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입범(章立凡)
"국유화(國進民退)"는 최근의 핫이슈이다. 그러나, 역사학자에게 있어서는 오래된 주제이다. 20세기에 중국은 이미 두 번이나 이를 겪었다. 제1차는 1940년대 항전기간이고, 제2차는 1950년대의 "과도시기"이다.
청일전쟁부터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민족공업의 연평균성장률은 13.37%에 달하여, 국유공업보다 높았다. 1920년대 민족공업자본은 국영자본의 3.9배에 이른다. 1927년 국민정부가 성립된 후, 국가자본주의가 점차 힘을 얻으면서, 정부가 중국은행, 교통은행 및 10여개의 민간 대형은행을 지배한다. 1935년에는 화폐제도를 통일하여 객관적으로는 기업이 거래원가를 줄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민간자본과 국가자본은 나란히 존재했고, 항전이 발발하기 이전인 1936년까지, 민족공업자본의 연평균성장률은 8%를 넘어섰다.
1930년대 세계경제는 대공황을 맞이한다. 자유주의경제이론이 지탄을 받고 계획경제의 사조가 힘을 얻는다. 국민정부의 정책결정자중에서 장개석은 나치독일의 "통제경제"에 관심이 많았고, 송자문은 소련의 "계획경제"를 생각했다. 당시 적지 않은 학자와 민영기업가들도 계획경제모델을 지지했다. 예를 들면, 항운대왕인 노작부도 그러했다. 다만, 국가가 직접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반대했다.
"9.18사변"이후에 외환(外患)이 가중되면서, 국민정부는 점점 전시체제로 전환되고, 국영기업을 역점을 두어 발전시킨다. 1934년 전 국방설계위원회가 자원위원회로 조직변경되고, 군사위원회가 주도하여, 전국의 공업건설을 관리하고, 중공업건설계획을 추진하며, 권력이 가장 큰 경제부서가 된다. 그 구성원은 주로 계획경제에 편향적인 귀국학자와 엔지니어들이었다. '엔니지어치국(治國)"의 분위기를 풍겼다.
"7.7사변"후 국민정부는 중앙, 중국, 교통, 농민의 4대은행의 연합판사처(四聯總處)를 두고, 금융에 대하여 국가독점을 실시한다; 동시에 자원위원회를 통하여 전쟁자원을 통제하고, 경제에 대한 전면적인 간여를 한다, 1939년이 되어, 국영공업의 중심지위는 정식으로 국책이 된다. 국가자본은 밀가루, 성냥, 방직, 전력, 교통등 민간자본의 전통분야까지 침식해 들어온다. 그리고 신속히 우세를 확립한다. 공(孔), 송(宋)등 권력집안을 대표로 하는 관료자본은 국가자본이라는 탈을 쓰고 힘을 얻는다. 체제내적인 우세를 활용하여 대거 사리사욕을 채운다.
금융독점, 통화팽창, 물자통제는 민영공업으로 하여금 돈을 빌릴래야 빌릴 곳이 없고, 자원은 부족한 상태로 만들었다. 국영공업의 압박과 관료자본의 침식하에 계속 위축된다. 전쟁후, 국민정부는 다시 대량의 적산기업을 접수하니, '국유화'는 기정방침이 되어버린다. 1948년, 민영공업자본은 전쟁전인 1936년의 78.6%에 불과하게 된다. 국가 및 관료자본은 전쟁전보다 2.8배나 늘어났다.
이러한 '국유화'의 결과는 대량의 민영공장이 도산하고, 노동자는 실업하고, 물가는 오르고, 세수는 격감하며, 통화팽창을 걷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제서야 국민정부는 위기를 느꼈지만, 이미 되돌리기가 힘들었다. 비록 국영기업민영화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실패한 것은 군사적인 실패뿐아니라 심층적으로 따져보면 재정붕괴가 그 원인이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될 때, 사인자본주의(私人資本主義)에 비교적 장기간의 발전기를 주겠다고 승락한 바 있다. 건국 <<공동강령>>에는 이렇게 확인했다: "각종 경제성분이 국영경제의 지도하에, 분업하여 협력하고 각자 자신이 할 일을 하여, 전체 사회경제의 발전을 촉진한다." 하루빨리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중공지도자 유소기는 저명한 "천진강화"를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기업가들이 생산을 회복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라고 독려했다.
국민경제회복기에 국가는 "공사겸고, 노자양리, 성향호조, 내외교류(공과 사를 함께 돌보고, 노동자와 자본가에 모두 이익되게 하며, 도시와 농촌이 서로 도우며, 국내와 국외가 교류한다)"의 경제방침을 세워서, 서로 다른 소유제의 기업이 발전하도록 촉진했다. 1950년, 정무원은 당시 사영공상업이 겪고 있는 곤란에 대하여, 국가위탁가공, 주문 및 구매를 실시한다. 우선적으로 국계민생(國計民生)에 관련되는 업종을 발전시키며, 사영기업을 국가계획의 지도하에 있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대표적인 사영공ㅇ상업이 국가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다: '연필대왕" 오갱매(吳羹梅), "돼지털(猪鬃)대왕" 고경우(古耕虞), "항운대왕" 노작부(盧作孚), "미정(味精)대왕" 오온초(吳蘊初), "성냥대왕" 유홍생(劉鴻生), 그리고 방직업의 영의인(榮義仁), 유국균, 유정기, 화공업의 이촉진등의 산하기업은 선후로 공사합영(公私合營)을 실시했다. 1952년 12월, 전국의 60여개 금융기업은 솔선하여 전업종의 기업을 모두 공사합영했고, 통일된 공사합영은행을 만들었다.
1952년까지, 사영공상업은 380만직공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공업생산액은 전체 공업생산총액의 40% 가량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반(五反)"운동이후, 공상업자는 계속 경영할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1953년, 모택동은 "과도시기총노선"을 내놓는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을 앞당겨 발동하기로 결정한다. 1954년 헌법은 국가는 자본주의공상업에 대하여 이용, 제한 및 개조하는 정책을 규정한다.
국가는 구관료자본을 몰수하고, 국가자본주의를 실행하고, 통일구매통일판매를 하고, 농업합작화를 하는 등의 수단을 통하여 경제명맥을 단계적으로 장악한 후, 전면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개조'를 실행한다. 1956년, 전업종에서 공사합영을 완성한다. 전국의 원 사영기업중 99%는 공사합영으로 바뀐다; 상업기업중 40만호는 공사합영으로 되고, 144만호는 합작화된다. 공(公) 측 대표가 기업을 접수하고, 사(私) 측 대표는 직위는 있지만 권한은 없게 된다. "문혁"대 공사합영기업은 모조리 국유화되고 만다.
제2차 국유화는 제1차보다 훨씬 철저했다. 국가는 '사과'를 다 먹은 다음에 '포도'까지 먹어버렸다. 전국의 부와 자원을 모조리 장악한 후, '대약진'과 같은 전국적인 운동을 벌여서 수천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하는 결과를 낳고, 경제는 전면적으로 무너져버린다; 국내, 당내갈등이 날로 격화하고, 이후 십년에 이르는 '문혁'의 재난을 불러온다, 결국 국민경제는 붕괴직전까지 간다. 권력과 부가 과도하게 집중되면, 그 결과는 결국 백성을 가난하게 만들고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
국영은 효율이 높지 안혹, 백성이 부유해야 나라가 강하다. 독점이 반드시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 이긴 자가 모조리 차지하는 것은 장치구안(長治久安)의 길이 아니다. 역사상 두번에 걸친 국유화의 교훈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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