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극에서의 동탁
작자: 미상
삼국을 보면, 연의(演義)이든 사서(史書)이든, 한영제(漢靈帝)는 한헌제(漢獻帝)를 좋아했고, 황위를 그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이를 위하여, 한영제는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헌제를 동태후(董太后)에게 맡겨서 보살피게 하였고, 죽기전에 금군을 관장하는 태감(太監)에게도 헌제를 옹립하도록 부탁했다. 한영제는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자신의 모친을 제외하고는 곁에 있는 태감뿐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조치를 해둔 것을 보면, 그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명확하다.
하진(何進) 형제는 바로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다. 하태후(何太后)의 아들이 황제위를 승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동태후까지 독살해버린다. 십상시(十常侍)는 당연히 간악한 악당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뼈속까지 미워할 정도였다. 하진은 십상시를 상대하는데 자기의 역량이 부족하여 지방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명확히 십상시를 반대한다고 태도를 나타낸 사람은 동탁 뿐이었다.
동탁이 입경(入京)하기도 전에 낙양에서는 이미 피바람이 분다. 십상시가 하진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원소(袁紹)는 하진을 위하여 복수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십상시를 죽인다. 곧이어 하진의 동생인 하묘(何苗)도 죽여버린다. 죽이고 죽이면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병사를 이끌고 북망까지 가서 납치당한 황제를 구해준 것은 오로지 동탁이었다. 동탁이 입경할 때는 병사가 얼마되지 않았다. 하진의 옛부하들은 모두 동탁에게 왔다. 그들이 왜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원소에게 가지 않고, 동탁에게 왔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원소가 하묘(하진의 동생)를 죽였다는데서 그의 의도가 너무나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진의 부하들로서는 그에게 갈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서에 따르면, 동탁이 소제(少帝)와 얘기하면서 소제가 겁이 많고 유약하고, 진유왕(陳留王)이 아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동탁이 만일 자기의 권력장악만을 생각했다면, 당연히 유약한 황제를 세워놓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황제가 멍청하다면 그의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능력이 있는 헌제를 세운다. 이 점만 보더라도, 동탁의 진심은 한나라 황실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탁은 권력이 집중된 대신인 것은 맞다. 그러나, 권력이 크다고 하여 반드시 간신은 아닌 것이다. 주공(周公), 제갈량(諸葛亮)도 대권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고, 이윤(伊尹), 곽광은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운 적도 있지만, 그들을 충신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동탁도 그들과 유사하다. 그저, 불행히도 그는 나중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나중에 삼국의 황제가 되는 조조, 유비 그리고 손권의 부친이 모두 동탁에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동탁에 대하여 좋게 말해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탁은 간신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실제상, 손, 유, 조는 모두 나중에 황제에 오른다. 유비는 어쨌든 황숙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둘은 모두 한적(漢賊)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십팔로의 제후가 동탁에 반대하자, 동탁은 낙양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물러난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십팔로의 제후들은 동상이몽이고, 한 마음으로 협력한 것이 아니다. 동탁의 실력은 그들보다 강한데, 왜 물러났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전을 원치 않은 것이다. 조조가 쫓아갔지만, 결과적으로 참혹하게 패배하고, 조조는 하마터면 홍농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다. 조홍이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구해주었기에 망정이다. 이는 동탁에게 실력이 있었고, 준비도 있었으며,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동탁에 반대한다. 원래 적들끼리 서로 싸워서 죽이게 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도 동탁은 사람을 보내어 두 사람을 화해시킨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잠시 싸우지 않기로 한다. 이는 동탁이 그저 겉으로만 조정을 해준 것이 아니라, 진실로 노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기의 두 적에게 서로 싸우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자기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그렇지만 국가나 백성에게는 이롭다. 동탁이 이렇게 하였다. 그가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인가?
동탁이 낙양에서 물러날 때, 수백만명의 백성이 그를 따라갔다. 유비가 신야(新野)로 물러날 때는 십여만명의 인민이 그를 따라갔다. 이는 이 두 사람의 인망이 두터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망의 크기는 따른사람의 수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일에 대하여 후세 사가들의 묘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사가들의 치우친 평가때문이 아닐까?
