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당산대지진때의 추악한 기록

by 중은우시 2007. 3. 30.

1976년 7월 29이루터 8월 3일까지의 1주일간, 재난으로 폐허가 된 당산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국인민해방군 당산군분구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데이타가 기록되어 있다: 대지진기간동안 당산의 민병이 회수한 절취강탈물건은 합계 - 식량 670,400여근, 의복 67,695벌, 포목 145,915척, 손목시계 1,149개, 깐베이 5,180근....

 

자료의 의하면 민병들에 붙잡힌 범죄분자들이 모두 1800여명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추악하고 부끄러운 숫자를 잊어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마치 당산대지진후 이런 소란의 1주일은 없었던 것처럼. 당산대지진때 있었던 이루 헤아릴 수없는 숭고한 원조, 숭고한 도움, 진정한 애정과 비교하면, 이 숫자는 오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도 적나라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이것은 확실히 보기 힘든 적나라한 역사이다.

 

7월 28일, 당산 사람들이 먼저 마주한 것은 사망, 그리고 상처와 아픔이었다. 그러나, 사망의 위험이 지나가자 마자, 피흐르는 상처를 막 붕대로 감고 몸을 추스리자 마자, 그들이 마주치게 된 것은 기아(飢餓)였고, 한랭(寒冷)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옷을 걸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어떤 사람은 목이 말라서 불이날 정도라는 것을 느꼈고, 어떤 사람은 배가고파서 위장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무너진 상점에는 대지진때의 진동으로 통조림, 의복이 흩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주웠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폐허 속에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은 아마 이렇게 시작된 것같다. 그들은 망설이면서 폐허로 갔다. 케익이 쌓여있는 식품점, 옷에 널려있는 백화점, 요와 이불이 쌓인 여관....그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다.

 

"우리 빌리자" 일부 사람들은 천신만고끝에 상점등의 직원을 찾고, 그들은 폐허속에서 종이와 연필을 찾아내고, 종이에 서명하고 날인하여 차용의 증거를 남겼다. 직원들은 처음에는 옛날처럼 규정대로 일을 처리했다. "안됩니다. 이것은 국가재산입니다" 그러나, 이런 규범은 금방 깨져버렸다. 큰 비가 내리는 와중에 젖은 몸을 둘 곳이 없던 사람들은 시퍼렇게 된 입술을 계속 떨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빗속에서 떨고 있는 상점직원들이 소리쳤다: "우의와 우산을 먼저 찾아내서 쓰자" 우의우산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폐허로 몰려들었다. 피묻은 발에는 새 신발을 찾아서 신었다. 길가의 지진대피소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지붕이 있었고 그곳에서 비를 피했다. 그들은 또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먹을 것을 가져오자" 그래서 모든 것은 바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생존을 위해서 응급구조를 위해서였따. 그러나, 사람들의 손이 원래 자기의 물건이 아닌 것으로 뻗어지기 시작하면서, 폐허에는 한바탕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욕망이 살아났다. 그들은 한무더기의 식품과 의복을 폐허에서 꺼내왔다. 얼마지나지 않아, 두번, 세번 그 짓을 하게 된다. 그들의 손에는 응급물품 이외의 물품들이 들려졌다. 서너명, 수십명, 수백명....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발걸음으로 폐허를 뛰어다녔다. 서로 먼저 가져가려고 했고, 기회를 놓칠까 두려운 듯했다. 모든 사람의 손에는 더 많은 짐이 들려졌다. 일부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호흡을 더욱 가쁘게 내쉬면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저지하려는 상점직원들을 밀어냈다. 이미 들 수 업슬 정도로 커진 보따리는 땅바닥에 끌고 다녔다.

 

"빨리 가.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갈라..."

"빨리 뛰어, 물건이 금방 동날 것같아..."

"빨리 가져와..."

당산에는 일종의 미친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약국의 폐허에서 어떤 사람은 인삼, 녹용, 천마를 캐고 있었다. 수산물가게에는 사람들이 해삼, 깐베이, 대하를 건지고 있었따. 어떤 사람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백화점으로 들어가서, 시계, 라디오, 의복재료등을 가져갔다. 그들은 어딘 가에서 새 자전거를 꺼내왔고, 새 재봉틀을 가져왔다. 길거리에 총총이 걸어가는 사람들중에 한 중년남자는 카페트를 묶어서 들고 갔고, 한 젊은이는 실을 한무더기 가지고 갔다. 한 여인은 심지어 건전지 한 상자를 들고 가기도 했다.

