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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부동산

중국 부동산업계 거물의 야사 (1)

by 중은우시 2005. 9. 12.

<<세계상업평론>>이라는 잡지에 소개된 중국부동산업계거물의 야사(中國地産大腕野史)라는 글에 나타난 중국의 부동산업계 거물들의 야사입니다.

 

1.  이름 : 량시썬(양희삼, 梁希森) : 일찌기 걸인생활을 한 적이 있음

    직위 : 산동희삼집단(山東希森集團) 동사장

    별명 : 채원자(菜園子) : 나물밭을 가꾸는 사람

    이전기록 : 노가다십장출신, 1999년 북경매괴원 인수로 부동산업계의 총아가 됨.

    신문보도 : 량시썬은 어린 시절 걸인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하고, 어릴 때 철공(鐵工)을 한 적이 있으며, 밀가루공장, 인테리어업체에서 근로자로 일한 바 있음. 1992년 희삼집단을 만들고, 1999년 최대채권자의 신분으로 3.98억인민폐로 북경 최대의 별장프로젝트인 매괴원을 인수하였다. 당시 매괴원은 텅즈런(등지인, 鄧智仁)의 이달행(利達行)이 개발하였으나, 당시 자금곤란상태에 있었는데, 량시썬이 넘겨받은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량시썬은 글을 모르며, 자신의 노력으로 수억원의 재산을 모으고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소문 : 첫째, 량시썬은 어릴 때 초등학교를 1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고 하며, 배부르게 먹어본 적도 없고, 제대로 옷을 걸쳐보지도 못하였으며, 사방을 떠돌며 살 길을 찾아헤멨다고 한다. 호텔에 투숙하기 위하여 등록카드를 작성하는데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일이 끝난 후에 서명할 때도 자기의 이름을 쓸 줄 모른다고 한다. 둘째, 그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는데, 집을 지어서 모든 고향사람들이 함께 달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 집들은 다 허물고, 부지를 아껴서, 양식업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농민들을 노동자로 바꾸어, 모두 양식공장에 출근하도록 함으로써, 농민의 생활을 고쳐보고자 하려는 것이다.

    출신영향 : 어릴 때 걸인생활을 해본 경험으로 인하여 그는 고향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평가 : 그의 유토피아의 꿈의 결과는 어떠하든지간에, 그가 여러 사람을 위하여 한 노력은 존경받을 만하다.

 

2. 이름 : 왕스(왕석, 王石) : 옥수수판매상

   직위 : 만과(萬科) 동사장

   별명 : 입지태세(立地太歲)

   이전기록 : 군인출신, 1984년 퇴직후 기업운영, 1988년 기업을 완커(만과, 萬科)로 개칭

   신문보도 : 원적은 안휘성이다. 1951년 광서성 유주(柳州)에서 태어났다. 신강(新疆)에서 5년간 운전병으로 근무했다. 전업후 난주(蘭州)에서 1년간 노동을 했다. 그의 부친이 유주철도국에서 간부로 근무하였으므로, 왕스는 난주철도학원에 입학하여 공농병대학생이 되었고, 배수(排水)를 전공하였다. 졸업후 광동성 경제무역위원회에서 경제정보연구업무를 하였고, 1984년경에 퇴직하고 창업하여, 심천과교의기전소중심을 만들었고, 1988년 만과기업고빈유한공사로 개칭하였다.

   소문 : 첫째, 왕스는 1980년대초에 심천에서 사업을 발전시켰는데, 놀라운 점은, 왕석의 첫번째 사업은 사료중개상으로, 옥수수를 전매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그는 300만위안을 벌었다. 둘째, 왕스는 옥수수전매로 번 돈으로 심천현대과교의기전소중심을 열어서, 일본에서 수입하는 전자제품, 측량기기를 경영하고, 동시에 의류공장, 손목시계공장, 음료공장, 인쇄공장, 장신구공장등등을 세웠다. 왕스의 말에 의하면 "황색, 도박, 마약을 제외하고, 군수품을 취급하지 않는 외에는 기본적으로 만과는 모두 취급했다"

   출신영향 : 군인출신으로 과단성이 있다. 80년대초에 용감하게 퇴직하고 기업을 설립한 것이라든지, 만과를 운영하면서도 여러차례 결단을 과감하게 하는 기백을 보여주었다.

   평가 : 대기업가이면서, 희극과도 같은 인생을 보냈다.

 

3. 이름 : 멍샤오쑤(맹효소, 孟曉蘇) : 중남해(中南海) 관리

   직위 : 중방(中房)집단 동사장

   별명 : 쌍창장(雙槍將) : 창은 우리나라의 총을 의미함.

   이전기록 : 관리출신, 들리는 바로는 완리(萬里) 위원장의 비서를 지냈다고 한다. 1991년 중국방지산개발총공사에 들어가 총경리를 맡았다.

