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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선비족: 돌에 새겨진 민족

by 중은우시 2009. 8. 28.

글: 문재봉(文裁縫)

 

대선비산(大鮮卑山)의 절벽에는 천연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동굴이 하나 있다. 이름은 알선동(仙洞)이다. 이곳에는 일찌기 전설적인 위대한 민족, 선비부락이 거주했었다. 알선동의 입구에 서서 탁발선비의 선조의 옛터를 바라보노라면, 크고 작은 문제들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털복숭이에 피를 마시는 부락이 어떻게 대선비산의 산과 삼림 속에서 번식하고 생활했는가? 어떻게 하여 수천년의 수렵생활을 끝내고 삼림에서 걸어나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여 천신만고끝에 중원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는가?

 

선비족의 이름인 "선비(鮮卑)"는 진나라 한나라의 문헌에서는 자주 "사비(師比)", "서비(犀比)", "서비(胥)"등으로 쓰고 있다. 동호(東胡)는 흉노에 패배한 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크고 작은 서로 다른 부락으로 분열되는데, 오환산(烏桓山)으로 흘러들어간 한 갈래는 스스로 오환(烏桓, 혹은 烏丸)이라고 자칭하고, 선비산에 있는 이 갈래는 선비족이 된다. 선비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현재는 아무도 이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다만 대체적인 위치는 오늘날의 내몽고 동쪽이나 동북삼성(흑룡강,길림,요녕)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소흥안령 일대로 본다.

 

선비족은 선비산에서 살아가다가, 점점 강성해진다. 그들은 아주 흉맹했다. 문화는 아주 낙후되었고, 문자도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결혼전에 사방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박박 밀어버리고, 머리 꼭대기에 한줌의 머리카락만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원시종교신앙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그들의 짝짓기도 그들이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소나 양의 발정기와 관련있었다. 봄은 동물의 발정교배기이다. 역사적으로 선비족들도 교배기가 있었다. 그것은 늦은 봄날, 평소에 사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선비족들은 이때 요락수반(饒樂水畔, 요녕성 영주 북쪽)으로 모여든다. 거기서 춤추고 노래하고, 술마시고 논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눈이 맞은 남녀는 교배를 마치고, 여름이 오면, 그들은 다시 사방으로 나뉘어져서 양들과 하얀 구름과 같이 지낸다.

 

선비족의 민가는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도 다양하다. 목가(牧歌)도 있고, 사향곡(思鄕曲)도 있고, 서사가(敍事歌)도 있고, 전가(戰歌)도 있다. 거칠고 호방하며 농후한 초원생활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북위가 몽골고원을 통일한 때의 태무제는 막북에서 이주해온 장락칙륵(帳落勒, 한나라때는 丁零이라고 하였고 高車라고도 하였다)사람이다. 5세기중엽, 음산(陰山) 일대에서 생활하던 칙륵사람들은 대부분 선비화되었다. 저명한 칙륵가(勒歌)는 북제때 칙륵인들의 초목가이다. 그 노래는 원래 선비말로 되어 있었는데, 제나라 말로 바뀌어졌으며, 이미 천고절창이 되었다;

 

칙륵천(勒川) 음산하(陰山下).

천사궁려(天似穹廬), 농개사야(籠蓋四野),

천망망(天茫茫), 야망망(野茫茫).

풍취초저견우양(風吹草低見牛羊) 

 

칙륵천은 음산아래로 흐르고

하늘은 지붕과 같이, 사방의 벌판을 감싸고 있다.

하늘은 넓고 넓으며, 들판도 넓고 넓다.

바람이 불어 풀이 고개를 숙이니 소와 양이 보인다.

 

동한의 화제(和帝)때, 한나라의 대장 두헌(竇憲)이 흉노를 격파한다. 선비족은 그 틈을 노려 흉노의 옛땅을 차지해 버린다. 10여만호의 남은 흉노무리는 스스로 선비라 칭하며, 선비족에 합류한다. 동시에 흉노의 문화와 원시숭배도 선비족에 유입된다. 그리하여, 선비족은 동호와 흉노의 융합민족이 된다.

 

동한의 환제(桓帝)때,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의 각 부락을 통일한다. 그는 고류(高柳)에 왕정(王庭)을 둔다. 여러 부족과 연합하여 군사행정연합체를 결성하고, 동, 중, 서의 3부로 나누어 각각 대인(大人)이 통솔하게 했다. 이 연맹이 통제하는 지역은 아주 넓었다. 동쪽은 지금의 시라무룬하(西拉木倫河), 라오하하(老哈河) 유역, 커얼친(科爾沁)초원과 후룬베이얼(呼倫貝爾)초원을 포함하며, 미가, 궐기, 괴두등의 선비대인이 통솔했으며 모두 20여개 읍(邑)이 있었다; 중부유역은 지금의 시린궈러(錫林郭勒)초원을 포함하며, 모용, 가최등 선비대인이 통솔했으며 모두 10여기 읍이 있었다; 서부는 지금의 음산이북의 우란차부(烏蘭察布)고원, 바얜노르(巴彦爾)고원 아라산(阿拉善)맹 경내의 사막지구와 어지나하(額濟納河)유역등지이다. 일률, 추연등 선비대인이 통솔했고 모두 20여개 읍이 있었다. 단석괴는 또한 한인을 써서 법률을 제정했고, 중원에서 자기를 수입했으며, 선비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단석괴가 죽고난 후, 각부락의 대인은 각자 나뉘어져 버린다. 선비족은 다시 사분오열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는 통일되지 못한다. 이후의 역사에서 장기간 합종연횡을 하는데 3개의 집안이 두드러진다: 동부의 우문씨(宇文氏); 서부의 탁발씨(拓跋氏); 중부의 모용씨(慕容氏). 이 세 성씨중에서 먼저 중국역사무대에 오른 것은 모용씨이다. 그들은 전연, 서연, 후연과 남연을 건립한다. 곧이어 탁발씨가 모용씨를 멸망시키고, 북위, 동위와 서위를 건립한다. 마지막으로 우문씨가 뒤를 이어 대체하면서, 북주를 건립한 후, 수당성세를 열게 된다.

