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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태공)

강태공(姜太公)은 왜 신기한가?

by 중은우시 2008. 10. 12.

글: 기련해(紀連海)

 

강태공을 얘기하자면, 우리는 중국역사상 아주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 일반백성들 중에서 강토공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강태공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물어보면,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 우리 일반백성의 마음 속에, 일반적으로 말하면, 강태공이라는 인물은 아주 신기하다고 느끼다 . 어떤 점이 신기한가? 그것은 네가지 분야이다:

 

첫째, 그의 이름이다.

 

만일 내가 너에게 성명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너는 나는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우리는 이름이 하나이다. 그러나, 강태공은 아니다. 강태공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강태공을 강태공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강자아(姜子牙)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강상(姜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여상(呂尙), 여망(呂望), 무슨 여아(呂牙), 사상보(師尙父), 무슨 상보(尙父)라고 부른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너는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 이름은 모두 그를 부르는 것이다.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강태공이 그렇게 많은 이름을 가지는 것이 사실은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현재 우리는 성씨(姓氏)를 구분하지 않고 있지만, 과거에 여인은 성(姓)이 있고, 남자에게는 씨(氏)가 있다. 강(姜) 자의 아래에 여(呂) 자가 나오는 것은 바로 강태공이 강씨성의 부락가족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성은 무엇인가? 성은 강이다. 씨는 무엇인가? 씨는 여이다. 이런 것이다. 우리는 현재 사람은 성씨가 하나이므로 잘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이다. 그의 이름이 신기한 것이다.

 

둘째는 그의 적관(籍貫)이다.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어디 출신인지를 따진다. 그리고 각 지방마다 서로 자기 지방사람이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좋은 사람을 서로 자기동네사람이라고 다퉜다. 그러나 현재사회는 다르다. 서문경이 어디 사람인지 아는가? 그는 같은 성사람이지만 두 개 현이 서로 싸우고 있다. 서문경이 우리 현 사람이라고. 우리는 잘 모르겠다. 원래 항일전쟁시기에 절강 해녕은 왕정위의 현적을 제명했다고 선포했었다. 왕정위는 우리 동네사람이 아니라고, 우리 동네에서는 왕정위와 같은 민족반역자를 배출하지 않았다고. 다시 2백년을 기다린다면, 왕정위는 전국각지에서 서로 자기 동네 사람이라고 우길 것이다. 정말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앞에서 많은 사람들의 조적(祖籍) 문제를 제기했는데, 강태공에게도 이런 문제가 존재한다. 강태공이 어디 사람인가? 내가 조사를 해보았다. 강태공이 우리 동네사람이라고 다투는 곳은 개략 10여군데이다. 이 십여가지 주장중에서 필자의 생각으로 세 가지 주장이 비교적 신뢰성이 있다. 이 세가지 주장의 이유는 모두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역사상의 기록상 강태공은 두 지방의 사람이다. 한가지 설은 바로 강태공은 동해(東海)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한가지 설은 강태공이 하내(河內)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동해가 어디인가? 동해라는 곳에 대하여도 역사상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산동성 일조시 동항구의 진루가도라는 것이다. 아주 정확하게 언급한다. 바로 이 거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주장이다. 두번째 주장은 이 동해는 해변에 있지 않고 내륙에 있다는 것이다. 어디인가? 바로 안휘성 부양시 임천현 경내의 강재진(姜齋鎭)이라는 곳이다. 이는 동해에 관한 두 가지 견해이다. 두번째 견해인 하내에 대하여, 이 하내가 어디인가에 대하여는 논쟁이 적다. 하내라는 곳은 바로 하남성 위휘시 태공천진(太公泉鎭)이다. 고증을 해보면, 이 세가지 주장에는 모두 약간의 근거가 있다. 그렇다면, 세가지 주장중에서 어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산동성 일조시 동항구 진루가도 사람이라는 설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이런 설을 취하는가?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이것이 사적의 기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태공의 대부분 후예들이 인정하는 것과도 부합한다. 당시 제나라의 수도인 현재 우리가 얘기하는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의 지방사적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강태공의 출생지는 바로 현재의 일조시이다. 그렇다면 강태공의 일부 후예인 노씨(盧氏) 세계종친회에 따르면, 이 노씨세계종친회는 한국의 노씨종친회도 포함한다. 그들의 가보기록에 따르면,  강태공의 출생지는 산동성 일조시이다. 그리고 바로 현재 강태공연구의 최고권위자중의 하니이고, 중국국방대학교수이며 그 자신이 강태공의 후예인 강국주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강태공은 산동성 일조시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것은 단지 그 중의 한 측면이다. 바로 모두 인정하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주의해야 한다. 강태공이 이렇게 재주가 있고, 이렇게 신기한데,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일 것이다. 왜 그러할 까? 그 원인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가 출생했을 때, 그의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분명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물정에 밝았을 것이다. 그가 보아온 세상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장면일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바로 강태공을 배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에 살았을 것이다. 강태공이 살던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은 어디였을까? 산동성 일조시 동항구 진루가도의 북쪽에 양성진이 있다. 산동대학 고고대는 미국고고대와 양성진을 고찰한 끝에 발견해 냈다. 지금부터 4천년전에, 전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는 바로 양성진이다. 양성진은 진루가도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강태공이 이러한 환경혹에서 살았다면 합리성이 있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가 칠셉세에 주문왕을 보좌하고, 나중에 주무왕까지 보좌할 수 있고,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최소한 견식이 넓은 사람이었다. 이는 우리가 얘기한 그의 두번째 원적이 신기한 점이다.

