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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기년12

"공화행정(共和行政)": 사마천의 <사기> 기록은 믿을 수 있을까?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기원전841년, 서주(西周) 공화원년(共和元年)은 중국에서 확실한 연호의 시작이다. 이 해를 전후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공화"라는 중요한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 전에, 주여왕(周厲王)은 포악한 행정으로 백성에 의해 축출되어 "체(彘)"로 도망친다. 주여왕이 도망친 후, 태자는 나이가 어렸고, 조정에는 14년에 걸쳐 국군이 없는 국면이 나타난다. 그동안 대신들이 공동으로 행정을 하며, 정치질서의 안정을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화행정"이다. 다만 이렇게 유명한 사건에 대하여 크게 충돌되는 사서의 기록이 있어, 의문점 투성이가 되었고, 천년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1. 공화행정의 3가지 버전 오늘날 우리가 "공화행정"을 알게 된 것은 주로 두 권의 대표적인 사서때문이다. .. 2023. 1. 19.
"봉화희제후(烽火戱諸侯)"의 역사진상 글: 양광요(楊光耀) "봉화희제후"라는 고사는 2천여년간 전해져 내려왔다. 이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과 이다. 나중에 명나라때의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이 쓴 에서 이를 윤색하여 소설에 넣는다. 그리하여 이 고사는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고, 후인들이 주유왕(周幽王)의 호색혼용(好色昏庸)을 비웃는 근거가 된다. 의 기재에 따르면, 포사(褒姒)는 아름다움으로 주유왕의 총애를 얻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포사는 아름답지만 웃지를 않았다. 주유왕은 미인의 웃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것이 '제후들을 놀리는' 것이었다. 그는 포사를 데리고 봉화대에 올라가서 봉화를 피워 제후들에게 병사를 이끌고 와서 왕을 보호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제후들은 봉화가 오른 것을 보자 천자가 위.. 2022. 5. 12.
<죽서기년(竹書紀年)> vs <사기(史記)> : 어느 기록이 더 믿을만할까? 글: 독서문사(讀書文史) 중국역사상 이런 기서(奇書)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고, 그리하여 봉건정통완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이 책을 얘기하자면, 먼저 전설적인 사건부터 시작해야 한다. 1. 의 출토: 도굴꾼과 관련이 있다. 태강2년(281년) 하내군(河內郡) 급현(汲縣, 지금의 하남성 위휘시)에서 중국역사상 중요한 영향이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준(不準)이라는 도굴꾼이 교외지역의 한 고묘를 도굴했다. 아마도 그는 묘를 파헤친 후 새카만 묘실에서 가지고 온 횃불이 금방 다 타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묘실에는 대량의 죽간(竹簡)이 쌓여 .. 2022. 5. 1.
공화(共和): 중국역사의 이정표이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주(周)왕조의 통치는 주목왕(周穆王)이후, 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나 주려왕(周厲王)의 재위기간에 민생은 도탄에 빠지나, 귀속들은 여전히 주색에 빠져 있었다. 기원전844년, 더 많은 재물을 긁어모아서 마음대로 쓰기 위해, 주려왕은 괵공장보(虢公長父)와 영이공(榮夷公)을 기용하여,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강제로,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왕의 소유로 선포하고, 평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하거나, 채집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사회 각계층의 이익을 건들였고,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주려왕은 예량보(芮良父)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이공을 경사(卿士)로 발탁하여, 계속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원성이 일어나고, 길거리.. 2020. 11. 9.
<죽서기년(竹書紀年)>: 중국고대의 비주류 사서 글: 지역사(知歷史) <죽서기년>은 위양왕(魏襄王) 시대에 저술되었다. 이 시대에 여러 나라가 나타나고, 유가(儒家)는 아직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죽서기년>은 서진(西晋) 연간이고, 이 때는 <사기>가 이미 중국역사기록의 '대표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서기.. 2019. 4. 22.
중국에서 1000년이상 개명하지 않은 역사도시들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12. 남창(南昌) 오대십국(五代十國)시기인 959년 남당(南唐)은 홍주(洪州)를 남창부(南昌府)로 승격시킨다. 지금까지 1000여년이 흘렀다. 11. 복주(福州) 당(唐)나라 개원13년(725년), 원래의 민주(閩州)를 복주(福州)로 개명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전의 일이다. 10. 양주(.. 2018. 6. 26.
<상서(尙書>의 요(堯)임금 : 아들보다 사위를 좋아했을까? 글: 천하무신(天下無臣) 아주 오래된 옛날에 우리들이 "요(堯)임금"이라고 존경하여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산서(山西) 사람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방훈(放勛)"이라고 불렀는데, <서이아(小爾雅)>의 해석에 따르면, "방(放), 기야(棄也)", 훈(勛)은 <이아(爾雅)>.. 2017. 6. 21.
해혼후(海昏侯) 유하(劉賀): 권신이 괴뢰황제를 고르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글: 악치(岳峙) 한(漢)나라 400년 역사상, 겨우 27일간 황제를 지낸 해혼후 유하의 존재감은 아주 낮다. 그를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우연히 그의 이름을 꺼낸다고 하더라도, 그저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혼후묘가 발굴되면서, 유하는 돌연 함어변신(鹹魚變身)한다. .. 2016. 3. 8.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내선득위패(內禪得位牌) 순편 무력으로 황위를 차지하는 범주에는 궁중정변의 방식으로 황제를 핍박하여 황위를 물려받는 것, 즉 선양(禪讓)받는 것이 포함된다. 선양은 비교적 온화하고 우아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고대에 요(堯), 순(舜), 우(禹)의 왕위가 선양으로 넘어간 것을 효시로 한다. 요,순,우의 선양방.. 2015. 10. 11.
하상주단대공정의 의문점 작자: 주법고(周法高) 2001년초, 필자는를 자세히 읽어보고 연구했다. 당시에 이 책의 여러 곳에 내린 결론은 지나치게 무단(武斷)했고, 논쟁이 있을만한 곳에 더 이상 추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는 1046년을 뜯어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이 바쁜 바람에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이제 다시 그 글을 읽어보니 반박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1. 주려왕(周厲王)의 재위년수 에는 주려왕이 37년간 재위했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후인들이 전후의 글 내용에 근거하여 37년이라는 시간을 잡은 것이다. 이 37년이 주려왕의 재위연수인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자들이 , 에 근거하여 주려왕의 재위연수는 13-25년이라는 점을 증명했다(흥미있는 독자는 스.. 2013. 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