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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우희(虞姬)는 어디에 묻혔는가?

by 중은우시 2012. 3. 26.

글: 문재봉(文裁縫)

 

경극(京劇)에 유명한 극이 하나 있는데, <패왕별희(覇王別姬)>이다. 에전에 "무생태두(武生泰斗)"인 양소루(楊小樓) 선생과 "영걔대왕(伶界大王)"인 매란방(梅蘭芳) 선생의 대표작이다. 일단, 양소루와 매란방이 공동으로 <패왕별희>를 공연한다는 소식이 나붙기만 하면, 경극팬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패왕별희>의 내용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두 경극대가의 공동공연으로 생각지도 못한 효과를 거둔 것이다. 우희는 서초패왕 항우의 애첩이며, 진나라말기의 유명한 여성중 하나이다. 전해지기로 그녀는 경국경성의 용모를 지녔을 뿐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건괵영웅(巾英雄)이었다. 항우가 사면초가의 곤경에 빠지자, 항우의 곁을 따라다녔던 그녀는 마지막에 초나라군영내에서 목을 베어 자결한다. 이렇게 '패왕별희'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을 전설을 남겼다. 우희는 생전에 항우와 마찬가지로 휘황함을 누렸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는 아주 황량했다는 것도 다툼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지조차도 지금은 논쟁거리로 남았다.

 

고고학적 연구가 심화되면서 우희가 자살한 후 매장된 장소에 대하여도 사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첫째 견해는 우희가 자살한 후 비동(肥東) 석당진(石塘鎭) 부근의 서황촌(西黃村)에 묻혔다고 한다. 이 견해를 지닌 학자들은 주로 비동에 천년이상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초한전투때 항우는 해하에서 패배한 후, 비동에서 우희와 눈물로 이별한다. 나중에 우희는 한나라병사가 지금의 비동 석당진 부근까지 추격해오자, 배고픔과 피로가 겹쳐서 가축매매와 육식을 가공판매하는 업을 하는 가게주인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구한다. 가게주인은 우희등 일행을 가련하게 여겨서, 솥에서 익힌 나귀고기를 이들에게 주어서 먹게 해주었다. 속담에 배고프면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희 일행은 체면을 가리지 않고 고개를 우걱우걱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점포주인과 작별인사도 채 마치지 못하고, 약간의 돈을 남긴채 멀리 도망을 간다. 그러나,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았다. 고기를 먹느라고 시간을 잠시 지체하다보니, 추격병이 금방 쫓아왔다. 눈이 벌개진 적군을 마주하게 되자, 약한 여자인 우희는 적군의 손에 붙잡히지 않고, 서초패왕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보검을 들어 목을 베어 자결한다. 우희는 죽겠다는 뜻이 굳건했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강가에서 자결하는 것이었다. 죽은 후에 시신은 강 속에 빠져서 적군이 얻지를 못한다. 나중에, 우희의 목이 돌다리 아래에 걸려 있었다. 현지인들은 우희의 수급을 건져내어 석당진의 서황촌에 매장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확실히 우희묘(虞姬墓)가 있다. 그러나 이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전설의 내용으로 보면, 항우가 우희와 길을 나누어 도망쳤을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 우희가 항우를 떠나 단독으로 도망갔을 가능성도 더욱 적다. 그러므로 진실성에 대하여는 의문이 있다.

 

둘째 견해는 우희가 자살한 후 영벽(靈璧)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항우가 포위된 곳은 해하(垓下)로 지금의 영벽현성에서 동남으로 9킬로미터 지점이기 때문이다. 우희가 자살한 후, 당시 한군이 맹렬하게 추격했다. 만일 항우가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한다면, 우희의 시신을 가지고 함께 도망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희의 시신을 그 자리에서 매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견해의 신뢰도는 비교적 높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항우가 해하에서 포위된 후, 한신이 그를 유인하여 포위망를 돌파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고의로 사병들에게 장량이 만든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인심도배초(人心都背楚), 천하도속유(天下都屬劉). 한신둔해하(韓信屯垓下), 요참패왕두(要斬覇王頭)"(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초나라를 버렸다. 천하는 모두 유씨에 속하게 되었다. 한신이 해하에 주둔하여, 패왕의 머리를 베려고 한다) 성격이 급한 항우는 이 노래를 듣고는 과연 계략에 빠져, 몇번이나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한군의 사기는 갈수록 왕성하고, 이때 장량은 다시 한군에게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시킨다. 항우의 사병들은 절대다수가 초나라사람이다. 초나라노래를 들으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온 군에 퍼진다. 사기는 더욱 하락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항우는 대장 우자기(虞子期), 환초(桓楚)와 협의하여, 날이 밝기 전에 포위망을 뚫기로 한다. 아름답고 총명한 우희는 항우의 포위망돌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항우가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서 자결하고 만다. 우희가 죽은 후, 항우는 비통함을 품고 우희의 시신을 매장한다. 날이 밝자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이를 보면, 우희가 매장된 지점은 항우가 포위되었던 곳이며, 당시의 상황하에서 항우가 우희의 시신을 가지고 포위망을 뚫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셋째의 견해는 우희의 머리와 몸이 서로 다른 두 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신은 영벽현에 매장했으나, 머리는 정원현(定遠縣)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영벽현 성동쪽, 숙사공로의 남쪽(즉 당시 항우가 포위된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우희묘 안에는 우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고, 안휘 정원 이룡향(즉, 명나라 개국공신 남옥의 고향)에 있는 우희묘에는 우희의 머리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견해는 둘째견해에서 우희가 자살한 원인은 같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이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우희가 자살한 후, 항우는 우희의 시신을 가지고 남쪽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한나라병사가 추격해오자, 항우는 어쩔 수 없이 우희의 시신을 버리게 된다. 나중에 사람들은 항우가 우희의 시신을 버린 곳을 "패리포(覇離鋪)"라고 불렀다. 항우가 포위돌파에 성공한 후, 우희의 시신은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한 항우의 병사들에 의하여, '패리포' 동쪽 2.5킬로미터 지점에 묻었다. 사람들은 우희를 묻은 곳의 마을 이름을 "우희촌"이라고 고쳐부른다. 두 곳은 이 이름을 얻은 후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이 견해는 비록 일정한 합리성은 있다. 그러나 이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왜 우희의 머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베어져서 안휘의 정원현에 묻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믿기가 어렵다. 오늘날 정원현의 경내에 있는 우희묘는 현지 백성들이 전설에 따라 만든 사실에 맞이 않는 추측일 것이다.

 

일대미인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전문가학자에서 평민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얘기거리를 남겼다. 이것은 우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신분 즉 서초패왕의 애첩이라는 신분을 지녔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희가 천년이래로 따를 자가 없는 미모를 지녔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희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어떤 점때문일까? 그것은 그녀가 서초패왕 항우를 끝까지 떠나지 않았고, 그녀가 한결같은 애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애정에 충실했던 것이 바로 우희의 이름을 천년이나 전해지게 만든 비결이다. 과거는 지나갔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