   신문보도 : 멍샤오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는 해(1949년)에 태어났다. 조상의 원적은 산동성이나,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났고, 북경에서 성장했다.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북경지프자동차공장에서 보통 노동자가 되었다. 1977년 대학입학시험에 참가하여, 북경대학 중문과에 합격했다. 이후의 업무을 하면서 그는 북경대학 경제학원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리이닝(歷以寧), 샤오주어지(蕭灼基)교수등으로부터 사사받았고, 경제학석사와 박사학위도 취득하였다. 1982년 대학졸업후에 중앙선전부의 신문국에서 업무를 시작하였고, 1983년 국무원에서 업무를 하였다. 1988년부터 전국인민대표대회판공청 부국장, 국가진출국상품검역국 부국장등의 직무를 맡았다. 1991년 중국방지산개발총공사로 옮겨 총경리를 맡았으며, 이 때부터 부동산개발의 업무생애가 시작되었다.

   소문 : 맹샤오쑤는 대부분의 글을 새벽 2시이후부터 쓰기 시작하며, 수십년을 하루같다고 한다.  그는 중방집단에서 글을 쓰는 습관은 중남해에서의 업무경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모든 문건은 스스로의 손으로 쓰고 비서에게 맡기지 않는다. 10여년동안, 그는 10권의 부동산업저작을 쓰거나 편집하였고, 18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출신영향 : 관료로 여러 해동안 지냈으므로, 기업가로서 생활하는데 영향을 받았다. 

   평가 : 관료로서, 기업가로서 모두 성공하였으니 더 할 말이 없다.

 

4. 이름 : 리창산(이장산, 李長山) : 철장포(鐵匠鋪) 학도(學徒)

   직위 : 태합환구(太合環球)방지산개발공사 동사장

   별명 : 박천조(撲天雕) : 하늘을 두드리는 독수리.

   이전기록 : 관리출신, 인생경력이 매우 다양하다.

   신문보도 : 리창산은 1951년 하북성 옥전에서 태어났다. 시골에 내려가 농사도 지어보고, 철장포에서 배우기도 하였으며, 군인도 해봤으며, 신문기자도 해보고, 정부관리도 해봤다. 일찌기 진황도시성건국 판공실주임, 진황도시경제기술개발구외자기업관리국국장, 진황도시개발구진출구공사 총경리, 진황도시개발구과기개발총공사 동사장등 일련의 관직을 지냈다. 1992년 사직하고 사업에 뛰어들어, 부동산업에 발을 담궜다. 1997년 태합집단에 들어갔으며, 북경구육경전(歐陸經典), 시대장원(時代莊園), 태합가원(太合嘉園), 태합국제우의촌(太合國際友誼村)등 여러개의 대형 프로젝트의 개발과 경영을 맡았다.

   소문 : 첫째, 리창산은 18세가 되기전에 이미 농촌으로 간 지식청년으로서, 농민의 고통을 모두 맛보았다. 당시 철공소의 급여가 괜찮았으므로 철공이 되고자 한 적이 있다. 둘째, 1969년, 그는 당산의 <<노동일보>>가 거행한 "향토기자학습반"에서 배웠으며, 기회가 오자 이를 놓치지 않았으며, 그가 참가하여 쓴 문장이 <<광명일보>>에 전문이 게재되어 당산지역에서 유명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출신영향 : 관료로서 여러해동안 단련하여, 부동산업계에 들어와서 물만난 고기와 같았다.

   평가 : 인생에는 여러 기회가 있다. 가장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봐야 한다.

 

5. 주멍이(주맹의, 朱孟依) : 노가다십장출신

   직위 : 합생창전(合生創展) 동사국 주석

   별명 : 입운룡(入雲龍) : 구름 속으로 들어간 용

   이전기록 : 노가다십장출신, 1992년 합생창전집단을 설립한 후, 이름을 남김

   신문보도 : 주멍의는 광동 풍순현 사람이다. 일찌기 1980년 전중반에 20세 남짓한 그는 이미 도시의 노가다십장이 되어 있었다. 주멍의는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상점을 내는 것을 보고는 시정부를 찾아가 상업가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하고, 대가는 단지 건물주가 걷는 임대료에서 나눠받겠다고 한다. 개발과 경영을 한데 묶어 한꺼번에 기획하였다. 이때부터 주멍이는 사실상 이미 원시적인 부동산개발상이 되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사업상 첫번째 금맥을 찾게 해주었다. 주멍의는 1990년대 초기에 홍콩으로 가서 홍콩의 영주권을 얻었다. 1992년 그는 장영방, 육유기 부부와 함께 홍콩에서 합생창전집단을 설립하였다.

   소문 : 첫째, 주멍의는 아주 싼 가격으로 당시에 아직 궁벽진 곳이었던 광저우 천하구의 대량의 농지를 사들였고, 이것은 합생창전으로 하여금 토지자산만으로 이후 몇년내에 수배에서 10배이상의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것은 주멍이와 지방정부의 양호한 관계에서 유래되었고, 미리 광저우 신도시의 미래발전방향을 알 수 있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주멍의는 일을 함에 있어서 매우 조용하고, 생활도 드러내지 않으며, 거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그의 사진을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합생창전이 홍콩에서 상장할 때 반드시 동사국 주석의 사진을 제출하여야 했었기 때문이다.

   출신영향 : 어려서 노가다십장을 할 때, 비록 나이는 어려도 이미 부동산사업을 다루는데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후에 비교적 순조롭게 크게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평가 : 아마도 어느날 주멍의 사장과 우리가 길거리에서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르고 지나갈 것이다.