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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왕양명(王陽明)은 왜 잊혀졌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22.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한 가지 일은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왕양명은 죽은 후 수백년이 지났지만, 영향력이 크고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계속하여 후인들이 숭상해 마지않는 위대한 역사인물이다. 청나라의 중흥명신 증국번에서 유신파의 주요인물인 양계초, 국학대사 호적, 다시 초기의 공산당지도자 진독수, 및 모택동이 모두 왕양명에 대하여 아주 존경을 표했다.

 

예를 들어, 양계초 선생은 <<왕양명지행합일지교>>라는 글을 썼고, 진독수는 <<왕양명선생 훈몽대의의 해석>>이라는 글을 썼다. 저명한 교육가 도행지는 "지행합일"학설의 영향을 받아, 이름을 "도행지"로 개명하기도 했다. 곽말약 선생도 왕양명을 숭배하였도, <<위대한 정신생활자 왕양명>>과 <<왕양명예찬>>이라는 글을 썼다. 왕원화(王元化)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초기의 모택동은 많은 사상이 왕양명에 가까웠다. 그는 일찌기 왕양명을 공부했거나 아니면 스승인 양창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구시(求是)"는 바로 왕양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1949년 신중국 건국이후, 왕양명의 광환은 점차 사라져서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현재의 젊은이들이 왕양명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왕양명이 어떤 사상을 지녔는지를 모르는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왕양명은 하늘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원인이 무엇일까?

 

첫째, 왕양명의 사상의 유심주의 색채때문일까?

 

왕양명은 양명학파를 창시한다. 신중국건국이후, 양명학설은 주관유심주의의 학설로 규정되었다. 이리하여 이 학설은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소위 유심주의문제는 반세기동안 왕양명을 공격한 주요 이론근거였다. 과거에, 우리는 소위 계급분석관점에서, 노선투쟁의 입장에서, 유심과 유물을 표준으로, 역사상의 인물과 사상을 구분했다. 이런 방식은 사실 간단화의 방법이다. 무릇 유물적인 것은 모두 좋고, 무릇 유심적인 것은 모두 나쁘다. 그러므로, 왕양명과 같은 대사상가는 비록 역사상 영향력이 크지만, 한주먹에 타도된 것이다.

 

나는 철학에 대하여 비록 경외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다지 흥취는 없었다. 왕양명의 "심학(心學)" 사상이 무엇인지를 지금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전습록>>에서 한 말들은 내가 읽어보았고, 깨달은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인생의 큰 병은 오만이라는 것에 있다. 아들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효하고, 신하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불충하며, 부친으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자애롭지 못하고, 친구로서 오만하면 반드시 믿을 수 없다." "겸손은 모든 선의 기본이다. 오만은 모든 악의 우두머리이다" "산을 무너뜨리고 적을 잡는 것은 쉽다. 마음을 무너뜨리고 적을 잡는 것은 어렵다." "마음이 밝은 것이 바로 하늘의 도리이다" 등등. 모두 사람이 살아가는 큰 이치이다. 무슨 잘못이 있는가?

 

슬픈 일은, 당시는 우리의 머리 속에,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이 결핍되어 있었다. 왕원화 선생이 한 말처럼, "진리를 인식하기 이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반대할 것'인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적이 찬성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반대하고, 적이 반대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찬성한다' 다만 이렇게 하다보면 네가 인식한 진리는 이미 일정한 기존의도의 농후한 색채를 띄게 된다." 역사는 항상 문화인들에게 우스개를 남긴다. 일종의 잔혹한 정치의 우스개이다. 그저 이런 우스개의 댓가는 너무나 크다.

 

둘째, 왕양명은 일찌기 농민운동을 진압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왕양명은 '도살자'으로 취급되었다.

 

<<왕수인전>>을 읽어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왕양명은 군사적인 재능이 풍부했다. 녕왕반란을 진압한 외에, 그의 군사투쟁대상은 모두 반란을 일으킨 농민 혹은 변방민족이었다. 건국이래, 중국의 역사평가중에서, 아주 간단한 구분원칙이 적용된다. 무릇, '농민혁명'은 모두 좋고, 무른 농민혁명을 진압한 것은 모두 나쁘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농민반란의 역사상 지위와 역할을 끌어올린 것이고, 당연히 일부 역사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영향을 준다. 나중의 증국번을 포함해서. 어떤 전문가는 이것은 역사연구의 황당함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황당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아주 맞다. 그래서, 우리는 당년의 이자성, 장헌충, 홍수전도 사람을 무수히 죽였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혁명을 했기 때문에, 죄과는 모조리 묻지 않는다. 다만, 왕양명이 사람을 죽인 것은 심각하게 기록했다.