필자는 이런 비교를 제안한 바 있다. 사람들은 동탁이 총칼로 억지로 위협해서 백성들이 따라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유비도 총칼로 위협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신야를 불로 태운 이야기를 보면, 유비는 도망갈 때 신야를 불태워서 추격병을 막았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웠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아마도 십팔로제후가 낙양성에 들어온 후에 불태웠을 수도 있다. 최소한 불이라도 질러야 약탈의 흔적을 없앨 수 있을테니까. 불태웠다고 치더라도, 어쨌든 유비와 동일한 조건이다.다시 말해서 연의에서 유비가 십여만의 백성을 데리고 장판파에서 조조에게 추격을 당하는데, 조조의 병사들이 살인약탈을 진행했다. 조자룡이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겨우 아두 하나만을 구해냈을 뿐이다. 동탁은 수백만의 백성을 데리고 장안으로 갔다. 그리고 역시 같은 조조가 추격해왔다. 결과적으로 동탁을 조조를 물리친다. 동탁을 따른 백성들은 조조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약탈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탁을 따라간 백성들은 유비를 따라간 백성들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채옹(蔡邕)의 운명은 거울이라고 할 수 있고, 동탁의 사람됨을 보여준다. 재주있고 양심있는 지식인이 환관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갖은 고생을 다하고, 나중에는 동탁을 동정했다는 것때문에 감옥에서 죽어간다. 동탁이 정권을 잡았을 때만 그는 자기의 재주를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동탁이 헌제를 옹립할 때, 원소는 손에 검을 쥐고 동탁과 싸웠고, 싸우고나서는 떠나가버렸다. 동탁을 그를 쫓아가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발해태수로 임명한다. 이 일만 보더라도, 동탁은 그릇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원소는 오히려 거꾸로 공격해서, 반동탁군의 맹주가 되니, 이는 배은망덕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원소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미친 개라는 것이고, 누구든지 그에게 잘해주면 그를 물어버린다. 동탁은 그를 태수에 봉해주었는데, 동탁을 물었고, 맹주가 된 이후에는 동탁을 물지 않고, 아예 자기의 맹우(盟友)들을 물었다. 한복(韓馥)은 그에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이었는데, 가장 먼저 당한다. 손견은 선봉에 나서기 전에 원소는 유표를 꼬드겨 그를 습격하게 한다. 그리고 맹우인 공손찬과 공융이 싸우게 만든다.
삼국지를 보면 마등(馬騰)과 한수(韓遂)는 이전에 모두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에서 여러해동안 이들을 토벌하려 했지만 진압하지 못했다. 동탁,손견은 모두 이 전쟁에 참가한다. 결국 이 두사람은 모두 동탁에게 투항한다.
삼국연의는 동탁을 가장 요마화(妖魔化)한 소설이다. 그래도 연의를 보면, 동탁은 아주 귀여운데가 있다. 그는 여포가 봉의정에서 초선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그런데, 돌아서서 이유의 말을 들은 후에는 초선을 여포에게 주려고 한다. 이 점만 보더라도 동탁은 그릇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초선은 죽어도 그를 따르겠다고 하자, 동탁은 원래의 생각을 바꾼다. 최소한 동탁은 초선을 장난감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감정적으로 초선의 바램을 아주 중시해준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때 정말 이런 생각을 하였다면, 동탁은 아주 개명되고 진보적인 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환계의 대목을 보면, 동탁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왕윤이 아주 비열하고 악착같다고 초선이 음험하고 독랄하다고 느끼게 될 뿐이다. 이들 부녀의 수법은 요즘 길거리의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미색을 미끼로 하여, 사기, 살인, 강도를 저지르는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동탁에게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최대의 적은 원(袁)씨집안이다. 손권이 원술(袁術)에게 양초(糧草)를 달라고 하는 것은 원씨를 위하여 일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여포가 원소에 의탁한 것은 자기가 원씨를 위하여 복수하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동탁이 죽은 후에 그에게 불을 붙인 사람도 원씨집안의 문생이다.
동탁이 죽은 후, 그는 계속 요마화되었다. 조조가 권력을 장악한 후, 자기가 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동탁을 요마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유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조조를 동탁에 비유했다. 손권의 부친인 손견도 반동탁의 선봉에 섰다. 당연히 이 전쟁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챙겼다. 그리고 원소, 원술, 여포 이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달랐지만, 동탁에 대한 태도는 이구동성으로 같았다. 요마화하는데 일치했다. 동탁이 죽자마자부터 시작하여 계속 그는 추악화되었고, 더러워진 명성을 수천년동안 깨끗이 씻어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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