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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중국인민해방군의 6.25참전 8대 혈전

by 중은우시 2005. 11. 16.

[이 글은 중국에서 6.25때 지원군이 참전하여 벌인 8개의 혈전을 소개한 것입니다]

 

첫째, 비호산(飛虎山)혈전

 

제2차전투시, 팽덕회(彭德懷)의 "적을 유인하여 깊이 끌어들이는" 계획에 근거하여, 유엔군이 북진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중국군대의 이동에 영향을 주거나, 중국군대의 배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팽덕회는 112사단의 335단을 비호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유엔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11월 4일 335단은 혈전을 벌여 비호산을 점령하였고, 11월 18일에는 저지임무를 완성하고 안전하게 후퇴하였다. 오일 밤낮의 혈전을 통하여, 방어부대는 한국의 제7사단과 미군일부로부터 입체적인 공격을 견뎌내었다. 가장 격렬했던 8일에는 방공능력이 전혀없는 지원군은 80여대의 미군기 및 대포의 융단폭격을 견뎌내었고, 거의 모든 진지에서 육박전이 벌어졌다. 비호산 주진지를 방어하던 335단 2영은 10명중 6,7명이 죽었고, 그 중 5연대 3대대는 단지 3명만이 남았다. 이번 혈전에서 적군 18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고, 비호산의 앞에는 미군과 한국군의 시체 400여구가 있었다. 335단 및 단장 범천은(范天恩)은 이로서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둘째, 장진호(長津湖)혈전

 

제2차전투시, 미군을 위주로 한 유엔군의 북진은 11월말에 장진호 일대에까지 이르렀다. 지원군 제9병단은 영하 30여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매복을 설치했다. 11월 27일 9병단은 전면공격에 나섰고, 포위된 미군 육전1사단은 약 4개 단의 1만여명이 있었고, 예상보다 1배가량 많았다. 28일이 되어서 지원군이 신흥리의 적을 포위하였고, 미군은 용맹하게 반격하였다. 그 중 80사단의 사상 및 동상기아로 인한 인원손실이 막대하였다. 매 단에는 간지 수백명이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81사가 신흥리전투에 참가하였고, 포위망이 점점 좁아질수록, 미군은 포위를 뚫기 위하여 더욱 미친듯이 싸웠다. 그날 저녁에 기온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고, 미군은 전력을 다하여 241단의 진지쪽으로 독력해왔다. 그 중 241단 3영 8연은 전투중에 마지막 1명만이 남았을 정도이다. 미군은 요행히 포위를 뚫었고, 지원군은 단지 길을 나누어 추격할 수 밖에 없었다. 남으로 도망치는 미군은 1221고지에서 저지를 받고 분산하여 도망쳤다. 12월 2일에는 단지 200여명의 미군이 유담리로 도망쳐들어갔다. 이때에는 미군 31단, 32단 1영 및 제57포병영은 27군에 의하여 기본적으로 전멸하였다. 미31단은 1918-1920년 소련에 대한 전투에 참전하여 '북극곰단"이라는 명칭을 얻었고, 2차대전에는 알류산열도, 마샬군도, 오키나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던 부대로, 미군 육군의 자랑이었는데, 이번 전투에서 단장이 사망하고, 깃발을 빼앗기고, 최종적으로는 전군이 전멸하였다. 27군 80사와 81사도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상 및 비전투인원손실이 1만여명에 달하였고, 전군에서 동상에 걸린 사람이 22%에 달하였다. 동시에 유담리에 대한 공격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20군 59사와 27군 79사는 모두 주력부대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엄동설한은 지원군의 상당한 인원손실을 감내해야했고, 전투는 북산, 1282고지, 1382고지등에서 계속 전개되었다. 하룻밤의 격전이 끝난 후, 육전7단과 5단은 거대한 압력을 느끼고 30일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이렇게 육전 1사단은 125킬로미터에 이르는 철수전투를 전개했다. 하갈리는 미군 전군의 퇴로였다. 지원군 58사는 명을 받아 여기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0일 밤이 되어서는 전사단이 12개 연도 남지 않았고, 단지 1500명이 남았다. 단지 소량의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지원군은 미군의 밀집한 화력을 무릅쓰고 전진하였고, 적군의 방어진지를 뚫었다. 그러나 돌격과정에서 사상이 너무 많아 뒤를 받쳐주지 못하였다. 미군의 반격에 진지를 돌파했던 전사들은 모두 사망하였다. 지원군은 전투정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미군은 여기에 감탄했다. 미군은 하갈리의 방어를 강화한 후에, 덕동산입구가 다시 양군이 쟁취하고자 하는 초점이 되었다. 12월 3일 유담리의 육전 5단과 7단의 주력부대는 계속하여 덕동산 입구에 모였다. 탱크가 길을 열고, 비행기가 엄호하면서 전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미군은 후퇴하면서 계속하여 지원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의 우세한 장비는 효과를 발휘하였고, 저지당하지는 않았다. 육전일사가 진흥리까지 후퇴한 것은 그들이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9병단은 여기에서 육전1사를 그냥 놔두지는 않았다. 일체의 대가에도 불구하고 역랑을 모아 추격섬멸전을 펼쳤다. 그러나 11일 육전1사는 배에 올라 안전하게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지원군은 3개군 12개 사단 총병력 약 15만명을 투입하였다. 동상은 3만여명에 달하였고, 동사자는 4천여명에 달하였고, 전투중 사망자는 1.5만명에 달하였다. 미군사상은 7천여명이고, 그 중 사망하거나 실종한 사람이 2,500명이며, 동상으로 인한 전투력손실은 7300여명이었다.

