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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45

만력제(萬曆帝):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글: 역사기실유취(歷史其實有趣) 만력14년, 서력1586년. 만력제 명신종(明神宗) 주익균(朱翊鈞)의 후계자분제가 정식으로 의사일정에 올라왔다. 황제의 나이가 적지 않고, 황제에게 아들도 있으니, 국본(國本)을 안정시키고 국조(國祚)를 이어가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루빨리 후계자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사자인 만력제는 후계자인 황태자의 후보와 관련하여, 일찌감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은 황삼자(皇三子) 주상순(朱常洵)이었다. 당연히 그가 이 아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애옥급오(愛屋及烏)의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주상순의 모친은 바로 만력제가 가장 좋아한 비인 정귀비(鄭貴妃)였기 때문이다. 먼저, 만력제는 일찌기 정귀비에 대하여 "유가옥질(柔嘉玉質), 완닉란의(婉嬺蘭.. 2023. 11. 7.
동림당(東林黨)은 대명왕조를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글: 요풍휘(姚豊輝) 명나라말기에는 유학자들로 구성된 동림당인들이 중용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유학자들의 글을 보면 이들 동림당인들은 '정인군자(正人君子)'였다. 그러나, 그들의 '당수'는 명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역사상의 '망국지신(亡國之臣)'임이 확실하다. 동림당의 핵심구성원들은 강남사대부를 위주로 하는 관료집단이다. 숭정제는 즉위후 동림당인들에 의지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들이 관직을 일단 차지하자, 말만 번지르르한 고상한 뜻을 펼치고자 했다. 고대 성인들의 이상적인 통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자 이들은 득의양양하게 즉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것을 고쳐야 한다 저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변법혁신을 주장한다. 소위 "혁제조야적폐(革除朝野積弊), 반대탐종왕법(反對貪縱枉法)"(.. 2023. 3. 21.
서계(徐階) vs 엄숭(嚴嵩): 관료투쟁에서 어떻게 승리하는가? 글: 자귤(紫橘) 드라마에서 엄숭(嚴嵩)이 수보(首輔)로 있던 시기는 청류(淸流)가 엄숭(嚴嵩)과 투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청류파(淸流派)는 서계(徐階),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을 핵심으로 한다. 그중 고공이 가장 과격했으며, 영원히 엄숭일당과 정면으로 부딛쳤다. 그리고 청류파중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은 차보(次輔)인 서계인데, '과격파' 고공과 비교해보면 서계는 항상 엄숭의 주변에 있었다. 서계는 몸은 내각(엄숭의 영역)에 있으면서, 마음은 청류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엄숭을 타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서계가 수보를 맡고나서도 그는 엄숭에 대하여 완전히 청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엄숭을 예로 대했다. 이는 서계의 원활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 2023. 1. 26.
탕현조(湯顯祖)는 어떻게 이지(李贄)를 숭상했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탕현조는 일찌기 나여방(羅汝芳)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 "비성지서(非聖之書)"를 읽었다. 나중에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선종대사(禪宗大師) 자백(紫柏)과 친구로 사귀면서 특히 급진사상가 이지를 존경하여, 그의 를 읽고 매우 흠모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덕선생(明德, 나여방)과 같은 분으로 당시 내 마음 속에 있던 사람으로 보기에 상인(上人, 자백)의 웅(雄)과 듣기에 이백천(李百泉, 이지)의 걸(傑)이다. 그들의 말을 찾아낸 것은 마치 아름다운 검을 얻은 것과 같았다." 탕현조는 수창(遂昌)의 임지를 떠난 후, 일찌기 임천(臨川)에서 이지와 만난 바 있다. 이지가 옥중에서 자살한 후, 탕현조는 시를 써서 애도한다. 그는 반이학(反理學)의 달관선.. 2023. 1. 16.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의 원흉인 왕진(王振)은 충신인가, 간신인가?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토목보지변"은 명나라 수십년간 축적한 국력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날려버린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문신, 무장,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전쟁은 명나라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후 명나라는 다시 대규모로 병력을 일으켜 몽골을 공격하지 못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명나라가 수십만대군을 일으켜 몽골을 친지 겨우 25년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왕진이었다. 천순(天順)원년, 명영종(明英宗)은 왕진의 관직을 회복시켜주고, 영예롭게 장례를 치러주고(의관총), 왕진을 위해 사당을 지어 기념한다. 지금도 그 사당은 남아 있는데, 바로 베이징의 지화사(智化寺)이다. "왕진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도록 하고, 사당을 세워주었다(賜王振祭葬, 立.. 2023. 1. 9.
