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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황만리(黃萬里) : 삼협댐을 반대한 수리학자

by 중은우시 2006. 11. 9.

황만리(1911. 8. 20 - 2001. 8. 27)

 

그는 대학자 황염배(黃炎培)의 아들이며, 청화대학 수리학과 교수로 저명한 수리공정전문가이다. 1937년 유학에서 돌아온 이래로 필생을 경주하여 중국내의 강과 하의 치리에 바쳤다.

 

1957년 6월, 주은래 총리의 주재하에, 수리부는 70명의 학자와 엔지니어를 소집하여 북경반점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는 삼문협댐에 관한 소련전문가의 방안을 제시하고 의견을 물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전문가 중에서 온선장(溫善璋)이라는 사람이 댐하부의 수정의견을 제시한 것을 제외하고는, 황만리 한 사람만이 소련전문가의 삼협댐계획에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삼협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삼협댐이 건설되면 황하는 맑은 물이 흐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미나는 10일간 계속되었는데, 황만리는 7일간 참석해서 7일간 변론하며 싸웠는데, 나중에는 회의가 황만리를 비판하는 비판대회처럼 되어 버렸다.

 

1957년 상반기부터 삼문협공사가 시작되었다. 황만리는 청화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삼문협공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첫째, 댐건설후에 금방 니사(泥沙, 모래진흙)이 와서 퇴적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류에서 발생하던 수재를 상류로 옮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소위 "성인이 나타나면 황하가 맑아진다(聖人出, 黃河淸)"이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황하하류의 하상은 근본적으로 모래흙이므로, 댐에서 맑은 물을 내보낸다고 하더라도 하상중의 모래흙이 다시 섞여들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강의때 성인출 황하청이라는 것에 대하여 대놓고 비난하여,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아부를 좋아하며 최소한의 과학적인 정신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부쳤다.

 

일찌기 1956년 5월, 황만리는 <<황하삼문협댐현행계획방법에 대한 의견>>을 작성하여 황하유역규획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의견서는 전면적으로 소련전문가의 삼문협댐에 대한 계획을 반대하는 것이었고, 개별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지부의 당서기에 대하여 의견을 제출해도 '반당'으로 몰리는 때였는데, 감히 부총리 등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부정확'하다고 비난했으니 우파로 몰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반당반사회주의적 우파분자"가 되었다.

 

1958년 11월 25일, 삼문협공정을 하면서 황하의 흐름을 끊었다. 1960년 6월, 높이 340미터의 댐이 건축되었다. 그러나, 진흙은 퇴적되었고, 동관위에 진흙퇴적으로 좋은 밭 80무가 못쓰게 되었다. 삼문협공정을 다시 고치면서 "양동4관"의 방안이 확립되었고, 개선된 4개의 강관은 1966년 7월부터 운용되었다. 두개의 터널도 1967년 8월, 1968년 8월에 완공되었다. 그리하여 댐의 퇴적은 조금 완화되었으나, 진흙모래를 내보내는 능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사실은 황만리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어떤 사람들이 오히려 정확한 의견을 제출한 황만리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61년 황만리는 밀운으로 가서 노동을 하고, 창려에서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게 하고, 심지어 문혁기간중에는 삼문협에 가서 화장실을 청소하게 함으로써 그를 징벌하였다.

 

1980년 2월 26일, 22년간의 '우파생활'을 끊내고 황만리는 마침내 개정되었다는 결정을 받는다. "황만리동지를 우파로 분류한 문제는 잘못된 결정에 속한다. 중공북경시위원회의 비준을 받아 개정한다. 정치명예를 회복시키고, 대학2급교수의 급여대우를 회복한다"

 

이후 그는 장강삼협댐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는 국가지도자들에게 글을 올려서 장강삼협댐의 건설에 반대한다. 그는, 자연지리적인 관점에서 장강댐은 물을 막고, 모래의 흐름을 끊는 것이므로  소북지방의 매년 10만무에 달하는 육지조성이 방해받을 것이라는 것이고; 진흙이 중경위의 상류의 강에 퇴적될 것이며, 항로를 중단하게 될 것이고, 노주, 합천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며, 사천의 밭은 훼손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장강의 퇴적량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으므로 장강삼협댐은 영원히 유지보수하기 힘들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삼협댐보다는 더 상류의 계곡에 댐을 만들어 발전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하였다. 이외에 국방의 각도에서 보더라도 댐이 건설되면, 공습을 피할 수 없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도 하였다. "삼협댐을 만일 짓는다면, 결국은 폭파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1986년, 중공중앙, 국무원은 삼협공정에 대하여 논증을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황만리교수도 요청을 받아 논증에 참여하였다. 황만리는 여러차례 중앙지도자와 정치국, 국무원총리, 부총리, 국가감찰부에 서신을 보내어 삼협공정의 위해를 설명하고 중앙의 의사결정자들에게 30분의 시간만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하였다.

 

삼문협과 애스완댐의 전철이 있었지만, 삼협댐에 관한 의안은 1992년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대회에서 통과된다. 찬성 1767표, 반대 177표, 기권 664표였는데...찬성율이 이렇게 낮은 것은 중국의 전인대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삼문협공정은 4년이 지나지 않아서. 수리공정이 아니라 수해공정이 되어 버렸다. 생태재해를 되돌릴 수 없게 된 이후에 어떻게 생태를 회복할 것인지, 이 폐물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골치거리로 남게 되었다. 장래 삼협공정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삼협지구의 지질환경은 매우 복잡하다. 역대이래로 폭우와 홍수가 빈발하였고, 산사태가 많이 일어났다. 삼협댐이 있는 부근은 비교적 굳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지만, 상류는 쇄설암 탄삼암이 위주이고, 주라기유적인 분사암까지 있다. 지질용량, 환경용량이 선천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국토자원부가 조사한 산사태만 2490곳이다. 최근 2년간의 기후이상, 중경지역에 폭우, 산사태가 있었다. 이런 현상들이 생태상의 변이와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전문가들에 의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