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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중국 대학의 백년역사 : 중국최초의 대학은 어디인가?

by 중은우시 2006. 2. 7.

중국최초의 대학이 어디인지에 대하여 오랫동안 여러 견해가 존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전신이 악록서원(岳麓書院)이며, 천년의 역사를 지닌 호남대학(湖南大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청나라 때 성선회(盛宣懷)가 1895년에 만든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과 1896년에 만든 남양공학(南陽公學)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전신이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인 북경대학(北京大學)이라고도 한다.

 

사실 오랫동안 정치의 영향등 각종 이유로 말미암아, 역사의 진상이 숨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호남대학의 전신인 악록서원은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대학의 어떠한 특징도 찾아볼 수가 없다. 경사대학당은 북양대학당과 남양공학보다 늦게 만들어졌으므로 중국의 첫번째 대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해방후 정치적인 영향을 받아 정부측에서 잘못 선전한 것일 뿐이었다. 역사에 대하여 갈수록 공정하게 연구된 이후에는 북경대학은 더 이상 감히 스스로가 첫번째 대학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진정한 첫번째 대학으니 북양대학당이 아니라, 1860년대에 설립된 외국교회대학인 상해성요한대학(上海聖約瀚大學)이다. 성요한대학은 완전히 서구의 대학방식으로 설립된 대학이고, 이 실력있는 대학은 해방후에 강제로 해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진실을 따를 수밖에 없다.

 

만일 중국사람들이 최초로 설립한 대학을 찾는다면, 북양대학당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후에 남양공학(1896년)과 경사대학당(1898년)이다. 무한대학의 전신(1893년)과 절강대학의 전신(1897년)은 중국전통의 서원이었으므로 대학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1895년전까지는 성요한대학이 중국에서는 유일한 대학이었고, 당연히 가장 좋은 대학이었다. 19세기전후에 북양, 남양은 암흑중인 중국의 과학과 진보에 밝은 등을 비추었다. 북양대학당은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천진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고, 팔국연합군이 침입하여 발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양공학은 문인이 많은 상해조계지역에 세워졌으므로 계속하여 공업구국에 주력하고 더 잘 발전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1920년대에는 중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경사대학당은 광서황제의 변법자강운동의 산물이었고, 청나라의 최고학부였다. 그러나 봉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입학하는 대부분이 귀족자제였고, 채원배가 교장이 되어서 비로소 교풍이 일신되었으며 사방에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5.4운동이후에는 더욱 이름을 떨쳐,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당연히 5.4운동이 북경대학만의 공로는 아니었다. 북경사범대학등 북경의 다른 학교와 상해, 남경등지의 대학들도 공헌하였다.그러나, 역사는 왕왕 가장 뛰어난 자만을 기억하는 법이다. 5.4운동은 북경대학을 중국의 당시 가장 유명한 대학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인문학계통은 아무도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북경대학의 이공과는 아직 별로였다. 이공과는 역시 남양, 북양이 강하였다. 남양대학은 1921년 교통대학으로 개칭하며 당시 최고의 이공대학이 되었다. 북양대학은 나중에 천진대학으로 되며, 이공과는 매우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남양대학이나 북양대학은 모두 이, 공, 관리등의 학과는 있으나 문과는 없으므로 종합대학은 아니었다.

 

1920년대중반에, 북벌이 성공하고, 국민당이 남경에 수도를 정하자, 국내정세는 안정을 되찾았다. 중국의 대학도 새로운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국민당은 사방에서 인재를 끌어모아 중앙대학을 만들었으며 이것을 국민당정부의 최고학부로 만들 생각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 학과를 완전히 갖춘 중앙대학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앙대학은 정치적인 연계가 너무나 밀접하여 자주 정치운동의 소용돌이에 끼어들었고, 교수들의 이동이 잦았다. 이로 인하여 학술과 교육의 수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학생들도 어떤 이들은 우수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고관귀족의 자제들로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청화대학도 1920년대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청화대학의 전신은 유미예비학교(留美豫備學校)였으므로 시작이 좋았고, 널리 좋은 스승들을 모셨으며 짧은 기간내에 중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하나가 되었다. 문, 이, 공과 모두 강한 실력을 갖추었다. 북경대학은 북평대학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나, 채원배가 떠나가고 중국의 중심이 남쪽으로 옮기면서 약간 쇠락하였다. 장백금과 범엄손은 천진에 사립인 남개대학(南開大學)을 열었고, 발전이 매우 빨랐다. 동제대학은 이, 공, 의과대학이 이름을 날렸고, 이외에 전국에서 유명한 대학은 동오대학, 중산대학, 무한대학, 산동대학, 하문대학, 절강대학, 성요한대학, 연경대학등이었다.

