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지걸(張之杰)
옛날 그림을 뒤적여보면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역대미녀도에 그려진 미녀는 모조리 홑꺼풀이고, 쌍꺼풀은 한 명도 없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홑꺼풀(單眼皮)은 몽고인종의 특징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눈썹의 위에 지방이 비교적 많아서, 중간에 주름이 잡힌 후 윗꺼풀이 전부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한족은 순수한 몽고인종이란 말인가?
그러나, '고대'를 언제까지로 볼 것인가가 문제다. 진, 한 이전에는 한족의 혈통이 비교적 순수한 편이었다. 이는 병마용에서 출토된 진용(秦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진용을 보면 하나같이 얼굴은 넓고, 코는 좁다. 그리고 모두 홑꺼풀의 봉안(鳳眼, 찢어진 눈)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몽고인종이다. 그러나, 진(晋)나라 황실이 동쪽으로 이주한 후, 한족의 유전구조는 이전의 진, 한 처럼 그렇게 '순수'하지 않게 되었다. 4세기에서 6세기까지(위진남북조),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침(오호란화)하고, 결과적으로 이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 난을 피해 남하한 한족은 약간의 남방토착민족과 융합한다. 찬란한 대당문명은 바로 이번 민족대융합의 결과물이었다.
종족유전학에 근거하면, 중대한 외력의 간섭이 없으면, 유한한 시간내에 종족군의 유전인자구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족에 있어서, 위진남북조 시대의 민족대융합은 중대한 외력의 간섭에 의한 것이다. 간섭의 결과로 한족의 유전인자구조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나라때의 벽화나 당나라때의 조각상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벽화와 조각에는 모두 오똑한 코와 깊은 눈(凸鼻凹目)을 가지고 있는 오랑캐족이 나타난다. 그리고 수량도 상당히 많다. 쌍꺼풀도 나타난다. 그러나 한족의 얼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쌍꺼풀은 여전히 대량으로 나타나진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이들 벽화와 조각이 모두 북방에 소재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북방은 여전히 중국의 문화중심이고, 북방한족에 동화된 흉노, 선비족등의 유목민족은 당연히 순수한 몽고인종이다. 북방한족의 유전구조가 변하더라고, 눈꺼풀에 있어서는 몽고인종의 특징중 하나인 홑꺼풀에 별로 영향을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당나라 미녀도에 나오는 미녀들은 하나같이 가늘고 찢어진 봉안(鳳眼)과 홑꺼풀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시 체질인류학의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지, 심미관(審美觀)의 고려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위진남북조의 민족대융합과 유사한 민족대융합이 송나라때도 발생한다. 남송때부터, 중국의 문화중심은 장강유역으로 남하한다. 한족이 남으로 발전해가면서, 많은 동남아계통의 민족이 한족에 융합되었다. 동시에 북방에 침입한 요(거란), 금(여진)등의 이민족도 한족에 동화되었다. 개략 원나라때부터, 남방토착인들은 대부분 한화되고, 북방한족은 더 이상 새로운 피를 대량으로 수혈받지 아니한다. 남북각지의 한족의 유전구조는 이때 기본적으로 완성된다.
민족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한족은 하나의 민족으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중국대백과출판사의 위구르족 친구와 일찌기 이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무엇이 민족인가? 지금까지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55개 소수민족이외의 각양각색의 잡종이 모인 것이다" 그의 주장은 유머스럽기는 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족은 공동의 표의문자, 유가사상과 '천하'개념으로 응집력을 지니고 있고, 서로 다른 방언과 심지어 혈연의 족군으로 굳게 응집해서 하나의 대민족을 이루었는데, 이는 인류역사상으로도 아주 드문 일이다.
송나라때의 회화는 사실을 중시했다. 주제도 다양했고, 세속스러운 것도 회피하지 않았다. 송나라때의 인물화중에서 송나라사람들의 체질과 용모를 엿볼 수 있다. 개략 원나라때부터, 문인화가는 직업화가를 대체하고, 화단의 주류가 된다. 문인화는 심령의 느낌을 중시했고, 대상과의 모습이 동일한지는 중시하지 않았다. 문인화가 화단을 휩쓸 때, 초상화와 민간묘벽화만이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비록 초상화가는 장인으로 폄하되었지만, 조정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초상화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역대에 전해지는 초상화에서 많은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아무렇게나 화집을 뒤적여 보았고, 역대제왕과 황후중에서 송태조(조광윤)은 홑꺼풀이고, 그동생 송태종(조광의)는 쌍꺼풀이며, 원세조(쿠빌라이)는 홑꺼풀이고, 그 황후인 체보르는 쌍꺼풀이고, 명태조, 마황후, 명성조(영락제)는 홑꺼풀이고, 명선종은 쌍꺼풀이며, 청성조(강희), 청세조(옹정)은 홑꺼풀이며, 청고종(건륭)과 그의 귀비 혜현은 쌍꺼풀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역대화가중에서 송휘종, 예찬(운림), 운수평(남전), 금농(동심)은 홑꺼풀이고, 심주(석전), 서위(문장), 증경(파신), 진홍수(노련), 왕시민(연객)은 쌍꺼풀이었다...
