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천안문광장에서 개국기념식을 개최하는 날이었다.
이날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중국인민이 떨치고 일어섰다"고 외친 역사적인 날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이날 장개석이 공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인민해방군공군의 17대의 비행기는 남원공항에서 실탄을 장전한 상태에서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고, 대공포를 준비해두고 있었으며, 사열식에 참석한 병사들에게는 공습이 있더라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도록 섭영진 원수의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개국기념식의 시작일시는 비밀에 부쳤다가 오후 3시에 거행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장개석의 국민당 공군으로부터의 공습을 대비한 것이었다.
장개석은 관저에서 공군사령관인 주지유(周至柔)로부터 "공군의 비행기 100대가 이미 준비완료되었고, 둘로 나누어서 공습을 실시하겠습니다"라는 여러번의 전화재촉을 받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명을 내린다. "교장님(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지내, 국민당 장성들 중에는 장개석을 교장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비행기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장개석은 "임무취소한다"고 명을 내린다. 주지유는 "교장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고, 임무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라며 재고를 요청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임무취소"라고 잘라서 말하고는 전화를 내려놓았다.
장개석의 이 판단은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안문의 개국기념행사를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전국인민의 반감과 분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안문광장은 고궁과 연결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고궁도 파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만일 북경의 고건축물들이 파괴된다면, 문화재를 파괴한 죄명까지 덮어쓸 수밖에 없었다. 아방궁을 불지른 항우나 원명원을 불지른 영불연합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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