 

전체적으로 20년대를 보면, 20년대 중반에서부터 항일전쟁전까지, 중국의 가장 좋은 대학은 중앙대학, 교통대학, 청화대학과 북평대학이었으며,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당시 북고남명(北高南名), 북청화남교대(北淸華, 南交大)라는 말이 있었따. 중앙대학은 국민당 정부의 최고학부로 학과가 많고, 이름난 스승이 많았다. 결점은 기초가 전혀 없는데서 시작하여, 스승이 골고루 갖춰져 있지 못하였고, 독특한 학풍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교통대학은 상해, 당산, 북경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가 컸고 공업입국을 지향하였다. 기초가 좋고 근본이 두터웠으며 이공과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결점은 교통부에 예속되어 이공과만 있고, 문, 의과가 없어, 10년동안 중앙대학 청화대학처럼 발전이 빠르지 못하였다. 청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문, 이과의 수준이 전국최고였고, 좋은 스승이 많았다. 북평대학은 문, 이과가 여전이 괜찮았다. 공과는 비교적 약했다. 5.4운동때의 명성에 비하여는 떨어졌지만 여전히 일류에 속했다. 이 4강을 제외하고는 북양, 동오, 동제, 절강대학, 남개, 산동대학, 복단대학등이 있다.

 

항일전쟁이 일어난 후, 각 대학은 내륙으로 옮겼다. 청화, 북평, 남개는 곤명으로 옮겨가 서남연합대학을 만들고, 중앙대학과 교통대학은 중경으로 옮겨가고, 절강대학은 귀주로 옮겨갔다. 사넘연합대학은 세 학교의 힘을 모아 당시의 최고대학이었다. 스승이 많고, 학생도 뛰어났다. 당시 세계의 명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개의 대학이 연합하여, 각자 따로 운영하다보니 하나의 학교로 뭉칠 수는 없었다. 중앙대학과 교통대학은 중경으로 옮겨갔으나, 남경과 상해에도 여전히 일제가 유지하는 중앙대학과 교통대학이 있었다. 교통대학의 당산, 북평분교는 모우승의 지휘하에 귀주로 옮겨갔다. 내륙이전은 교통대학과 중앙대학의 실력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서남연합대학에 비견할 수가 없었다. 절강대학은 그러나 하나의 신화를 이루었다. 축가정의 지휘하에 전화중에서 크게 성장하였고, 최고대학의 하나로 일거에 성장하였다. 이약슬이 귀주에 간 후에 이 가난한 지방에 이렇게 좋은 대학이 있다는 것에 크게 놀라서 이를 동방의 켐브리지라고 불렀다. 비록 이 외국인의 말이 약간 과장되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절강대학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때가 절강대학이 가장 자랑으로 삼는 시기였다. 북양대학은 서안으로 옮겨갔고, 다른 학교들과 합하여 서북연합대학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북양대학은 쇠락하고, 항전승리후에야 겨우 소멸의 운명을 벗어난다. 그후 남개대학의 토지위에 다시 북양대학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해방후에는 현재와 같이 천진대학으로 개칭한다. 항일전쟁기간동안에는 서남연합대학이 독보적이고, 중앙대학, 교통대학, 절강대학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항전승리후, 각 학교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새로이 발전을 시작한다. 청화대학은 서남연합대학시절 다시 교수들을 모아서 분교한 후에 더욱 강성해진다. 중앙대학과 교통대학도 원래의 면모를 되찾아간다. 절강대학도 좋은 발전추세를 이어간다. 북평대학은 그러나 정체되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연경대학보다 뒤쳐진다. 남대는 사립에서 국립으로 바뀌며 빨리 발전하고, 서남연합대학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유명해진다. 항전때부터 해방전까지 가장 좋은 대학은 청화대학, 중앙대학, 교통대학, 절강대학이다. 그 다음은 북평대학, 동제대학, 남개대학, 동오대학, 무한대학, 연경대학등이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간 후에 주로 청화, 교통대학, 중앙대학, 북평대학의 네개 대학의 교수를 데리고 갔고, 나중의 대만청화대학(원래의 청화대학 교장인 매이기), 교통대학(원래의 교통대학 교장안 능홍훈), 대만대학(원래의 북평대학 교장인 부사년), 중앙대학을 만든다. 

