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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해하(垓下)는 지금의 어디인가?

by 중은우시 2012. 2. 1.

글: 하억(何憶), 손건화(孫建華)

 

초한(楚漢)전쟁은 기원전203년에 이르러, 초나라가 강하고 한나라가 약하던 국면이 철저히 뒤바뀐다. 유방은 후방이 안정되고, 병력과 전마가 강해진다. 그러나, 항우는 삼면에서 적과 대치하며, 식량과 풀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전략적으로 열세에 처하게 된다. 항우는 어쩔 수 엇이, 한왕과 강화를 할 수밖에 없어, 홍구(鴻溝)를 경계로 땅을 나누기로 하며, 쌍방이 평화공존하기로 한다. 그러나, 유방은 장량, 진평등의 건의를 받고, 금방 평화조약을 위반하여, 초나라군대를 향하여 공격한다. 쌍방은 해하(垓下)에서 참혹한 결전을 치르고, 이 전투는 한나라군대의 승리로 끝난다. 초나라군대는 근 10만의 정예부대가 거의 전멸한다. 한때 풍운을 질타하던 서초패왕 항우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오강에서 자결한다. 해하지전(垓下之戰)은 초한전쟁에서 최후의 대결전이고, 유씨의 한왕조가 패업을 이루는데 관건이 되는 전투였다.

 

그러나, 초한전쟁의 지극히 중요한 장소인 해하의 상세한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해하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녹읍설(鹿邑說)과 영벽설(靈璧說)이 그것이다.

 

저명한 사학자 법문란(范文瀾)은 해하가 지금의 녹읍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통사간편>에서 이렇게 적었다: "해하는 하남성 녹읍현에 있다" 이 견해는 당나라때의 장수절(張守節)이 쓴 <사기정의>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높은 언덕과 깍아지른 바위가 있다. 지금도 높이가 3,4장 정도이다. 그 모여있는 마을과 제방은 해(垓)의 측면에 있다.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지금의 박주 진원현 동쪽 10리이며, 노군묘과 서로 붙어있다." 범문란은 이렇게 분석한다. 당나라의 진원현(眞源縣)은 진한시기의 고현(苦縣)이고, 고성은 지금의 하남성 녹읍현이다. 노군묘(老君廟)는 지금의 녹읍성 동쪽에 있는 태청궁(太淸宮)이다. 이 설은 비교적 늦게 나왔기 때문에 따른 사람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사학계의 태두인 곽말약(郭沫若)은 해하가 영벽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사고>에서 이렇게 썼다: "해하는 안휘성 영벽현의 남쪽, 타하의 북안이다." 곽말약의 견해는 아래의 사서기록에 근거한다. <한서.지리지> 패군 도후국에 이런 주석이 있다: "해하, 고조가 항우를 무찌른 곳이다" <수경주.회수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교수가 동남쪽으로 흐르고, 교현의 고성 북쪽을 지난다. 현에는 해하취(垓下聚)가 있다. 한고조가 유방을 무찌른 곳이다." 당나라의 <원화군현도지.하남도5>에는 숙주 홍현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해하취, 현의 서남 오십사리에 있다. 한고조가 유방을 해하에서 포위하여 대파하였는데, 바로 이 곳이다." 이 견해는 가장 전통적인 견해이다. 절대다수의 학자가 지지하는 견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진가외(陳可畏) 선생은 최신연구를 통하여 위의 두 가지 설이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가외는 해하가 진현(陳縣,. 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이라고 본다. 그는 먼저, 해하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지적한다. 즉, 초한지전에서 항우가 해하에서 포위되기 전에 유방과의 사이에 일어난 고릉지전(固陵之戰)이다. 고릉은 지금의 하남성 회양, 태강, 녹읍현 경내에 있다.

