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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문혁 이전의 대학입학시험

by 중은우시 2007. 6. 25.

글: 신문오보(新聞午報)

 

중국의 대학입학시험은 곡절을 겪어왔다. "문혁"기간중 1966년-1970년의 5년간은 신입생을 뽑지 않았었고, 1971년-1976년의 6년간은 공농병학원을 추천하여 대학에 입학시켰다. 1977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입학시험이 이루어졌다. 이전에도, 1958-1965년의 8년간 대학입학시험에서는 여전히 "불의녹취(不宜錄取, 합격시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과 "강격녹취(降格錄取, 격을 낮추어 합격시킴)"의 정책이 있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신중국교육역사상의 이러한 극좌적인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필자의 중학(중국에서는 중고등학교를 초급중학, 고급중학이라고 하고 합하여 중학이라 함)시대는 고성인 카이펑(開封)에서 보냈다. 중화민국시대부터 1950년대초까지는 카이펑이 허난성(河南省)의 성도였다. 내가 다닌 고등중학은 제59회졸업생이 모두 200여명이었는데, 1959년의 대학입학시험에서 진학을 원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일부 아주 뛰어난 학생들이 낙방하여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당시의 분위기하에서 사람들은 그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 의문은 가졌지만, 그저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개혁개방이후, "좌"의 착오는 하나하나 시정되었다. 그러면서 그 때의 수수께끼는 하나하나 풀렸다. 원래 우리가 고중3학년에 올라갈 때, 학교측은 기밀유지를 한 상태로 학생들의 정치심사를 마쳤다. 소련유학생과 무시험대학진학생을 제외한 사람들은 정치심사결과를 4가지로 나누었다. 1. 기밀전공에 합격시킬 수 있는 학생, 2. 일반전공에 합격시킬 수 있는 학생, 3. 강격녹취, 4. 불의녹취. 정치심사의 근거는 개인의 사상이나 학업성적이 아니라, 가족출신배경과 사회관계였다. 출신이 부농가정이거나, 1957년 우파로 규정된 집안이거나, 해외관계 특히 홍콩/마카오/대만과 관계가 있는 학생은 기본적으로 불의녹취나 강격녹취에 해당하였다. 당시 대학신입생은 먼저 정치심사결과를 보고 다음에 대학입학시험성적을 보았다. 필자의 동창은 이로 인하여 대학입학기회를 놓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에서 약간의 예를 들도록 하자.

 

강설(江雪). 1954년, 조선전쟁지원군에서 퇴역한 후 시험을 거쳐 육재중학 2학년에 들어왔다. 시험마다 5점만점의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다. 고등중학에 무시험합격한 후, <<인민일보>>에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고, 학교학생회부주석, 공청단서기를 지내고, 여러번 "삼호학생", "우수단간부"로 뽑혔다. 1959년 대학입시에서 강설은 자신의 정치적인 업적이나 성적이 모두 자신있었으므로, 북경대학, 북경사범대학등 명문대학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것은 이러한 회신이었다: "신입생 인원수에 한도가 있어, 금년에 당신은 합격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강설은 자신의 가족출신문제로 낙방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1959년 문과 대학입시에서 각과의 성적이 모두 85점이상인 경우는 전체 허난성에서 딱 두 사람이었으며, 강설의 점수가 가장 높았다는 것도 알았다. 당시 8개의 대학이 모두 이 "허난성문과장원"을 합격시키고 싶어 했지만, 그러나 모두 "불의녹취"라는 정책앞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범천성(范天成). 그는 선생들이 보기에 문과이과를 겸비한 천재였다. 고중시절에 파블로프의 고급신경학설, 루슬로프의 원자구조모형이론, 화학중의 전리이론, 수학중의 기하체계등에 빠져들었다. 그는 여러가지에 흥미가 많았으며, 시야도 넓었다. 이미 의식적으로 전대의 성공한 학자들이 가던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대학에 입학한 후, 창조적인 연구에 몰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학생도 역시 가족출신문제로 "불의녹취"대상이 되었다. 그는 직장을 찾을 때에도 겨우 소학교에서 언어, 산술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하는데 갈 수밖에 없었다.

