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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교5

남명(南明)의 강북사진(江北四鎭): 이겨도 져도 강북사진때문이다. 글: 문재봉(文裁縫) 사진의 유래 숭정17년(1644년) 오월 초구일, 용상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고, 여전히 감국(監國)의 신분이었던 주유숭(朱由崧)은 회의를 열고 군사상황을 검토하여 남명의 방어선을 건립한다. 비록 주유숭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군사상황검토와 방어선건립'이지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주유숭이 하려는 일은 그저 논공행상이고, 그를 옹립하는데 공로가 있는 4명의 장군에게 상을 하사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주유숭은 그들의 관직을 올려주고, 그들에게 한 곳씩을 지키게 하였다. 군신간에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이했다. 이 네 명의 장수들이 발탁되면서 그들은 각각 한 곳씩의 지방을 차지하여 한 지방의 패주가 된다. 이두 그들에게는 새로운 칭호가 붙는다. 바로 "사진(四鎭)"이다. 이 4진.. 2020. 7. 13.
이자성의 부인들은 왜 다른 남자와 도망갔을까?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역사와 문화의 조작현상은 아주 두드러진다. 여러 지방에서는 모두 '역사명인'을 빌어 역사를 위조하고 있다.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이자성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중국역사 '7대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주 황당한 일이다. 이런 조작은 .. 2019. 4. 5.
이자성 행방의 수수께끼.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이자성은 섬서(陝西) 미지(米脂)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역졸(驛卒)을 지낸 바 있고 변방의 병사로도 있었다. 나중에 그는 농민반란군에 참가하여 명나라에 대항한다. 그리고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때 명나라는 이미 정치가 부패하고, 경제.. 2018. 6. 26.
좌량옥: 명나라말기 내부투쟁의 고수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홍광조(弘光朝)의 "남도삼안(南渡三案)"중에서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은 "북래태자안(北來太子案)"이다. 1644년말, 홍려시(鴻臚寺) 고몽기(高夢箕)에게 목호(穆虎)라는 종이 있었다. 그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도망쳐 오다가 도중에 한 젊은이를 만나서 두 사람이 동.. 2014. 4. 4.
이자성 생사의 수수께끼: 만청과 남명은 모두 그의 수급을 얻지 못하다 글: 감홍류(闞紅柳) 이자성이 석문협산으로 도망가 선승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호남성의 석문현은 풍양이라고 불렀고, 풍주라고보 불리웠다. 청나라 건륭년간의 <풍주지림>에 수록된 풍주지주의 <이자성전>에 따르면, 이자성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홀로 석.. 2013.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