 

진시황은 생전의 잔혹함으로 진왕조가 진시황통치시기에 붕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가지고 진이세때 패망한 진정한 원인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가의의 <과진론>에는 "이세지과(二世之過)"라는 편이 따로 있다. 가의는 진이세가 만일 진시황의 폭정을 시정하고, 인정을 실시하였다면 국면을 되돌려서 급속히 패망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를 보면, 진시황의 잔혹은 만일 그의 후계자의 손에 의하여 개혁되었다면, 진나라의 패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우가 진시황과 가장 다른 점은 그가 4년동안 인생의 최고봉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잔혹함을 실패의 주요원인으로 보는 것은 따져보아야할 가치가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만일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항우실패의 원인을 검토해본다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유치했고, 군사적으로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 항우의 잔혹함보다 실패에 더 큰 원인이 되었다.

 

만일, 항우가 정치적으로 좀더 성숙했더라면(물론 정치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항우처럼 잔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최소한 유방을 제거할 세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째, 항우입관(項羽入關)

 

항우가 40만대군을 이끌고, 거록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함곡관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유방부대의 저지를 받았다. 만일 이때 항우가 진나라의 멸망이 유방,항우관계이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것을 인식했더라면, 항우는 유방집단을 제거할 가장 좋은 핑계를 잡을 수 있었다. 항우의 함곡관진입을 거절한 것이다. 항우의 이때 군사력과 명망이라면 한번에 유방집단을 철저히 해결할 수 있었다.

 

둘째, 홍문연

 

유방은 반드시 홍문연에 참석해야 했다. 항우에게 설명하고 해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치명적인 군사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가서 해명하지 않으면 군사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고, 가서 해명하면 살해당할 수 있다. 양자를 비교형량하면 결국 유방은 갈 수 밖에 없다.

 

유방이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홍문연에 참석했을 때가 유방을 제거할 가장 좋은 기회였다.

 

셋째, 한나라 원월 8월, 유방이 항우의 분봉을 받은 후 한중으로 돌아간지 겨우 3개월만에, 관중으로 출병했다. 삼진왕중 옹왕 장한이 폐구를 견고히 지키는 외에, 사마흔, 동의는 모두 유방에 투항한다. 장한은 폐구를 꼬박 10개월이나 지켰다. 장한은 이 10개월동안 무엇을 기다렸는가? 그는 시시때때로 항우를 기다렸다. 만일 이때 항우가 관중으로 출병했다면, 그리하여 장한과 안팎에서 호응했다면, 유방이 아직 관중에서 안정되지 못한 틈을 타서, 최소한 유방을 관중에서 축출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한중으로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일거에 유방을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이때 여전히 유방이 그와 천하를 다툴 최대적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방을 놔두고, 제나라땅으로 출병하며, 제나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유방에게 틈을 주게 되고, 유방은 관중의 통치를 공고히 한다. 그후 병력을 일으켜 동쪽으로 진격해서 팽성을 점령하고 이로 인하여 팽성전투가 벌어진다.

 

이 세번의 기회에서 항우가 그중 하나만 잡았더라면, 유방, 항우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다.

 

항우는 초한전쟁때 가장 뛰어난 양대군사가(항우, 한신) 중의 한 명이다. 항우의 군사생애는 그의 일생동안 계속된다; 다만, 항우의 초한전쟁에서 가장 실패한 점은 그가 군사적으로 전투준비에 대한 안목이 결핍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항우가 유방이 한신을 파견하여 북방전선을 경영하기 전에 일찌감치 북방전선을 개척하거나, 만일 항우가 한신이 북방전선을 개척하는 초기에 북방전선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유방은 최종적으로 항우에 대한 전략적 포위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우가 최종적으로 전략적 중대실수로 인하여 사면초가의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항우는 군사적으로 전략적인 안목이 모자랐다. 이것이 항우의 최종실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가 항우의 정치적 실책과 군사적 실팩을 항우의 잔혹함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항우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잔혹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이런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인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 인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다만, 우리는 초한전쟁의 현실에서 또 하나의 '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잔혹은 항우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니다. 최소한 정치적인 유치함과 군사적인 주도권상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왜 우리는 그 진리가 초한전쟁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첫째,잔혹의 지체작용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확실히 이것은 세계공통의 진리이다. 다만, 우리는 알고 있다. 민심이 작용을 발휘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한 통치자가 잔혹한 것을 천하창생이 인식하는데 비교적 긴 역사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항우의 잔혹은 두 가지 상황으로 집중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진나라 투항군을 갱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성에 오래 시간이 걸린 곳을 도살한 것이다. 전자는 관중인민의 원한을 샀다. 그러나, 천하창생에 있어서는 진나라군을 도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통쾌한 일이다. 후자는 비록 손가락질 받을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항우가 항상 보인 모습은 아니다. 어쨌든 항우를 격분시켜 온 성을 도륙내는 방식으로 화를 발설하는 경우는 그다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다수 천하창생이 항우의 잔혹을 인식하는데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잔혹과 같은 유형이 민심을 잃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렇게 빨리 작용을 발휘하지 않는다.

 

진시황의 잔혹에서 진나라의 멸망까지 그 중간에 수십년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진시황의 사후, 진이세는 여전히 폭정을 시행한다. 이렇게 하여 민심의 향배가 비로소 작용한 것이다.

 

둘째, 정치, 군사의 직접작용

 

민심의 지체작용과 달리, 정치,군사적인 조치는 왕왕 단시간내에 거대한 위력을 발휘한다. 만일 항우가 입관한 이후 역량을 집중하여 군사적인 수단으로 유방집단을 해결했다면, 만일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베어버렸다면, 이런 조치는 즉시 거대한 작용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항우의 잔혹을 항우패망의 중요원인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항우의 정치적인 유치함과 군사적인 주도권상실을 항우실패의 양대원인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렇지만, 왜 사람들은 항우의 실패를 언급할 때마다 항우의 잔혹함을 얘기하는 것일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를 반복하기를 너무 좋아한다(민심의 득실과 천하의 득실의 관계같은 것).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로 역사현상을 해석하기를 너무 좋아한다; 항우가 이미 실패했고, 그가 아주 잔혹했다면, 잔혹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항우패망의 원인으로 꼽는 것이 된다.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진리는 만능이 아니다. 진리는 일정한 적용범위가 있다. 역사현상을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체적인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