 

셋째, 삼소리(三所里)혈전

 

제2차전투중, 미군은 지원군의 공격을 받아 신속히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삼소리와 용원리는 미군 주력부대의 유일한 퇴로였다. 38군 113사는 14시간을 강행군하여 72.5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삼소리에 이르렀다. 동시에 사단장인 강조(江潮)는 337단에 명을 내려 용원리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미제9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미군은 퇴로를 열기 위하여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하여 미친듯이 공세를 취하였따. 송골봉을 사수하던 335단 1영 3련은 마지막에 겨우 5명만이 생환하였다. 미군은 삼소리에서 연속하여 10여차례 공격하였으나 모두 퇴각당하자, 미군제9군은 삼소리, 용원리를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대량의 장비를 포기하고 안주쪽으로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후에 안주, 숙주를 거쳐 평양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 38군의 주력군은 강한 군대의 풍모를 보였고, 전투후에 팽덕회는 특별히 38군에게 "만세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넷째, 횡성(橫城)혈전

 

제4차전투중, 유엔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팽덕회 총사령관은 횡성일대에서 적군을 타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써 횡성반격전이 1951년 2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지원군은 4개군과 인민군 2개군단을 결집하여 한국 제5사단과 제8사단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지원군 39군 117사 350단의 단장은 적의 후방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12일 미군이 후퇴하여온 2사단의 일부와 한국 제8사단의 2개영은 다른 포위망으로 들어왔다. 2월 13일에 횡성전투는 종결되었든데, 한국 제8사단의 3개단, 한국 제3사단과 제5사단의 각 일부, 미2사단의 1개영, 미군 한국군 4개 포병영은 전멸하였으며, 전부 12,000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는 이기미(李奇微)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었다.

 

다섯째, 지평리(砥平里)혈전

 

제4차전투중, 전선이 붕괴되지 아니하도록, 이기미는 제10군에게 지평리를 사수하도록 명하였다. 지평리를 방어하는 것은 미2사단 제23단(프랑스의 영을 포함한 4개 보병영, 1개 포병영, 1개 탱크중대등 총 6000명)이고, 제38단은 예비대였다. 제9군, 영국 제29여단, 한국 제6사단은 지평리와 문막리의 사이를 이동하고 있었다. 지원군은 공격부대를 투입하여 39, 40, 제12군에서 온 3개군 8개단, 40군 199사가 통일적으로 지휘하여, 2월 13일 밤에 지평리에서 지원군은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후 며칠동안 중국군은 계속하여 공격을 진행하였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따.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은 동료병사의 시체를 밟고 다시 공격해오는 중공군에 매우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일본군보다 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부대를 본 것이다. 미군이 대량의 항공병, 포병을 동원하여 계속하여 지원군의 공격방향으로 포격을 가하였고, 매 평방미처마다 수십개의 폭탄이 떨어졌고, 지평리가 피로 물들었고, 1백여명의 연대는 몇분후이면 겨우 7,8명이 남곤 하였다. 전투가 최후에 이를 때면 왕왕 변격하는 적군과 함께 죽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원군의 사망자는 5000명이상이었고, 40군 3개단에서만 사상자가 1,830명에 달하였으며, 359단 3영은 겨우 몇 사람만이 살아돌아왔다.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고, 적과의 장비차이가 현격하였으므로 포병, 항공병없이 간단한 장비만 가진 지원군은 최종적으로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용감했던 지원군은 적군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용기있는 부대를 만났다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여섯째, 철원(鐵原)혈전