 

사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왕양명은 농민반란을 처리할 때, 아주 전략을 중시했다. 최대한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였다. 그리고 사후문제를 잘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를 들어, 그는 광서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했는데, 병사를 하나도 쓰지 않았고, 사람 하나도 죽이지 않았다. 이 점은 아무런 이견이 없다. 사람의 공적은 민중에 이로운지여부에 있다. 우리는 역사에 물어볼 수 있다. 왕양명의 명성은 그래도 나쁘지가 않다.

 

셋째, 장개석이 극력 왕양명을 숭상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장개석은 계속 '인민의 공적'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이 사람은 일생동안 왕양명을 숭상했다. 그러므로, 왕양명도 좋은 명성을 갖기 힘들게 되었다. 이것은 '적이 옹호하면 우리는 반대한다'는 기본가치판단에 맞는 것이다.

 

장개석의 원 이름은 서원(瑞元)이고 학명은 지청(志淸)이며, 자는 개석(介石)인데, 나중에 중정(中正)으로 바꾼다. 장개석의 개명이 왕양명과 관련있는가? 자세히 모른다. 다만, 장개석이 일생동안 왕양명을 숭상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말하자면 장개석의 고향인 봉화(奉化)는 왕양명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즉 사명산(四明山)이다. 오늘, 우리는 봉화에서 차를 몰고 여요로 가면, 사명산을 넘어가야 한다. 두 시간 거리일 뿐이다.

 

최근들어, <<장개석일기>>의 해석에 학자들이 많이 관심을 기울인다. 장개석의 일기로 보면, 그는 개략 1930년대부터 이미 왕양명을 숭상하기 시작한다. 특히 왕양명의 "지행합일"의사상에 대하여 깊이 탄복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 힘써 배우겠다고 한다. 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친 후에,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왕양명에 대한 연구에 더욱 매진한다. 한 가지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그가 타이페이의 초산(草山)을 양명산(陽明山)으로 개명한 것이다. 비교적 믿을만한 버전은 장개석의 당시 시위였던 조병옥 선생의 회고이다. 장개석은 원래 고웅 수산에 살았는데, 오래지 않아 타이페이의 초산으로 옮겨와서 초산빈관에 머문다. 장개석이 처음에 초산에 올랐을 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이 산은 무슨 산이라고 하는지. 곁에 있는 사람이 초산이라고 답변한다. 그러자 장개석은 별로 기분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초산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이 곳은 그의 고향인 봉화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가 불만인 것은 초산이라는 이름이었다. "초산"은 마치 '낙초위구(落草爲寇, 타락하여 도적이 되다)'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초산을 양명산으로 고치기로 하고 친히 '양명산'이라는 세 글자를 써준다.

 

장개석은 스스로 양명학의 철학사상을 연구했을 뿐아니라, 두 사람에게 왕양명의 책을 공부하도록 당부한다. 한 사람은 여러해동안 연금되어 있던 장학량이다. 장개석의 서신에서 장학량에게 왕양명의 철학사상을 많이 연구하고, 그의 책을 많이 보라고 말한다. 이점에 대하여, 장학량선생도 나중에 언급한 바 있다. 장학량은 후반생을 왕양명을 연구하는데 많이 쏟았다. 그의 연구성과는 필기로 남겼다. 그리고 중국역사, 특히 <<명사>>의 연구와 야사류의 수집에도 상당히 풍성한 공을 남겼다. 이들은 진귀한 재산이다. 장학량은 나중에 모두 대만동해대학의 도서관에 기증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장경국이다.

 

이렇게 보면, 왕양명이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나중에 사람들에게 잊혀진 것도 어떻게 보면 이치에 맞는 것같다.

 

내가 어렸을 때, <<고문관지>>를 읽어본 적이 있다. 그중에 왕양명 선생의 글이 3편 실려 있었다. 이것은 바로 <<존경각기>> <<상사기>> <<예여문>>이다. 특히 천고명편 <<예여문>>은 격정에 충만하고 우는 듯 호소하는 듯 사람을 지극히 감동시킨다. 다른 것들은 빼고라도, 왕양명이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서리의 시신을 수습해주는 것만 보더라도, 그는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