만일 더 많은 고인의 화상을 조사한다면, 남, 북의 쌍, 홑꺼풀의 비율을 조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현재의 비례와 비교한다면, 재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대만에 있어서, 대만인의 유전구조는 확실히 변했다. 1949년에 건너간 150만의 군민은 대만에 새로운 문화를 가져왔을 뿐아니라, 대만인의 유전인자구조도 변경시켰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는 족군유전학과 인류학, 사회학에 아주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당나라이후 쌍꺼풀이 증가하는 것은 아마도 서역의 오랑캐(코카서스종)의 혼입과 남방개발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당나라때는 대량의 서역인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당연히 중국한인과 통혼하였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남방의 토착민들은 비록 몽고인종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중해인(코카서스인), 흑인과도 섞여 있다. 과거 그들은 화남(심지어 화중)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한족이 남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어떤 사람은 동화되고, 어떤 사람은 남으로 이주했다. 인도지나인, 말레이시아인과 중국남방소수민족의 몸에는 화남원주민의 원시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필자의 집부근에 태국노동자 숙소가 있다. 퇴근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대량의 남녀 태국노동자들이 부근을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일부러 이들 태국노동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동그란 큰 눈과 쌍꺼풀을 지니고 있다. 태국족은 원래 화남에 살다가 2-10세기에 태국으로 이주하였다.
필자는 내몽고초원의 목장지구를 다녀온 적이 있고, 한화된 몽고족들과 접촉했다. 필자는 이들 전형적인 몽고인종인 몽고족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은 확실히 대부분 가늘고 찢어진 눈에 홑꺼풀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오관과 모습에서는 이천여년전의 진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용은 모조리 홑꺼풀이고, 그리고 당나라때 벽화나 조각에서는 드물게 쌍꺼풀이 나타나고, 송나라때 이후의 초상화에서는 쌍꺼풀이 확실히 증가한다. 이들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민족융합이 진행됨에 따라, 한족의 유전인자구조가 계속 변화해 갔다는 것이다. 일찌기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때와는 달라진 것이다.
비록 초상화에 나타나는 남녀인물은 쌍꺼풀도 있고, 홑꺼풀도 있는데, 왜 역대 미녀도에 나오는 미녀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홑꺼풀일까? 이는 왜 그런가? 아주 간단하다. 사람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사실에 충실해야 하지만, 미녀도를 그릴 때는 그런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심미관에 따라 자기 마음 속의 미녀를 그리면 되는 것이다. 역대의 심미관이 불변으로 고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풍만함을 좋아했고, 명청시대에는 섬약한 것을 좋아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가늘고 찢어진 봉목(鳳目)과 홑꺼풀에 대한 선호이다. 회화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물화는 동진의 고개지가 그린 <<여사잠도>>이다. 이때부터 청말민초까지 심지어 항일전쟁이전까지 홑꺼풀과 세장봉안(細長鳳眼)에 대한 선호는 전혀 변하지 않았었다.
미녀도가 천편일률적으로 홑꺼풀인 것은 아마도 진(晋)나라와 당(唐)나라때는 사실대로 그린 것일 것이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홑꺼풀인데,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써 쌍꺼풀로 그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서방화가가 서방인을 그릴 때 홑꺼풀로 그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그러나, 송나라때부터는 미인화를 홑꺼풀로 그리는 것이 하나의 절차가 되어버린 것같다. 절차가 형성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형성된 미에 대한 관념에 속박을 받은 탓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중국인의 심미관이 서방의 심미관에 의하여 흔들리기 전까지는 중국인의 미인에 대한 기준은 분명히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중국인의 자체기준은 개략 항일전쟁을 전후하여 철저히 무너진다. 1997년 10월, 필자는 중정예랑에서 "백년판화해보정품전"을 보았다. 여기에 전시한 "월분패화(月份牌畵)"중에서 개략 변화의 과정을 읽을 수 있었다. "월분패화"는 20세기초에 상해에서 시작되는데, 일종의 서양화기법을 사용한 미녀도광고화였다. 일찌기 월분패화에 그려진 미녀는 모습이 섬약하고 눈은 세장봉안이었으며, 홑꺼풀이 많았다. 나중에는 자태가 비교적 건강하고, 눈도 쌍꺼풀이 많으며, 큰 눈망울을 지닌 경우가 많아졌다. 변화의 궤적은 분명하였다.
그날, 나는 음단사림포를 파는 월분패화에 눈길이 갔다. 그림에서 하늘색의 음산사림 치파오를 입은 미녀는 이려화(李麗華)가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과연 그녀였다. 그녀의 서명 이외에 그녀가 쓴 광고글이 있었다. 내가 그녀의 눈을 자세히 보니, 홑꺼풀이었고, 쌍꺼풀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서 이려화는 분명히 쌍꺼풀이었다. 어떻게 그림에서는 홑꺼풀로 그려졌는가? 이 그림은 개략 초기의 그림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진면목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이 홑꺼풀을 잘라서 쌍꺼풀로 만드는 것은 전통심미관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의 몰락을 상징한다. 전세계 5분의 1의 인구를 지니고 있고, 한족이 주체인 중화민족이 언제나 서양을 쫓는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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