 

북위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립한 소수민족정권이다. 모두 17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171년간 존속했다. 북위의 여러 황제는 태무제 탁발도가 불교를 탄압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황제들은 불교를 신봉했다. 북위정권과 불교의 관계는 우리가 운강석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산서 대동에서 서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동서로 1킬로미터나 되는 운강석굴을 볼 수 있다. 산서 대동은 요나라때 오경중 하나인 서경이다. 북위도 이곳에 도읍을 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곳에 운강석굴을 만든다. 그곳의 높은 곳의 이름이 운강이어서 운강석굴이라고 부른다.

 

북위 탁발씨왕조는 도무제때 평성(平城, 지금의 대동)을 수도로 정한 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하기까지, 대동에서 근 100년을 웅거했다. 운강석굴은 이 시기의 산물이다. 그동안 북위의 국력은 강성하여, 군사적으로 후진, 북량등 국가를 격파하고, 관리, 백성, 기술자 및 왕족과 승려등 수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를 통하여 불교와 석굴조각예술이 도입된다. 이는 중국불교역사상의 전성기이고, 암벽을 파서 절을 만드는 풍조가 전국에 번져간다.

 

도무제는 북위의 개국황제이다. 선비족은 원래 불교를 잘 몰랐다. "서역과 단절되어 있어서, 교류가 없었다. 그리하여 부도의 교(불교)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혹은 들어봐도 믿지는 않았다"(위서.석노지). 도무제는 정벌과정에서, 여러 곳의 불사와 승려를 접촉한다. 그 본인은 황노사상에 빠져 있었지만, 약간의 불경도 읽어보았다. 불교에 대하여 그는 사묘를 건립하고 승려를 초청하는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고, 그저 태산승랑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승랑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리고 선물도 보낸다. 이렇게 그는 승랑에게 그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천흥원년(398) 그는 경성에 절을 짓는다. 그리고 황시연간(396-397)에 그는 승려 도과를 불러들여서, 승관사문통을 맡게 하고 승려를 통할하게 한다.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통치시기에 이르러, 도교의 천사(天師) 구겸지(寇兼之)가 태무제를 도와준다. 그리하여 도교, 유교를 가지고 통치한다. 도교는 이 시기에 크게 발전을 이룬다. 사도 최호는 조정의 중신인데, 역시 도교를 믿었따. 그리고 여러번 태무제에게 불교를 배격하도록 말한다. 불교는 이전에는 북위에서 아주 성행하였고, 교도가 많았다. 그리하여 노동력부족에 시달렸다.

 

태무제는 무를 숭상하고 군대를 강하게 키우고자 했다. 태평진군5년(444), 태무제는 멸불조(滅佛詔)를 내린다. 기한을 정해서 모든 사무(師巫), 사문(沙門)은 환속하도록 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한다. 사문의 현고, 혜숭등은 이 조서를 어긴다. 태자 황과 상서 한만덕이 비호하였지만, 결국 그들은 죽임을 당한다. 2년후, 태무제는 두번째로 대규모 멸불조치를 취한다.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문성제가 즉위한 후, 태무제로 인하여 쇠퇴한 불교를 다시 흥성하게 한다. 그는 명을 내려, 각주, 군, 현에 불사를 한 곳씩 짓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출가하고 싶은 자는 연령의 대소를 불문하고, 모두 마음대로 출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불교를 통하여 악을 선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전에 훼손된 불사를 다시 회복시킨다. 불상경륜도 계속 이어진다. 저명한 운강석굴도 문성제때 파기 시작한 것이다.

 

운강석굴은 모든 사람에게 꿈을 주는 곳이다. 그 규모가 거대한 것뿐아니라, 그 조각이 아름다운 것뿐아니라, 그것은 무주산의 자락에 1500여년이나 굳건히 서 있으면서 왕조가 하나하나 교체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한 민족의 멸망과 흥성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운강석굴은 돌에 조각한 왕조라고 볼 수 있다. 북위. 선비족의 세계는 이렇게 역사의 찬바람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들이 창조한 문명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의 눈으로 바라보면, 운강석굴은 북위왕조의 단대사(斷代史)이다. 북위왕조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선비민족의 문화사이며 선비민족의 문화를 농축해서 담고 있다.

 

낙양으로 천도한 후, 기원500년, 북위는 용문석굴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나 선비귀족은 이미 한화되어버린 불상은 이미 더 이상 선비족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평성에 남겨진 선비귀족들은 계속하여 선비족 자신의 정신적 정원 - 운강석굴 - 을 만들어 간다. 523년, 북위에는 '육진기의'가 일어난다. 평화로운 기간이 오래 지속되고, 불교의 자비로운 교의에 물들어가자, 초원부족의 혈성은 점점 가라앉는다. 선비족이 일찌기 자랑으로 삼았던 살벌한 무공은 몰락한다. 북위정권은 바람앞에 흔들리는 등불 신세가 되고, 운강석굴도 공사가 중단된다. 533년, 선비족정권인 북위왕조가 멸망한다. 수당이후, 민족으로서의 선비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