 

시끄러운 와중에 사람들의 손은 이미 국가의 재산뿐아니라, 다른 곳에까지 뻗어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광경도 목격했다. 한 할머니가 남자시체 앞에서 곡을 하고 있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곡을 마치고는 남자의 시체에서 손목시계를 풀어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그녀는 또 다른 남자 시체 앞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내아들아..'를 외치다가 다시 손목시계를 끌러서 갔다. 이렇게 장소를 바꾸어 곡을 하고, 시계를 풀어가다가 십여 곳을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1976년 8월 3일은 당산의 강절도가 최고조에 달한 날이었다. 한무리의 교외지역 농민들이 마차를 몰고, 트랙터를 몰고, 호미, 삽, 낫, 톱등을 들고 마치 금을 캐러 가는 것처럼 당산을 향해서 출발했다. 어떤 사람은 길가에서 "제방이 곧 터질려고 합니다. 제방이 곧 터집니다."라고 외친 후,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재물을 캐기도 했다. 그들은 상자를 열고, 장을 뒤졌다. 먼저 현금을 찾고, 이어서 가치있는 물건을 찾았다. 트랙터에 가득싣고 길가를 '툴툴'거리며 더러운 연기를 내뿜으려 가고 있었다. 한무리의 당나귀 말들과 뒤섞여서 가고 있었다. 이들은 훔쳐온 담배를 피우고, 훔쳐온 명주를 마셨다. 그들은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범죄의 행렬에 끼어든 것이다. 마침내, 길거리에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7월 28일 그날 당산의 거리에는 경찰이 있었다. 그들은 웃옷은 벗고,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 매고 있는 총만이 그들의 신분을 말해주었다. 강절도가 횡행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권총을 들고 길입구를 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막을래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지진에 죽고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강절도범'은 수백 수천의 이재민들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는 지진후에 즉시 치안전문가를 당산으로 파견했고, 사회혼란을 통제하고자 했다. 하북성과 당산시의 지진구호지휘부는 갈수록 심해지는 절취행위를 막는데 부심했다. 계속 보고가 올라오고, 계속 긴급회의를 열었다. 소란의 1주일간 사람들은 어떤 역량이 방출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때 조직할 수 있는 최대의 법집행인원은 민병이었다. 중국인민은행 당산시지행의 폐허위에서 노북구와 개란당산탕광의 민병이 나타났다. 그들은 맨발에 맨몸이었고, 어떤 사람은 이미 부러진 총을 들고, 어떤 사람은 몽둥이를 들었다. 그들이 한무리가 되어 밤낮으로 이 돈과 예금장부가 있는 장소를 지켰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유혹하는 폐허로 들어가고자 시도했고, 그들은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서로 머리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이 모든 소란이 끝난 후, 정부기관은 당산시의 모든 은행의 장부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300여만근의 양식을 보관하고 있던 서북정양식창고도 공기는 극도로 긴장되었다. 민병은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들고 있었다. 무너진 담벼락을 밤낮으로 경비했다. 양식창고 당지부는 상부의 명령을 받기 전에는 한톨의 양식도 나눠져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이 기간동안 창고내 인원은 마른음식을 먹었고, 불을 때서 밥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했다가는 군중의 불만과 혼란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병은 양식창고를 둘러싸고 만든 지진방어벽을 자기의 초소로 생각하며, 그 곳의 이재민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도 우리를 도와서 지켜주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양식을 빼앗으러 오면 여러분이 그들을 설득해 돌려보내 주십시오. 여러분이 참아주시면, 나중에 양식을 배분할 때 여러분들에게 제일 먼저 배분하겠습니다" 그리고, 은행의 폐허를 맴돌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양식창고를 둘러싸고 있던 굶은 사람들도 감히 경계선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양식창고의 지부서기인 왕수삼은 주변의 이재민들이 나누는 말을 몰래 들어보았더니: "양식창고는 털어서는 안돼. 이곳은 상점과는 달라. 양식창고를 터는 것은 감옥을 깨는 것이나 같고 사형을 받을 거야."

 

그러나, 그래도 담량이 있는 사람은 나서서 이치를 따지곤 했다. 한 개란의 광부는 왕수삼을 붙잡고 물었다. "지진으로도 죽지 않았는데, 우리를 굶겨서 죽일 작정이냐. 우리 집에는 80 노모가 계시는데, 양식이 없다. 말해봐라. 어째야 되는지?" 왕수삼이 설득해서 말했다. "양식창고의 양식은 구호지휘부에서 명령을 내린 후에 계획에 따라 분배될 것이다. 이 양식밖에 없다. 일단 혼란이 발생하면 반드시 어떤 사람은 쌓아놓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굶어죽을 것이다. 너희 집에 노모가 계시다지만, 우리는 전 당산시의 노모들도 생각해야 한다..." 광부는 벌컥 화를 냈다. "가자. 나랑 같이 가자. 지휘부로 가보자" 지진구호지휘부의 부서진 공공버스에서 당산시 인민무장부 부정치위원인 한민은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양식창고가 하는 게 맞다...." 그리고, 차량안에 있던 과자 한통을 가리키며, 그 광부에게 말했다. "저걸 가지고 가라"

 

이 때, 모든 상점의 폐허는 여전히 혼란이었다. 사람들은 감히 은행금고는 건드리지 못했지만, 어떤 사람은 가게금고를 부수기도 했다. 사람들이 양식창고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작은 쌀집에 있는 양식을 가져갔다. 심지어 군대의 트럭도 빼앗아가서, 훔친 물건을 옮기는데 썼다. 아무도 첫번째 총성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더 많은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미 공포탄이 아니다" "물건 훔쳐가는 사람을 보면 때려죽인다더라" 는 소문이 퍼져갔다. 소산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민병들에게 맞아죽은 물건 훔쳐가던 사람의 시체를 목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