 

제3차전투의 제2단계중, 미군제1군을 위시한 수만명의 적군이 돌연 철원, 연천을 핍박해왔다. 지원군의 후방기지는 중대한 위협을 받았으며, 주력부대가 포위되는 형국이었다. 팽덕회는 전통을 날려 63군으로 하여금 철원을 사수하도록 하였따. 5월 30일 부대는 비를 무릅쓰고 진지로 들어가서, 보수공사를 하였다. 미군은 철원을 돌파하기 위하여 매일 대량의 공군과 탱크기갑병, 포경으로 지원군진지를 공격하였다. 철원남쪽의 무성한 삼림은 전부 불에타서 대머리가 되었고, 땅에는 응고된 기름과 탄약으로 새카맣게 되었다. 많은 진지에서는 최후의 한 두사람이 남았을 때까지 적군과 같이 죽었고, 일선부대에서는 모두 칼을 들고 끝까지 싸웠다. 6월 12일 63군은 저지임무를 완성하고 전투에서 후퇴하였다. 전군은 단지 1500여명만이 팽덕회사령관의 사열을 받았고, 다시 2만여명의 신병을 보충받았다.

 

일곱째, 한강(漢江)혈전

 

제4차전투에서, 동부전선의 전투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38군은 명을 받아 한강 남쪽을 사수하였다. 1월 25일부터 미군 24사단, 기병 1사단, 영국 27여단등 몇배의 적군의 공격을 받았다. 적군은 포병, 탱크와 공군의 엄호하에 7개로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10여일을 밤낮으로 싸웠으며 38군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350.3고지를 지키는 342단은 전투후에 단지 수십명이 살아돌아왔다. 이어서 580고지를 지키는 3개 영과 군경위연등은 합하여 단지 수십명만이 살아남았다. 희생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이 10명중 7,8명이상이었다. 2월 16일 38군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저지임무를 완성하였다. 적군의 전선에서의 공세는 약해졌으며 이로써 5차전투가 완료되었다.

 

여덟째, 상감령(上甘嶺)혈전

 

미군과 한국군을 위주로 한 유엔군은 조선의 중부전선의 문호를 빼았기 위하여 1952년 10월 14일, 수비하는 지원군 15군45사에 대하여 상감령전투를 시작하였따. 20일까지 단 일주일만에 45사의 사상은 50%이상에 달하였다. 21개 보병연은 하나도 완전하게 남은 곳이 없었다. 유엔군의 17개영은 사상자가 7000명이상이고, 11월 15일 유엔군은 더 이상 전투할 힘이 없었고, 상감령전투는 끝이 났다. 지원군의 사상자는 2만여명에 이르렀고, 유엔군의 사상은 1만여명이상이었다. 3.8평방미터의 토지는 완전히 평지로 바뀌었으며, 선혈이 낭자하였따. 미군은 190만발의 포탄을 날렸으며, 5000여발의 유도탄을 날렸다. 지원군은 40여만발의 포탄을 발사하였다. 지원군은 구소운(邱小雲), 손점원(孫占元), 황계광(黃繼光)등의 전투영웅을 배출했다. 격렬한 전투중에서 적군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많았고, 나중에 12군이 상감령전투에 참가하여 방어전에서 취후의 승리를 얻어냈다. 2등부대인 45사는 기본적으로 전멸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원군 1등주력부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후에 특별히 선발하여 중국의 제1낙하부대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