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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역사상 소저(小姐) 칭호의 변천

by 중은우시 2006. 10. 10.

작자: 양발불(梁發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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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저(小姐)라는 칭호는 송(宋)나라때에는 비천한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소저라는 칭호의 변천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했던 사람은 청나라때의 학자인 조익(趙翼)이었다. 그는 <<해제총고>>제38권에서 "소저는 지금은 남방의 귀족집안의 여자를 소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송나라때는 규방의 처녀는 소낭자(小娘子)라고 불렀고, 소저는 천한 여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전유연은 <<옥당봉진록>>에서 왕궁에 불이 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원인은 차주(茶酒) 궁인 한소저가 방화후 사사로이 도망치려고 한 것이다"라는 문구가 나오니 여기서 소저는 궁비(宮婢)를 의미한 것이었다. 소동파도 <<성백석상증기인양저(楊姐)>>라는 시가 있으니, 여기서도 기녀를 양씨 소저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견지>>에는 부구라는 자가 놀기를 좋아하여 항상 노래를 부르는 임소저와 놀았고 서로 도망치기로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소저와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라는 글이 있다. 또한 건강의 여자인 창기 양씨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느 도사가 와서 "이는 건강의 창녀 양소저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여기서는 기생을 소저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나라때는 시녀나 기녀를 "소저"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외에도 몇 가지 예가 있다. 마순의 <<도주신록>>에는 진언수의 시첩을 악가의 <<왕혁요참>>에서는 홍공의 첩을 모두 소저라고 부르고 있다.

 

"소저"라는 칭호가 신분있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게 된 것은 원(元)나라 이후이다.<<서상기>>에는 여주인공 최영영에 대하여 "소저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영"이다라는 글이 나온다.명나라때 주유돈의 <<원궁사>>에도 소저는 규방의 지체높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속담에도 "소저의 신분에 시녀의 운명"이라는 말이 있으니 소저와 시녀를 구분하고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때의 <<홍루몽>>에서는 귀족집안의 여자 아이들을 모두 소저라고 부르고 있다.

 

"오사"신문화운동이후에는 소저의 적용범위가 귀족소녀에 그치지 않았고, 이 단어는 영어의 Miss의 번역어로 쓰였다. 소저는 이후 그냥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출신이나 신분과는 큰 관계가 없이 쓰였다.

 

해방후에 소저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용어에서 사라졌다. 당시에 편찬한 사전에서도 이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귀족 자본가계급의 부패한 생활을 연상시키는 단어로 생각되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동지"라는 하나의 칭호만 있었으므로 소저라는 칭호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개혁개방후에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다양화되고, 외국과 교류도 많아졌으며 사람들은 정치적인 용어인 "동지"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예의바른 칭호로 "소저"가 다시 등장하였다. 그러나, 좋은 세월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많은 경우에 이 단어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전락하여 버렸다.

 

"소저"라는 칭호는 나타날 때로부터 지금까지 그 의미가 한 바퀴를 돌아서 원래의 의미로 돌아갔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