 

유방과 항우는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둘로 나누었다. 유방의 군사력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유방은 나중에 장량의 건의를 받아 약속을 깨고, 기원전202년 10월 군대를 이끌고 홍구를 건너 항우를 공격한다. 유방이 항우를 추격하는 부대는 양하(陽夏, 지금이 태강)이남에 도착하여, 대장 한신, 팽월등과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고릉일대에서 항우를 소멸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유방이 부대를 몰고 고릉에 도착한 후에도, 한신, 팽월의 부대는 약속한 기한내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방은 패배하고 다시 항우에 쫓기게 된다. 유방이 무리를 이끌고 고릉으로 물러나서 지켰다. 고릉성의 주위는 튼튼하여 일거에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초한 양군은 고릉성 일대에서 잠시 대치국면을 맞이한다. 고릉전장은 방원 백리이고, 병사 수십만이다. 초군은 고릉성 부근에서 한군을 공격하여, 한군이 동진 혹은 남하하는 것을 막았다. 유방은 고릉에 갇혀서, 위급한 중에 영토를 떼어주고 왕을 봉하게 된다. 한신을 제왕에 봉하고, 팽월을 위왕에 봉한다. 이를 통하여 한신과 팽월로 하여금 적시에 출동하도록 한다.

 

기원전202년 십이월, 한신, 팽월등이 약 40만의 부대를 이끌고 각각 제, 양등지에서 출발하여 항우를 공격하러 온다. 유방도 고릉에서 반격을 시작한다. 동시에 한나라장수 관영도 부대를 이끌고 팽성에서 서진하여, 이 초한의 성패를 가르는 고릉지전에 참전한다. 항우의 군대는 한군의 10배나 되는 병력에 해하에서 겹겹이 포위된 채 3개월여를 버틴다. 항우는 한군에 겹겹이 포위되었고, 병력도 적고 양식도 모자랐다. 곤경에 빠지니 초군의 군심이 이반된다. 유방등은 이 틈을 타서 밤에 초나라노래를 불러 초나라군대의 군심을 와해시킨다. 이렇게 하여 항우의 비장한 '패왕별희'가 나온 것이다. 나중에 항우는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서 밤을 새워 도망친다. 그리고 새벽에 오강 일대(안휘성 화현 동북쪽)에 도착한다. 그러나, 항우는 스스로 강동부로를 볼 면목이 없다고 탄식하고 목을 베어 자결한다.

 

진가외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기>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릉지전후, 한왕은 고릉현성으로 물러나서 지키고 있었고, 깊은 골짜기를 이용하여 방어해냈다. 이때 초군은 부근에 결집하여 공격했다. 한군이 남하나 동진할 수 없도록. 그런데, 해하에서 포위되기 전에, 사서는 항우가 고릉에서 패주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한왕이 고릉에서부터 추격하여 해하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없다. 그것은 바로, 해하가 고릉현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군이 교전을 벌일 수가 없다. 해하가 만일 지금의 안휘성 영벽이라면, 거리가 2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초군이 한군의 동진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벽 일대는 자고이래로 평지에 강이 많이 흐른다. 현의 동남쪽에는 기수, 고파수, 오수, 타수, 당수의 다섯 강이 그물처럼 얽혀 있어 공격할 수도 없고, 수비할 수도 없다. 대규모 병력이 작전을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해하는 지금의 녹읍현일 수도 없다. 이유는 주로 세 가지이다. 첫째, 녹읍현의 성동쪽은 고릉에서 약 7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근거리작전이 불가능하다. 초군은 당연히 한군의 동진,남하를 막을 수가 없다. 둘째,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군이 해하에서 포위하기 전에, 관영의 부대가 팽성(지금의 강소성 서주)에서 서진했다. 항류, 설, 패, 령, 소, 상등의 여러 현을 지나고 고현(지금의 안휘성 녹읍현), 초현(지금의 안휘성 박현)을 격파하고, 다시 서쪽으로 고현의 이향에 주둔하고, 마지막에 초군을 해하에서 무찔렀다. 만일 해하가 녹읍에 있다면, 관영군은 되돌아가서 항우대군의 주둔지로 가야 한다. 그러나, 사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사실상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하는 녹읍에 있을 수 없다.

