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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계초)

고홍명(辜鴻銘)과 양계초(梁啓超)의 비교

by 중은우시 2008. 4. 24.

글: 정만군(程萬軍)

 

청나라말기, 부패하고 썩은 청나라조정은 이미 백족지사(百足之蛇)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각종 신구 "애국지사"가 연이어 등장하여, 각자의 파벌의 정견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신구파로 나뉜 "변사(辯士)"의 무리중에서,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나타난다.

 

하나는 철저한 수구의 "소변남인(小男人)" 고홍명이고, 또 다른 사람은 '소년중국'을 주장한 "영원년소(永遠年少)" 양계초이다.

 

고홍명은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의 완고한 수구파로 이름을 날린 문화괴걸이다. 그는 '노고동(老古董, 골동품)'으로 이름난 '소변남인'이었고, 평생동안 활력이 결핍된 수구적인 억지주장을 아주 잘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외국인이 그에게 물었다: "중국인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여자들에게 전족을 시키고, 전족한 발을 왜 그렇게 많은 문인 선비들이 좋아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홍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서방의 최고예술은 발레이다. 발레는 바로 사람의 생리적인 구조를 바뀌게 하는 것이다. 강제로 발끝으로 정상적인 발바닥을 대신해서 걷게 하는 것이며, 관중들이 발레를 볼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로써 볼 때, 이 '소변남인'의 억지주장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홍명은 남양에서 태어나고, 서양에서 공부하고, 동양에서 결혼하고, 북양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는 남자의 변발과 여자의 전족을 아주 좋아했다. 신해혁명으로 '변발'을 자르게 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완고하게 소변(小)을 길렀고, 장포마괘를 입었으며, 중국여인의 전족을 찬영했다. 그의 부인인 숙고(淑姑)는 전족을 했는데, 첫눈에 반했고, 평생을 함께 했다. 민국이 건립된 후, 그는 북경대학에서 영국문학을 강의한다. 그는 과격한 행동으로 전체 사회가 중화전통을 버리고 기형적으로 나아가는데 항거했다. 변발을 기르고, 옛날옷을 입고, 첩을 들이고, 전족을 좋아하는 등등. 그의 태도는 날로 완고해지고 보수적이 되어갔다. 심지어 그는 변발을 자신의 여권 겸 표지로 삼기도 했으며, 그는 변발과 전족을 극력 옹호하여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홍명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말레이시아어등 9개언어에 정통했고, 13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문신문을 거꾸로 읽어 영국인들을 조소하기도 했고, 미국인들은 문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후, 중화민족의 위기가 사상유례없이 커졌을 때, 지식인들은 속속 서학을 도입하고, 변법을 통하여 생존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신사조에 대하여, 고홍명은 이로 인하여 중국문화가 버려질까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서양학문과 서양정치에 능통했던 그는 그 당시에 적극적으로 사상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유교의 도리를 크게 주장했다.

 

"소변남인"은 '구미의 학설로 중국의 정치제도를 변경하려는 것은 중국을 어지럽히고도 남음이 있고, 중국을 구제하는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고홍명은 당연히 다사다난한 중국을 위하여 청사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방법으로는 중국문명의 도덕역량으로 서방의 총포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지어, 사회와 정치의 죄악을 저지하고, 세계의 유교를 개혁하는 방법은 일종의 자존과 정식, 성실한 생활로 일종의 도덕적 역량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이 유일하게 믿을 수있는 힘이며, 오래된 문명으로 현재유럽민족의 물질실리주의의 파괴력에서 구원해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고대의 문명에 있다는 것이었다.

 

고홍명의 가장 고질적인 수구는 그가 황제제도를 옹호하고, 수렴청정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서태후를 옹호하면서, 서방세계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찬양했다는 것이다. 무창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천하의 대세를 거슬려, 혁명에 반대하고 열강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동시켜 혁명군을 진압하라고 하였다.

 

말기에 고홍명은 장훈의 복벽에 참가하고, 이미 활기를 잃은 수구적인 남자들의 마지막 짓거리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고홍명의 정치적 견해는 양계초의 조소를 받았다. 양계초를 대표로 하는 신파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강대하게 하려고 할 뿐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강대하게 하려고 하였다. 중국의 전제정치체제를 군주입헌정체로 바꾸고자 하였으며, 만일 중국이 일본과 같은 정치체제, 총포와 과학을 갖추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홍명의 수구와 반대로, 양계초는 "선변(善變, 변화를 잘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문장인 <<선변과 호걸>>에서 보면 그중 몇몇 구절은 어떻게 선변하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월식처럼 사람들이 다 본다. 그리고 그 바뀜은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 대장부의 일처리는 광명정대해야 하고, 나의 마음이 뜻하는 바를 행하여야 한다. 반드시 끝까지 추구하여야 할 뿐이다. 만약 그 방법이 수시로 상황에 따라 변한다면, 그리고 나의 두뇌의 발달에 따라 변한다면, 백번을 변해도 그 종(宗)은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양계초는 선변의 요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때와 경우에 따라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옛날의 불합리한 것은 파괴할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있어야 하고, 심지어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선전포고를 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계속되는 변화는 반드시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어야 하고, 자기가 견지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무대에서 활약했고, 먼저 유신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보황으로 간다. 나중에는 청왕조의 복벽을 반대한다. 자기의 스승인 강유위와 공개적인 논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나는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는 용기이다. 보황에서 복벽반대까지는 바로 하나의 대립면이다.

 

그가 변화중에 지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국이다. 바로 애국때문에 중국의 쌓인 가난과 쌓인 약함을 바꿀 수 있다면, 그는 분연히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애국때문에 그는 '나는 내 창으로 나를 찌른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계속하여 자신을 부정할 수 있었고, 자신의 스승을 부정하 수 있었다. 그에게는 사심이 없었다. 양계초는 선변하는 중에 애국심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구질서를 파괴하려는 용기, 계속하여 변화하고 나아가려는 진취성, 그리고 자기의 애국사상을 견지하려는 것 이것은 바로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정신이다.

 

우환에서 마음을 기르고, 선변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데서 애국을 하는 것이양계초가 도달한 학문의 경지이다. 대다수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소변남인' 고홍명과, 선변구신(善變求新)의 양계초, 도대체 누가 더 애국을 했고, 누가 더 나라에 이롭게 했는가? 역사는 이미 분명한 답안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