 

해방후, 공산당은 구국립대학들을 접수하기 시작했고, 1952년부터 대학조정작업을 시작한다. 소련단과대학모델을 따라 북평대학 즉 나중의 북경대학을 제외하고는 중화민국시대의 몇몇 명문대학들을 잘라서 분산시킨다. 남경은 중앙대학과 금릉대학을 비롯하여 자르고 모아서 몇개의 대학을 만들어 모양을 완전히 바꾸는데, 남경대학과 동남대학이 주요한 대학이다. 교통대학 이과와 관리과는 잘려서 복단대학등으로 보내고, 순수한 공과대학이 된다. 그리고 당산, 북방의 두개의 교통대학은 독립한다. 절강대학은 이, 공, 농과를 몇개로 나누어 이과는 주로 복단에 편입시킨다. 청화대학도 순수한 공과대학으로 만든다. 북경대학과 복단대학은 대학조정의 최대수혜자이다. 특히, 복단대학은 일거에 전국 최고수준의 대학으로 올라섰다. 청화대학, 교통대학은 또한 동북지방에 소련방식을 본따서 하얼빈공과대학과 하얼빈군공대학을 만든다. 52년의 대학조정은 중앙대학, 절강대학 및 교통대학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청화대학의 문리과는 북경대학으로 편입되었으나, 수도에 남아서 공과는 완전하게 남겼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남개대학과 천진대학은 문리, 공과로 조합되었다. 대학조정후 전국의 가장좋은 대학은 북경대학, 청화대학, 복단대학, 교통대학,하얼빈공과대학이 되었다. 56년에 교통대학은 서북을 지원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이전하기로 하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쳐 서안, 상해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나중에는 각각 상해, 서안의 교통대학으로 분리되고, 북경대학, 청화대학, 복단대학과 대항할 힘을 잃어버린다. 50년대말에 원자폭탄,수소폭탄을 만들기 위하여 엘리트들을 뽑아서 만든 중국과기대학은 그 실력이 심지어 청화대학을 초과하게 된다. 60년대의 하얼빈공과대학은 중소관계의 악화로 인하여 교수들을 많이 다른데 빼앗겨 실력이 많이 줄어버린다. 이로 인하여 60년대문화대혁면전까지 중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은 북경대학, 청화대학, 복단대학, 중국과기대학의 4곳이었다. 이들의 실력이 최강이고 명성이 가장 높았다.

 

등소평의 재등장후의 개혁개방은 대학들의 봄날이었다. 남경대학의 한 교수가 쓴 문장에서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데 대한 대토론이 있으면서 중앙대학의 후신인 남경대학이 알려지고, 중국과기대학은 문화대혁명기간중에 남쪽으로 옮겨 합비로 옮겨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다만, 80년대에 소년반을 뽑음으로써 다시 전국에 명성을 떨친다. 상해교통대학, 서안교통대학은 그의 비참한 운명이 중앙정부의 동정을 받아, 7차5개년, 8차5개년기간동안 북대, 청화, 복단과 함께 국가중점건설의 5개 대학중의 하나로 된다. 중앙대학의 후신인 남경대학 및 절강대학(일찌기 중국과학원에 소속됨)은 역사에서 잊혀졌지만 계속 힘을 길러 90년대에 다시 일어선다. 80년대에 가장 좋은 대학은 여전히 북경대학, 청화대학, 복단대학, 중국과기대의 4곳이고, 기타의 남개대학, 상해교통대학, 서안교통대학, 동제대학, 인민대학, 남경대학은 차이가 많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경대학과 절강대학의 성장은 대학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특히 남경대학의 SCI논문은 북경대학, 청화대학을 초과하여 연속 6년간 전국대학의 최고수준을 자랑했다. 복단대학과 과기대학은 쇠퇴가 시작되었다. 서안교통대학은 위치가 좋지 않았고, 상해교통대학은 위치가 너무 좋아서 발전이 더디었다. 북경대학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계속하여 누리지는 못하였다. 청화대학은 성실하게 발전해나갔다. 이외에 화중이공대학, 동남대학, 천진대학, 하얼빈공과대학등의 대학도 발전이 빨랐다. 남개대학, 동제대학, 무한대학, 중산대학, 길림대학등의 전통있는 명문대학들은 점점 광채를 잃어갔다. 청화대학, 북경대학, 복단대학, 남경대학, 상해교통대학, 절강대학, 서안교통대학의 7개 대학은 교육위원회소속대학중 먼저 211프로젝트에 포함되었고, 중국과학원소속의 중국과기대학이 나중에 포함되어 모두 8개 학교가 211프로젝트의 중점대학이 되었다. 211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학교간의 경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로 나눠먹기식으로 되어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각 대학들은 합병을 통하여 거대한 대학으로 변모했다. 절강대학은 이미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학과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되었고, 남개,천진대가 합병할 예정이며, 무한대학과 화중이공대학의 합병도 이미 진행중이다. 북경대학은 북경의과대학과 북경항공항천대학을 합병할 것이고, 청화대학은 미술학원과 협화의과대학을, 복단대학은 상해제2의과대학과 재정대학과 제2외국어대학을, 상해교통대학은 상해의과대학과 상해농업대학을 합병할 예정이다. 이런 어지러운 합병의 바람속에서 누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