 

세번째는 그의 연령이다.

 

강태공의 또 다른 신기한 점은 그의 연령이다. 근주의 교외에서 태어난 강태공은 도대체 몇살까지 살았는가? 어떤 책에서는 팔,구십세까지 살았다는 것이고, 어떤 책에서는 백삼십,백사십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왜 이렇게 설이 갈리는가? 강태공은 도대체 몇 살까지 살았을까? 왜 모든 사람들의 기록이 다를까? 왜냐하면 우리는 정확한 연보가 없다. 하상주고고공정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우리는 이런 완전한 연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말하기 힘들고,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말하기 힘들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났을 때 칠십세라는 것이다. 그 후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강태공은 다시 삼십여세를 더 살았다. 이 두 가지 연령에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초사실에 따라 고증해보기로 하자. 강태공이 도대체 몇 살까지 살았을찌, 우리의 고증에 따르면, 강태공의 출생은 기원전 1128년의 음력 8월 초사흘이다. 즉,양력으로 개략 9월이다. 이 때 그는 산동성 일조시 동항구 진루가도에서 출생했다. 어떤 사람은 당신 말이 너무 정확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기원전 1128년이라니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증거가 있다. 이 강태공이 언제 주문왕을 만났는가? 우리는 먼저 주문왕을 알아야 한다. 그 당시에 그는 문왕이 아니었다. 우리의 후대가 그를 주문왕에 책봉한 것이고, 그가 살아있을 때 그는 아직 서백(西伯)이었다. 그 후에 주문왕이 주부락을 통치한 시간은 기원전1101년에서 1050년까지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분명 이 기간동안 강태공을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났지만 그가 도대체 언제 만났을까? 우리는 <<순자>>와 <<한시외전>>에 근거하여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났을 때, '나이 칠십하고 둘이었다" 이외에 "태공이 인의를 행한지 칠십이년, 문왕을 만났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중의 한 사람이다. 바로 직하학궁의 영수 순자이다. 순자는 조나라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가 얘기하는 산동 제나라에 왔고, 이곳에서 수십년간 강의했다. 그가 말한 것도 칠십이세에 만났다는 것이다. 이외에 <<사기. 제태공세가>>에는 이렇게 말한다: "주서백이 유리(里)를 벗어나 여상과 ..." 상나라를 멸하기 위해 준비했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증거를 보면, 강태공이 주문왕과 만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유리라는 감옥에서 도망쳐나온 때이다. 이때가 언제인가? 바로 기원전 1056년이다. 기원전 1056년에 72를 더하면, 바로 기원전 1128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를 그의 출생연도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음력 팔월 초사흘인가? 이것은 나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이는 강씨후예들이 매년 강태공을 제사지내는 날이 일년에 두번인데, 하나는 강태공이 출생한 날이다. 그들은 팔월 초사흘이라고 한다. 현재도 이렇게 제사지낸다. 그리고 이외의 <<여씨가보>>에도 이런 기재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강태공에 대한 세번째 신기한 점이다.

 

네번째는 그의 유적이 비교적 신기하다는 점이다.

 

바로 그가 흔적을 남긴 곳, 그가 살았던 땅, 법술을 썼던 곳, 이런 곳들이 비교적 신기하다. 주로 극진태공대(棘津太公臺)는 오늘의 일조시에 있다; 그리고 태공피주처(太公避紂處)는 오늘날의 유방시에 있다; 이외에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물고기를 잡는데도 대가 필요하다. 강태공조어대는 오늘의 섬서성 함양시에 있는데, 위수(渭水)의 가에 있다. 이외에 태공천(太公泉)이 있는데, 하남성 위휘시에 있다. 과거에는 길현(吉縣)이라고 불렀다. 더욱 심한 것은 무슨 동여태공묘(東呂太公廟)는 일조시 풍가구에 있다. 그리고 석번계태공묘, 영구태공묘, 함양태공묘, 무슨 위휘시태공사, 무슨 임치태공의관총 등등이 있다. 바로 강태공이 활동한 곳이 도처에 모두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강태공이 일생동안 도대체 어디를 가보았는지를 잘 모르겠다. 어디를 가든 모두 그의 흔적이 있다. 심지어 멀리 요녕에까지 사람들은 강태공이 그 곳에서 사십년간 머물렀다고 얘기한다. 이건 요녕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기>>에 기록된 것이다. <<사기>>에는 이렇게 써고 있는데, 요녕사람들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가 아닌가? 우리는 사마천을 믿어야 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