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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장언(張嫣): 생사불명인 명나라 황후

by 중은우시 2008. 10. 16.

작자: 미상

 

명나라의 역사상 생사불명인 황제를 하나 알고 있다. 그는 바로 숙부인 주체(영락제, 명성조)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불타 죽었는지, 어디론가 떠나버렸는지를 알지 못하는 건문제 주윤문이다. 그런데, 명나라 역사상 생사불명인 황후가 하나 있다. 그녀는 누구인가? 바로 명희종의 황후인 장황후이다.

 

장황후는 천계원년, 명희종과 대혼을 거행한다. 그녀의 성은 "장"이고, 이름은 "언"이며, 자는 조아(祖娥)이고, 아명은 보주(寶珠)이다. 하남 상부현 청생인 장국기(張國紀)의 딸이다. 용모가 뛰어났을 뿐아니라, 글도 읽어 이치에 밝았고, 의리를 알았다. 총명하고 예지있는 뛰어난 황후였다. 어린 부부는 결혼후에 처음에는 서로 사랑이 깊었다. 명희종은 그해 4월에 그녀를 정궁황후로 책봉한다. 그러나, 명희종은 철들지 않은 아이와 같았다. 매일 그저 놀 거리만 찾았다. 목수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고, 조정의 일은 신경쓰지도 않았다. 나중에 위충현과 유모 객씨를 총애하였다. 장황후는 위충현의 이러한 전횡과 조정교란의 악행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주 어린 부부 둘이 있을 때면 그들을 경계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명희종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사이는 점차 멀어지게 된다. 장황후는 심계가 깊은 여인이었다. 국가의 대사에도 자기주장이 있었다. 그녀는 객씨의 여러가지 행위에 아주 불만이 많았다. 여러번 객씨를 궁중에 불러 제거하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객씨는 장황후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어서, 장황후에 대하여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객씨는 명희종의 유모였으므로, 그녀의 손으로 명희종을 키우다시피 했다. 그리하여 자주 명희종의 어머니로 자처하고, 궁내에서 위세를 부리곤 했다. 아예 비빈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장황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객씨의 횡포에 대하여, 장황후는 반감이 컸다. 그녀는 면전에서 객씨를 질책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객씨, 위충현과 장황후는 서로 원수가 된다. 서로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애쓰게 된다. 천계3년(1623년) 장황후가 임신을 한다. 객씨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장황후 궁중의 궁녀를 모조리 자기 사람으로 갈아치웠다. 그리고 장황후를 모실 때 아주 소홀하게 대하도록 했다. 결국 어느 날, 한 궁녀가 장황후의 등을 안마할 때 힘을 너무 세게 해서 장황후가 유산하고 만다.

 

장황후를 몰래 해치려는 동시에, 객씨와 위충현의 두 사람은 독수를 장황후의 부친인 장국기에게 뻗친다. 이를 기화로 장황후를 연루시켜 장황후를 폐위시키고 위충현의 조카인 위량경의 딸을 황후로 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장황후는 장국기가 양녀로 삼은 살인도망범의 딸이라고 소문을 낸다. 그녀의 생부는 바로 강도인 손이(孫二)라는 것이다. 명희종 주유교는 이 말을 듣고 이를 진짜로 생각했다. 진실을 묻지도 않고 바로 장국기의 작위를 박탈해 버리고,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그 곳에서 만년을 지니게 한다. 그러나 장황후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장황후에게는 부부의 정이 있었던 것같다. 명희종은 객씨등이 장황후를 해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장황후가 객씨들을 해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주 양자의 사이에 침묵을 지켰다.

 

원래 명희종 주유교는 신체가 아주 건강했다. 스물이 넘어설 때까지, 병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무슨 원인에서인지 천계6년부터 몸이 날로 허약해지지 시작한다. 얼굴과 몸에 부기가 있었다. 천계7년이 되자, 병석에 드러눕고, 자주 고열이 발생하며, 부종이 심해지며, 식사량이 크게 줄어, 말하는데도 힘이 없었다. 조야 상하가 모두 불안해 하였다. 이때, 경사에서 위충현이 황위를 도모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온 성내가 어수선했다. 장황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명희종이 병석에 누워있을 때, 장황후가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살폈다. 아마도 양식이 있어서인지, 천계7년 주유교의 성격에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 그는 주위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장황후에 대한 태도도 점차 호전되었다.

 