계주병변(薊州兵變): 명나라최강의 척가군(戚家軍)은 어떻게 우군에 참살당했는가? 글: 남북양조(南北兩謿) 만력23년(1595년)의 계주병변은 하나의 비극이며 지금도 차마 다 읽을 수가 없다. 이 사변은 사료에 기록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에 몇 마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당시는 아직 삼대정(三大征)중 하나인 항왜원조(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가리킴)시기였으므로, 조선의 사료에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만력이십삼년 십월, 기미(己未)일, 방해병(防海兵, 해안방어병)이 군량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鼓噪). 계진의 독(督), 무(撫), 도신(道臣)이 난리를 일으킨 자를 붙잡아 처형하고, 나머지 일당은 남쪽으로 되돌려 보냈다. 병부에 보고하였고, 병부에서 허가했다." 명신종(만력제)때 병변이 여러번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만력10년의 항주병변(杭州兵變), 1.. 2021. 5. 1.
장거정(張居正)과 이태후(李太后), 풍보(馮保)의 관계는......?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고대인들은 재상의 역할을 8글자로 개괄했다: "좌이론도(坐而論道), 협리음양(協理陰陽)". 앉아서 도리를 얘기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자면 방침과 정책을 제정한다는 것이다; 음양을 협리한다는 것은 거시적으로 각 방면의 관계의 평형을 맞춘다는 것이다. 재상이 만일 지나치게 구체적인 사무에 집중하면 전체국면을 통할하는 능력을 약화된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재상은 사람을 잘 써야 하고, 일을 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인물에게 일처리를 하게 하고, 자신은 일처리 잘하는 사람을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양호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장거정의 용인술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주로 그가 어떻게 개혁의 엘리트집단을 양성하여 강력한 지도계층을 형성했는지 봐야 한다. .. 2020. 11. 16.
명나라는 정말 "시망어가정(始亡於嘉靖)"일까? 글: 기점역사(起點歷史) 가정(嘉靖, 1522-1566)은 명나라의 열한번째 황제인 명세종(明世宗) 주후총(朱厚㷓)의 연호이다. 명나라때 가정이라는 이 연호는 모두 45년간 사용되었다. 명나라에서 두번째로 길게 사용된 연호에 해당한다(가장 길게 사용된 연호는 명신종 만력제의 만력으로 모두 4.. 2019. 12. 28.
명광종(明光宗) 주상락(朱常洛): 명나라의 가장 비극적인 황제, 19년태자 1달황제 글: 동동(東東) 고대 봉건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심지어 황제에 오르기 위해 처를 버리고 아들을 버리며 집안이 풍비박산나기도 했으며, 부자간에 원수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황제에 오르는 길에서 사람들은 계속하여 앞 사람이 쓰러지면 뒷 사람이 뒤를 이어 계속.. 2019. 12. 12.
이자성(李自成)과 청왕조(淸王朝) 누가 누구의 덕을 보았는가? 글: 군무차위면(軍武次位面) 1644년 봄, 이자성은 대순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하여, 명왕조가 멸망한다. 그러나 겨우 1개월여만에, 이자성은 산해관전투에서 청군에 격패당하여 황급히 북경에서 도망치게 된다. 북경성은 다시 청왕조의 천하로 바뀐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 2019.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