 

여연매(呂延梅). 초중시절 전과목 만점의 학생이고, 고중에 무시험합격했었다. 그는 비록 부농출신이지만, 학업성적이 우수한 것을 믿고 북경대학 수학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대학합격통지서에서는 편지의 오른쪽 아래에는 북경대학이라는 네 글자가 찍혀 있으나, 볼펜으로 지워버리고 "개봉사범대학"으로 고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다시 지워지고, "개봉사범전문학교"로 다시 고쳐졌다. 개봉사범전문학교는 2년제이다. 여연매는 비록 합격하였지만, 그가 다닌 것은 겨우 1년짜리 수학단기훈련반이었다. 이런 단기훈련반은 학력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북경대학에서, 전문학교 1년의 단기훈련반으로 떨어졌는데, 여연매는 1959년의 "강격녹취"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당시 이렇게 하는 곳은 개봉육재중학 1곳만은 아니었고, 허난성만의 일도 아니었다. 상처받은 사람은 고중학생만이 아니라, 초중생들마저도 고중에 합격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것이 1년만도 아니었다. 문혁초기의 개봉의 모중학의 자료를 찾아내서, 학생들은 바로 대학입학시험에 참여하려던 66회졸업생들의 정치심사자료를 보게 되었다. 분류는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했고, 이 일은 개봉시내를 뒤흔들어놓았다. 이것은 1966년까지도 "불의녹취", "강격녹취"의 정책이 여전히 집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혁"으로 대학입학시험이 중단되어서,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었다. 자료를 살펴보면, 1958년, 허난성의 모시의 경우 "불의녹취"의 비율은 7%, 1966년에는 6.1%였다. 1958년에서 1966년까지, 8년동안 전국에서 "불의녹취" "강격녹취"에 해당한 초중,고중생은 도대체 얼마나 될 까?

 

손중산의 손녀인 손수방(孫穗芳)은 <<나의 할아버지, 손중산>>의 후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5년, 나는 상해제8여자고중을 졸업했다. 나느 3년의 고중에서 총평균성적이 90점이상이었고, 오호학생으로 평가받았다. 교사의 지시하에, 나는 5명의 동창들이 졸업시험을 합격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비록 이런 성적이었지만...나는 어느 대학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나는 자기의 미래에 대하여 아주 비관적이 되었고, 울고자 해도 울 수도 없었다...그저 조모인 송경령에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조모는 금방 회신을 해주었다. 편지에서: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녀는 편지의 마지막에 그러나, 내년에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어주었다. 나는 다음 해에 상해동제대학에 입학했다" 손수방의 회고는 1958년이전의 대학시험에서도 비슷한 정치심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저, 1958년이후에 정치심사에 미치는 내용이 더욱 넓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극작가인 오조광(吳祖光)은 그가 발표한 몇 편의 문장에서 자신이 "우파"로 몰린 비참한 지경을 토로한 적이 있다: "무슨 반우, 비판, 검사, 노동을 나는 모두 받았다. 그러나,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나의 가족이었다..나의 세 아들은 모두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장남인 오강은 근교농촌에서 '단련'을 받았고, 차남 오환은 '초중'을 마친 후 북대황에 보내졌다. 작은 딸 오상은 초중 졸업후, 원래 그녀를 가장 아꼈던 학교선생은 그의 고중입학자격을 취소해 버렸다..."

 

작가, 화가, 예술가의 신분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는 풍기재(馮驥才)도 천진의 "불의녹취"자였다. 대만작가인 시숙청(施叔靑)의 방문을 받고, 풍기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61년에 고중을 졸업했고, 중앙미술학원에 시험을 봤다. 나는 출신이 나빠서, 2차시험이 끝난 후, 교수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가염의 산수화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는가' 나는 얼른, '좋다'고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나는 합격하지 못했다. 원인은 내가 자본가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는 때였다. 미술학원에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그저 '천진국화연구회'에 가서 그림그리고, 예술에 빠지게 된 것이다..."

 

우라극(遇羅克)도 "불의녹취"의 경력이 있다. 우라극은 1924년생이다. 북경시사람인데, 그의 모친이 해방초기에 북경의 십여명노동자가 있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었다. 우라극은 이것때문에 자본가출신이 되었다. 1957년 우라극의 부모는 모두 '우파'로 규정받고, 1960년 그는 대학입시에서 낙방한다. 이후, 그는 적극적으로 북경교외의 인민공사에 가서 농사를 짓게 된다. 1962년, 우라극은 대학입시에 다시 참여하고, 북경사범대학은 그를 합격시킨다. 그러나, 그가 소재하던 대대에서는 그의 인사당안을 내놓지 않았다. 결국 그의 '가정성분'이 문제였다. 결국 그는 다시 낙방하였다.

 

제1회 서지(徐遲)보고문학상을 받은 작품인 <<호양루(胡楊淚)>>에서 주인공 전종인은 바로 "불의녹취자"이다. 전종인은 1963년, 후난성(湖南省)에서 대학입시에 참가하고, 호남성에서 10위안에 들었고, 청화대학도 그를 받아주려고 했으나, 가정출신문제로 그가 소재한 인민공사에서 인사자료를 넘겨주지 않았다. 1963년 그는 다시 대학입시에 참가하여, 하얼빈공업대학에 합격하였으나, 3개월후, 인민공사서기가 학교에 핍박하여, 학교는 그를 퇴학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1965년 그는 다시 한번 대학입시에 참가하고자 하였으나, 인민공사가 나서서 그를 대학입학시험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전종인은 할 수 없이 신강으로 가서 살길을 모색하게 되고, 스스로 수학을 계속 배운다. 1984년 <<호양루>>라는 글이 발표되자, 전종인은 각계의 중시를 받게 되고, 그는 마침 기자가 되어 사업을 벌이고자 하는데, 간암말기 진단을 받게 되고, 1985년 10월 1일 사망한다. 그의 나이 겨우 41살때이다.