 

두가지 견해를 뒤집으며, 진가외는 해하가 진현(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기> <한서>의 몇명 이 결전에 참전한 장수들의 전기에서 명확한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기.반역등관열전>에서 번쾌는 "고조를 따라 항적(항우)을 공격하고...항적을 진(陳)에서 포위했으며, 대파했다." 하후영은 "항적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진(陳)에 이르렀다. 마침내 초를 평정했다." 관영은 "항적의 군을 진하(陳下)에서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사기.조상국세가>에서도 "한신은 제왕으로 병력을 이끌고 진(陳)에 이르러 한왕과 함께 항우를 격파했다." <한서>의 기록도 이와 같다. 이들 사서는 모두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둘째, 진현의 북부는 고릉과 맞붙어 있다. 해하가 진현에 있다면 바로 초군이 한군의 동진 혹은 남하를 저지하는 군사형세와 맞아떨어진다. 군사방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초군은 단순한 방어이든 아니면 수비에서 공격으로의 전환이든, 주둔군은 고릉에서 멀지 않은 진현의 북부에 있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뿐아니라, 진현북부는 고대에 많은 구릉과 언덕이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소위 "해(垓)"라는 것은 계단지이다. 산과 언덕이 있는 곳이면 자연히 계단지형이 형성된다. 해하는 바로 이 계단지형의 측면이다.

 

셋째, 사서에서는 항우가 해하에서 포위망을 뚫고, 야간에 기병을 이끌고 남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새벽(平明)때 회하북안에 도착한다. 만일 해하가 안휘 영벽이라면, 영벽은 회하와 매우 가까워서, 말을 타고 남으로 달리면 하룻 밤의 시간이 걸릴 정도가 아니다.

 

넷째, 진현은 군사전략요지이다. 홍구의 옆에 있고, 영수, 회수와 접하며, 간구가 강남과 직접 통한다. 병력을 주둔시키기 가장 좋은 곳이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회양의 '저량대(貯糧臺)"유적지에는 양식을 보관한 흔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곳이 바로 초한이 결전을 벌일 때 초나라군의 양식창고라고 보기도 한다. 당시, 항우는 문관을 보내지 않고 무관 이궤(利几)를 진현 현령으로 보낸다. 바로 이궤로 하여금 지극히 중요한 군사양식창고를 지키게 하기 위함이다.

 

해하의 위치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사학계에서 오래 되었다. 지금 다시 진가외의 새로운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견해가 정확할까? 사실상, 지금은 어느 견해가 옳은지를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해하지쟁이 벌어진 원인은 여러 방면이다. 첫째, 해하는 지역명칭으로서 명확한 표지가 없다. 사서등에는 그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하여 일부 지명등은 문언이 간략하여, 서로 다른 해석과 추측을 내놓게 된다. 예를 들어, "해하"는 "해의 아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산언덕의 아래라는 말이다. 또한 '해하'를 하나의 지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둘째, 사서는 여러번 옮겨적는 등의 원인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와전되기도 한다. 많은 사료들은 이전 사람의 기록을 참고하거나 옮겨적는다. 만일 원본에 오류가 있다면, 후세인들에게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해하취"와 "해하"는 사료에서 해석이 서로 다르다. 셋째, 부회현상, 반부(攀附)심리이다. 이로 인하여 사서의 지명이나 사건이 잘못 전해질 수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사상에는 유명한 사람, 유명한 지명, 유명한 사건에 빌붙으려는 심리가 있다. 바로 이런 심리때문에, 일부 유명인, 유명사건은 각처에서 서로 자기 지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민간에서 양축고리다툼, 삼고초려다툼, 해하위치다툼등이 모두 이런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역사지도집>에는 해하를 안휘성 영벽 동남부로 표시하고 있다. <사해>에서도 '해하'는 '지금의 안휘성 영벽 남쪽 타하 북안'이라고 스고 있다. 각종 역사교재들도 일치한다. 진가외의 주장이 성립되면, 이들 서적을 모두 바꿔야 한다. 그러나, 초한지전의 위치를 정의한 것은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다시 몇십년이 흐르면, 누군가 진가외의 주장을 뒤집고 새로운 학설을 내놓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