장황후는 겨우 스물을 넘긴 젊은 여인이엇지만, 국모로서, 그녀는 정치적인 두뇌가 있었다. 그녀는 명백히 깨닫고 있었다. 복잡한 형세에 직면하여 반드시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당장 해결할 시급한 일은 황위계승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절대로 객씨와 위충현이 꾸미는 음모가 성공하게 내버려둬서는 안되었다. 지금 주유교의 병은 다시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후사도 없다. 장황후는 바로 주유교와 동부이모인 동생 신왕(信王) 주유검(朱由檢)을 떠올린다. "형종제급(兄終弟及,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다)"의 관례에 따라, 신왕은 명분있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고, 게다가 그는 좋은 평판을 얻고 있어서 이러한 대임을 맡을 만했다. 그리하여, 장황후는 병중의 주유교에게 신왕을 언급하면서, 그라면 대사를 맡길 수 있겠다고 말하고, 주유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한다. 이때 위충현등은 궁전의 내외에 불측의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는 것을 막고자, 장황후는 주유교에게 즉시 신왕 주유검을 부르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객씨와 위충현의 대비가 워낙 철저하여 성공하지 못한다. 나중에 그녀는 기회를 얻어, 몰래 신왕과 명희종이 만나도록 조치한다. 장황후의 비밀스러운 안배하에 신왕이 건청궁으로 들어오고 그의 형을 만난다. 형의 전신이 부어있고,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 주유검은 가슴이 아팠다. 주유교는 억지로 정신을 차려, "내 동생은 장래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 너는 형수를 잘 돌봐 주거라" 신왕은 황제가 그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하자, 극력 사양한다. 이때 장황후가 주렴을 걷고 걸어나오면서 급히 말한다: "황권을 절대 사양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국가가 아주 위험한 때이니, 당신이 반드시 국가사직의 대임을 맡아야 합니다" 신왕은 그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감히 말대답을 하지 못했다. 접견이 끝난 후, 장황후는 그에게 몸조심하도록 부탁하고, 항상 사태변화를 예의주시해달라고 요청한다. 주유교는 흐리멍청하게 이십여년을 살았는데, 그가 신왕을 접견하여 후계자를 확정한 일이 그가 유일하게 제대로 한 일이었다. 이 일에서 장황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왕 주유검도 바로 그녀의 격려하에, 용기를 내어 입궁하고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천계7년 팔월 이십이일, 주유교가 붕어한다. 장황후는 즉시 명을 내려, 신왕에게 입궁하도록 한다. 동시에 천하에 신왕이 대통을 잇는다고 선언한다. 다음 날, 주유검이 등극하고나서야 장황후는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는다. 장황후는 자신의 기민함과 과감성으로 사직을 안정시키는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주유검은 황제가 된 후에 장황후를 아주 존경한다. 장황후를 의안황후(懿安皇后)로 받들며 궁중에 모셨다.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을 우두머리로 한 농민군이 북경을 함락시킨 후, 숭정제는 국가가 망하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보내어 아들을 궁밖으로 내보낸 후, 후궁으로 돌아와 친히 공주를 죽인다. 그 후에 후비들에게 자진하게 명하고 자신은 태감 왕승은을 데리고 매산에 올라가서 목을 맨다. 다만, 형수인 장황후의 행방은 기록이 없다. 그리하여 수백년동안 후세사가들은 장황후의 행방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것도 명말청초의 일대 역사미스테리의 하나이다.

 

장황후의 행방에 대하여, 대체로 몇가지 견해가 있다.

 

조사금의 <<갑신기사>>의 기록에 따르면, 장황후는 이자성의 농민군에 투항하였다는 것이다. 장황후는 여러번 멍청한 명희종을 권하여 위충현에게 핍박받던 대신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민간에서 장황후에 대한 이미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농민군 내에서도 명성이 괜찮았다. 이자성은 그녀를 후궁현주로 칭하였다고 한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성을 함락시킨 후, 군사는 명을 내려 농민군에게 장황후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입궁한 후, 아직 도망치지 못한 장황후와 부닥친다. 농민군은 궁녀로 하여금 그녀를 상좌에 앉게 부축하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어 호위해준다. 장황후는 감격하여, 이자성의 농민군에 투항한다. 나중에 이자성이 패배하여 북경성을 철수할 때 행방이 묘연해진다. 다만, 어떤 사가는 이 설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한다. 조사금은 비록 명청교체기의 당사자중 하나이지만, 책에서 기록한 대부분은 자기가 들었거나 목격한 것이다. 다만, 그는 망한 명나라의 관리로서, 성이 함락되고나서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수감된다. 그러므로 장황후가 투항한 일은 그가 친히 목격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후세인들은 바로 이런 주장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장황후는 엄정하고 대장부의 기운이 있었는데, 무릎을 굽혀 자신의 명나라를 멸망시킨 농민군에게 투항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장황후는 북경성이 함락된 후,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왕원의 <<거업당집>>에 나오는 기록이다. 책에서는 "하남 위지의 사람인 왕대본은 농민군의 장수였다. 북경을 함락시킨 후 왕은 다른 네 명과 함께 공동으로 의안황후를 붙잡았다. 어떤 사람이 황후에게 불손하자 왕대본이 대노했다: 이 분은 일대의 국모이다.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는가? 바로 칼을 뽑아서 황후를 죽였다. 차라리 죽어서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외에,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장황후는 농민군에 투항하지 않았고, 변장하여 북경성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곡응태의 <<명사기사본말>>, 계육기의 <<명계북략>>, 담천의 <<국각>>등의 책에 쓴 내용에 따르면, 숭정제는 농민군에게 북경성이 함락될 때, 사람을 장황후의 거소로 보내어, 그녀에게 자진을 권한다. 다만, 장황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궁안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낡은 옷으로 얼굴을 가린 후, 성국공부로 도망쳤다. 나중에 또 다른 사람들도 장황후가 궁중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주장들 중에서 어느 것이 진실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의 형세나 장황후의 개성으로 보아서는 가장 큰 가능성은 역시 자살이다. 하숙의 <<의안사략>>의 기록을 보면, 농민군이 북경성에 들어온 후, "궁중이 시끄러웠다. 황후는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맸다"고 되어 있다. 주동곡의 <<상원집>>에도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서안 장맹견이 궁으로 들어가서 친히 황후가 죽은 것을 보았다. 일찌기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외에 관방의 정사인 <<명사>>, <<청사고>>등의 책에서도 장황후는 북경성이 함락될 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가 성에 진입한 후, 명희종의 덕릉에 합장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추측이다. 아마도 나중에 명희종의 덕릉을 발굴하게 된다면, 이 역사 수수께끼는 혹시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