 

"불의녹취"정책이 집행되던 때는 입시생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입시생이 부족했다. 국가는 전문인재가 시급히 필요했었던 시대였다. 당시 허난성 교육청에서 하달한 문건을 보면, 1959년 대학입시는 참가학생의 수가 부족하여 일부 대학은 1960년 봄에 추가모집을 하였고, 재직인원에게도 대학입시를 보거나 무시험입학을 하도록 장려했다. 1960년 4월 25일 허난성 교육청은 "금년고중2년생들중 일부학생을 대학입학시험치도록 하는데 대한 통지"를 보냈다. 이 통지에서는 1960년 각급대학에서 허난에서 뽑는 학생이 17300명인데, 졸업생은 겨우 14756명에 불과하고, 그중 정치, 건강문제로 불합격하거나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을 10%로 계산하면 1476명이므로, 이런 학생을 빼고나면, 4010명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이런 대학입학시킬 수 없는 10%는 주로 정치적인 조건이 맞지 않는 학생이고, 성적은 대부분 뛰어나고, 나라를 위하여 일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불의녹취"정책의 집행은 비교적 느슨했다. 1980년대 "중국지식분자의 우수한 대표"(섭영진의 말)로 뽑친 장축영(蔣築英)이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당대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양호한 고등교육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그의 부친은 노동개조받은 가정문제가 있지만,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이는 그의 모교가 그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이다. 개봉육재중학의 전교장도 천진의 모고중에서 공부할 때 스승이 아끼던 학생이었는데, 그가 원서를 낼 때, 가정문제가 있어서, 스승은 그에게 기밀전공이나 일류대학에 내지 말고, 제2급대학으로 내라고 하여 그는 낙양농기학원에 원서를 내고 순조롭게 합격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가 전국에 적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강설, 범천성, 여연매는 모두 이후 일하면서 우수한 실적을 나타냈고, 그 중의 두 사람은 공산당원이 되었다.

 

1998년 10월 31일,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사람은 중국계미국인인 최기(崔琦)였다. 그는 1939년 허남의 바오펑(寶豊)에서 태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나와 우리 동창들은 모두 감개무량했다. 왜냐하면 최기는 우리와 나이가 같고, 같이 허난출생이다. 더구나 최기의 누나 3명이 모두 홍콩에 산다는 엄중한 가정문제가 있었다. 만일 최기가 홍콩에 가서 공부하지 않고, 허난 바오펑에 남아서 공부했더라면, 그도 "불의녹취"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어찌 노벨상과 인연을 맺었겠는가. 그와 반대로, "불의녹취" "강격녹취"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운명이 최기와 같은 기회를 부여했더라면 노벨상을 받겠다는 것도 미친 생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귤화위지와도 같이 이는 개인의 총명함과 재지에 의존하는 것뿐아니라, 더욱 필요한 것은 문명, 민주를 숭상하는 너그럽고 조화로운 교육생태환경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카이펑이 고도 변량으로써 1천여년전에는 송나라의 수도였고, 중국의 4대발명중 3개가 송나라때 나왔는데, 이는 바로 북송의 고등교육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태학은 서한때부터 시작하였는데, 수당을 거치면서 더욱 완비된 국자학으로 발전하고, 송나라가 되어서는 이미 일련의 지식분자를 보유하게 되어, 북송은 마침내 경제발전과 과학발전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변량을 11세기 세계가 부러워하는 과학기술문화중심이면서, 100만인구의 번화한 대도시로 만들었었다. 옛날을 돌이켜보면, "불의녹취"의 역사는 중국이 20세기중기에 과학기술인재를 배양하는데 얼마나 큰 손실을 끼쳤을지는 생각해보면 너무나 분명하다. 

 

"불의녹취'정책은 그 당시의 "좌"의 정책을 명백히 보여주고, 인재를 성정하기도 전에 잘라버렸다. 피해자들이 입은 것은 "내상"이며, 은폐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우파"는 공개적으로 '시정'되고, 나라의 문도 열리고, 역사상의 여러가지 억울한 사건들도 명예회복되었다. 그러나, 당년에 "불의녹취" "강격녹취"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역사의 사각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 역사의 교훈은 쉽게 잊혀져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